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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몽을 팝니다

by 서리가내린밤



노을이 물드는 시각, 재래시장 입구에 서 있는 중년 여자의 눈에 ‘태몽을 팝니다.’라는 문구가 들어왔다. 그녀는 잠시 멈춰 서서 간판을 응시했다. 간판 너머로 희미하게 빛나는 글자들은 마치 그녀를 부르는 듯했다. 젖은 미역을 든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고, 한참을 망설이던 여자는 이끌리듯 발길을 건너편으로 옮겼다.

시장 입구를 지나자, 모든 것이 변한 듯했다. 붉게 물든 하늘은 깊고 무거운 색으로 가라앉았고, 상점들 사이로 들리던 소음은 부드럽게 사라졌다. 발걸음 하나하나가 낯설고 조용한 세계로 깊이 빠져드는 느낌이었다. 길거리에는 사람의 흔적이 거의 없었고, 가게들의 간판들은 하나같이 오래되고 낡아 시간에 멈춘 것 같았다.

그때, 저 멀리서 한 남자가 허겁지겁 뛰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의 오른손에는 정육칼이, 왼손에는 돼지 다리가 들려 있었다. 남자의 험상궂은 모습에 놀란 여자는 재빨리 한 가게로 몸을 피했다.


가게 안은 기묘했다. 벽에는 손글씨로 적힌 메모들이 빼곡히 붙어 있었고, 진열대에는 보석, 잉어, 비단뱀, 과일 등이 놓여 있었다. 그중에서도 커다랗고 탐스러운 청록색 포도알이 여자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여자는 포도알을 바라보며 잠시 주저했지만, 손을 뻗어 그것을 집어 들었다.

그 순간, 가게 문이 열리며 아까 보았던 남자가 들어왔다. 굵고 거친 목소리가 가게를 가득 채웠다.


“내려놔요!”


놀란 여자는 본능적으로 손에 쥔 포도알을 힘껏 쥐었고, 그 결과 포도알은 터지고 말았다. 터진 포도알에서 퍼져 나오는 짙고 묵직한 향기가 가게 안을 가득 채웠다. 그녀는 손을 내려다보며 당혹스러워했다. 포도알에서 나온 액체는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며 기묘한 빛을 발했다.

남자는 경악하며 외쳤다.


“뭐 하는 짓이야! 당신이 망쳤잖아!”


“당신이 갑자기 소리를 질렀잖아요!” 여자는 당황한 나머지 맞받아쳤다.


둘의 고성이 이어지자, 가게 안쪽에서 주인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주인장은 느리게 다가와 터진 포도알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는 길고 헐거운 로브를 입고 있었으며, 눈빛은 깊고 차분했다.


“둘 다 그만하시오.”


주인장은 벽에 붙어 있는 포도알의 가격표를 가리켰다.


“여기 써 있는 대로 보상해야 하오.”


여자는 작은 글씨를 읽으며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사람의 눈... 이게 정말 사람의 눈이라는 말인가요?”


“그래요.”


주인장은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단순히 값비싼 물건이 아니라, 특별한 상징을 지니고 있소. 포도알은 잃은 것을 보여주고, 대가를 요구하지요.”


여자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저을 때, 남자는 갑자기 칼을 꺼내들었다. 그의 표정에는 두려움과 분노가 섞여 있었다.


“왜 내가 값을 치러야 하냐고! 당신 때문이잖아!”


남자의 분노가 극에 달하려는 순간, 여자는 장바구니에서 젖은 미역을 꺼내들었다. 그녀는 미역으로 남자의 손목을 감싸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만둬요! 더 이상 난장판 만들지 말아요.”


주인장은 두 사람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진열대에서 또 다른 포도알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큰 포도알은 단순한 물건이 아니오. 태몽의 값은 수명이지만, 이 포도알의 값은 양보요.”


남자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양보요?”


“포도알의 재료가 사람의 눈이라고 했지요. 그 의미는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뜻이오. 양보란 상대를 이해하고 자신을 내려놓는 것이지요.”


남자는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주인장이 알 수 없는 주문을 읊조리기 시작했다. 순간 두 사람의 시야가 깜깜해졌다.


어느새 시간이 흘러, 시장은 텅 빈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여자의 딸아이가 그녀를 부르며 멀리서 달려왔다.


“엄마! 어디 갔었어? 한 달 동안 안 보여서 얼마나 찾았는지 알아?”


여자는 멍한 표정으로 딸아이를 바라보았다.


"지현이니..?"


여자는 딸아이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여자는 시각도, 가게에 대한 기억도, 포도알에 대한 기억도 모두 사라진 듯했다. 그러나 딸아이의 손을 잡으며 그녀는 알 수 없는 안도감을 느꼈다. 그녀의 손엔 여전히 젖은 미역 한 묶음이 들려 있었다. 여자의 딸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 난리가 났지만, 여자는 앞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도 자신의 딸의 목소리와 온기를 느끼며 알 수 없는 안도감을 느꼈다. 붉게 물든 하늘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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