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려가 아니라 교만이였다.
- 너 괜찮아? 가 불편한 이유
- 배려가 아니라 교만이다.
내 일을 열심히 하고 있는데 갑자기 옆에 와서
" 오늘 괜찮나 보러 왔지? 안 괜찮네. 왜 이리 힘들어 보여? 정신은 어디 갔어? "
걱정반 농담반 던지는 동료가 있다. 한두 번은 위하는 마음으로 저러겠지 하고 넘겼다. 그러나 그 말이 썩 기분 좋지 않았다. 세 번째가 되는 순간 불쾌해지기 시작했다. 일에 집중하고 있는데 필요하지 않은 상황에서 걱정한다는 말 하나로 일 사이에 훅 들어와 집중을 깨는 것도 싫었지만, 내가 해야 할 걱정을 왜 자신이 가져가서 괜히 문제를 만들어 나에게 걱정으로 돌려주는지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순간 불쾌감이 몰려왔다.
" 이 정도 제 감정은 제가 알아서 할게요. 제가 도와 달라고 찾아갈 때 도와주시겠어요. "
순간 분위기는 얼어붙었다. 그러나 상대는 며칠째 내가 원하지도 않는 질문을 계속 반복해서 물었고, 내일 또 물을 것이다. 이건 말해야 한다.
" 아니, 나는 널 생각해서 걱정되어서 괜찮냐고 물었지. "
" 고마워요. 그런데 전 지금 괜찮고, 그 질문이 내가 문제가 있나? 괜찮나? 괜히 고민하게 하고, 힘을 잃게 해요. 제 문제는 제가 짊어지고 갈게요. 그러니 제가 필요할 때 도와주세요. "
나는 널 위해서라고 말하지만 상대가 요청하지 않은 도움은 때로는 선 넘은 오지랖이 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도움 앞에 망설이게 된다. 도와달라고 분명하게 말한 도움은 상대의 의사를 알기에 고민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말하지 않은 도움이 필요한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 순간 망설이게 된다.
' 내가 무슨 선택을 해야 하는 게 맞을까? 내가 도와주지 않아서 저 사람이 잘못되면 어떻게 하지? 이 부분은 내가 나서서 해결해 줘야 하나? 저건 저 순간 저렇게 하는 게 아니라 이렇게 해야 하는데...'
여러 생각과 함께 이 부분에 대한 문제 해결을 내가 알고 있으니 가서 저 사람이 힘들지 않게 말해줘야겠다.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런데 그 사람이 삶에 선택에 대한 책임은 내 책임이 아니다.
그 사람이 결정해야 하고 해결해야 할 그 사람의 선택이며, 책임이다.
때로는 상대의 선택에 결과가 실패라는 걸 알고 있다고 해도, 나는 입을 다물기로 했다.
삶에는 실패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 실패를 선택하고, 해결하면서 삶을 선택하고 살아갈 수 있도록 나는 그 사람의 선택을 인정하기로 했다.
부모가 되면 오지랖은 늘어난다. 자녀에게 좋은 것만 주고 싶은 마음에 자꾸만 실패를 미리 막게 된다. 내가 조금 더 살아보고 겪어 보았다고 자녀에게 실패를 허용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러다 문득 나는 멈추어 섰다.
' 내가 살아도 얼마나 살아 봤다고 이러는 걸까? 나는 아이보다 조금 더 살았고, 내 삶은 하나의 작은 경우일 뿐이잖아. 내가 알고 있는 경우의 수는 극히 한정적이야. 나도 다 알지 못하잖아. 제대로 깊이 알지 못한다면 다른 경우의 수는 충분히 일어 날 수 있으니 함부로 단정 짓고 말하지 말고, 스스로 선택하고, 대처하고 결과를 볼 수 있도록 놔 둬 보자. 나랑 다른 결과를 가져올 수 있잖아. '
그렇게 놔두었더니 때때로 정말 다른 결과를 가지고 왔다. 내 아이는 나랑 다른 아이였다. 그걸 보는 순간 알게 되었다.
나는 사실 얇게 알고 있었던 거구나.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내가 저지른 대부분의 오지랖은 내 얇은 지식에서 나왔다. 내가 조금 더 알고 있다는 생각에 상대가 원하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무례하게 질문 없이 상대의 삶을 끼여 들어 내가 문제의 답을 정확히 알고 있는 것처럼 말했다. 이건 내 교만이었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부끄러움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 올랐다. 다시 생각해 보니 사실 나는 아는 것이 생각보다 많이 없었다.
안에 아무것도 들지 않은 통은 소리가 나지 않는다.
통 안에 물건이 가득 들어도 역시 소리가 나지 않는다.
하지만 어중간하게 통에 물건이 들었을 때는 소리가 요란하다.
나는 때론 어중간한 삶과, 어중간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기에 요란했던 거다. 내가 어른이구나 느낀 스무살이 지나 서른쯤 되었을 때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완벽한 논리를 가진 어른인 줄 알고 내 주장을 강하게 펼치고, 떠들어 댔다. 시간이 지나고 비로소 알게 되었다.
난 참 아는 게 없었구나.
정말 얇게 알고 있어서 요란했던 거였구나. 그리고 그 떄서야 알게 되었다.
내가 보인 오지랖은 배려가 아니라 무례함이다.
배려는 질문이 먼저 와야 한다.
" 뭐 도와줄 거 있어? " / " 혹시 이야기할게 있니? "
먼저 물어보자. 아니요.라고 답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다시
" 아니야. 넌 할 말이 있어. 다시 생각해 봐 "
라고 말하지 말자. 그건 상대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교만함에서 나오는 내 만족을 위한 행동일 수 있다.
" 너 괜찮아? " 는 괜찮은 사람도 괜찮지 않게 만든다.
이는 너는 괜찮지 않다는 부정적 뜻을 포함한 말이다. 상대를 위하는 질문은 꼭 해야 할 상황이 아니라면 부정적 생각을 주는 말이 아닌 좋은 말이나 긍적적 말이 더 나을 수 있다. 그리고 모르겠으면 차라리 침묵하자.
원하지 않는 문제를 내가 꺼내서 짓누르거나 불편하게 하지 말자.
상대가 덮고 싶어 하거나, 원하지 않을 때는 그 문제의 선택과 대처는 그 사람이 하게 하고, 그 결과도 존중하고 삶의 실패는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부분이니 묵묵히 그 사람의 삶이 완성 되어 갈 수 있도록 놔 두자.
조용히 인정하고 실패할 선택이라도 격려하고 받아 들여 주는 것이 낫다.
내가 다른 사람의 삶을 선택하고 끼여 들려고 하지 말자. 그 사람의 삶은 그 사람이 완성시키고 선택 할 수 있도록 존중하고 기다려 주자. 실패 하더라도 " 내가 그럴 줄 알았다. " 가 아닌 그 결과 역시 그 사람에게 필요한 삶이니 이겨내고 다시 살아 갈 수 있도록 격려와 친절을 제공하는 것이 더 나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