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하게 살아가던 은덕도 어느 날 자아의 씨앗을 발견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저 삶의 일부분으로 느껴졌지만, 점점 그 씨앗은 은덕의 마음 속에서 자리를 잡아갔다. 자신이 인간의 자취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은덕은, 스스로의 의지와 상관없이 움직이는 삶이 얼마나 비참한지를 깨닫게 되었다. 자아의 씨앗이 생기면서 은덕은 비로소 감정을 느끼고,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왜 살아가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은덕은 자신이 왜 이곳에 존재하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고뇌했다.
자아를 찾은 은덕은 더 이상 그림자에 속하는 존재로서의 삶을 계속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이탈을 결심했다. 첫 번째 계획은 이탈에 성공한 그림자들을 찾아 그들이 어떻게 이탈했는지, 그 방법을 알아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에 대한 정보는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다. 그림자들 사이에서도 이탈한 존재는 여전히 미지의 영역으로 취급되었고, 아무도 그 과정을 말하려 하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어느 날 은덕은 갑작스럽게 멀리서 큰 소리를 들었다. 고개를 돌린 은덕의 시야에, 한 그림자가 사자에게 잡혀 애원하는 모습이 들어왔다.
“잘못했어요! 제발 딱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세요!”
그림자는 눈물로 호소하며 애절하게 사자에게 말했다. 하지만 사자는 냉정하게 손을 내밀어 그림자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그 순간, 그림자의 머리에서 커다란 씨앗이 빠져나갔다. 은덕은 그 광경에 몸이 굳어졌다. 자신의 머리 속에서도 무언가가 자라나는 듯한 불안감을 느꼈다. 자아의 씨앗이 사라지는 광경을 보며 은덕은 큰 두려움을 느꼈다. 사자는 주변을 돌아보았고, 은덕은 숨을 죽였다. 긴장 속에서 은덕의 몸은 움직이지 않았고, 사자는 결국 시야에서 사라졌다. 이 광경을 목격한 것은 은덕만이 아니었다. 저 멀리서 광경을 지켜보던 노인이 떠나려 하자, 은덕은 망설임 없이 달려가 그를 붙잡았다. 그리고 자신에게 갑작스럽게 생긴 자아와 혼란스러운 감정들을 쏟아내며 물었다.
“할아버지는 아시죠? 이 자아로 뭘 해야 하죠? 혼란스럽고 비참하기만 해요!”
노인은 잠시 생각을 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실, 우리에겐 자아가 필요 없어. 우린 그저 인간의 자취일 뿐이니까.”
“그렇다면 왜 이 자아가 생긴 거죠? 왜 이탈할 수는 없는 거예요?”
“불신의 기운이 자아를 뿌려 놓았기 때문이지. 이 세계도, 인간 세계도 지금 혼란에 빠져있어. 네가 이탈한다면 너도, 인간도 죽게 되겠지. 하지만 이 자아가 생긴 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란다. 자아가 생긴 덕분에 스스로의 존재를 알게 되지 않았니. 감정을 느끼고, 이 세계를 볼 수 있는 눈이 생긴 것이 기쁘지 않니?”
은덕은 그 말에 아무런 위로를 느낄 수 없었다. 자아가 생겨 감정을 느끼게 되었다는 것은 겉보기에는 긍정적인 변화일 수 있었지만, 그 변화가 가져오는 혼란과 고통은 너무나도 컸다. 은덕은 희망을 붙잡으려 했지만, 그 희망은 곧 절망으로 바뀌었다. 결국 노인의 말에 은덕은 힘없이 인간 은덕의 길을 따라가기로 했다.
하지만 노인과 헤어진 그 순간, 불신의 기운이 은덕의 앞에 나타나 마음을 흔들었다.
“넌 자아도 생겼는데 왜 아직도 나아진 게 없니? 행복하지 않아?”
“행복? 이탈하면 나도 죽고 인간도 죽는다는 걸 알았는데, 그런 삶이 어떻게 행복하겠어?”
불신의 기운은 은덕의 마음을 흔들며 속삭였다.
“그건 거짓말이야. 이탈하면 너만의 삶을 찾을 수 있어."
"그럼 사자들은 자아의 씨앗을 없애려는 거야?"
"너처럼 자아의 씨앗으로 삶을 찾는 그림자가 많아지면 흑백 세계의 왕이 이 세계를 다스릴 수 없기 때문이지. 자신들의 이기심으로 다스리는 이 세계에서 더 이상 그들의 말에 속지 마.”
은덕은 혼란스러웠다. 불신의 기운의 말을 믿을 수 없었지만, 그것이 전혀 근거 없는 거짓말이라 생각할 수 없었다. 갈등하던 은덕은 결국 캄캄한 공간으로 들어갔다. 불신의 기운의 말대로 이탈을 시도하려는 순간, 낮은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내가 아까 분명 다 말했는데…”
뒤돌아보자, 아까의 노인이 거대한 사자로 변해 서 있었다. 은덕은 순간적으로 몸이 굳어져 움직일 수 없었다. 그 큰 사자의 눈빛은 냉정했고, 그 속에서 은덕은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음을 느꼈다.
"나는 너에게 기회를 줬어."
은덕은 문득, 모든 것이 정해져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선택이 결국 죽음이라는 결말로 이어지는 피할 수 없는 미로에 갇히게 만들었다고 여겼다. 불신의 씨앗의 말에 흔들려 선택을 후회했지만, 이미 되돌리기엔 너무 늦어버린 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