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잘하는 사람이 될 수 없는 이유
- 더 이상 착한 아이가 되지 않을 거야.
- 잘하는 사람이 될 수 없는 이유
" 왜 이러는 거예요? "
" 저도 잘하고 싶었는데 또 사고를 치고 문제를 일으키니깐 너무 죄송하고 ... "
"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예요? "
" 제가 실망시켜 드려서 죄송합니다. "
잘하려고 애쓰다 망쳐버린 직원의 모습 속에 예전 내 모습이 보였다. 저 마음이 무슨 마음인지 알 거 같았다. 상대를 향한 말이지만 나에게도 전하는 말을 나는 내뱉었다.
" 저한테 잘하려고 하지 마요. 그냥 살아요. "
' 이건 또 무슨 말인가? ' 하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나는 그에게 다시 말을 이어갔다.
" 마음은 고마워요. 저에게 잘하는 모습 보이고 싶고, 절 실망시키고 싶지 않은 마음은 고마운데 제가 아니잖아요. 그러니 절 만족시킬 수 없어요. 본인이 문제라서가 아니라. 그냥 서로 다른 사람이기 때문에 그래요. 사람은 누군가를 만족시킬 수 있다고 생각해요? 없어요. 그건 각자 다르기 때문이에요. 그러니 당신은 당신의 삶을 살아요. 난 내 삶을 살게요. "
이미 지나가버린 아파했던 과거의 나를 향한 말이었고, 이제는 내려놓고 편안해져 가는 나를 향한 위로였다.
나는 이제 더 이상 누군가를 위해 살지 않기로 했다. 그냥 내 삶을 살기로 결심했다.
어릴 적 나는 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할머니는 혹여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거나 욕을 먹을까 하는 염려 때문에 엄히 키우셨다. 그런 할머니는 집안에서도 흐트러지지 않으셨다. 내가 기억하는 할머니는 살면서 이제껏 만난 사람 중 가장 대단하고 완벽한 사람이셨다.
할머니는 내가 학교에서 돌아 오는 시간에 맞추어 마을 어귀에서 날 기다리고 계셨다. 집은 늘 깔끔하게 정리 정돈 되어 있었고, 내가 먹을 그 날의 간식은 주방에 준비 되어 있었다. 나에게 간식을 내어 준 할머니는 책을 읽으셨다. 가끔 할머니가 사라져 찾아 다니다 보면 뒤뜰에 홀로 앉아 기도하고 계신 모습을 보았다. 그 흔한 동네 할머니끼리 모여 수다 떠는 모습을 본 적도 없었고, 티브이를 보며 퍼져 있는 모습도 본 적이 없었다. 낮잠 한번 주무시지 않으셨다. 부지런히 청소하시고, 밭과 화단을 가꾸셨고, 정갈하셨다.
다른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지 않게 하기 위해, 엄한 소리 듣게 하지 않기 위해 누구보다 엄격하셨고, 엄하시면서도 자상하셨다. 그래서 나는 착한 아이가 되어야 했다. 나는 그래야만 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아무리 열심히 살고 애를 써도 어른들의 기준에 맞는 착한 아이가 될 수 없었다. 나는 그런 아이가 아니었다. 그 때 마다 무너지고, 또 무너졌다. 가끔 오시는 엄마는 날 볼 때 마다 꾸짖으셨다.
" 함부로 뛰면 안된다.
허리를 펴고 단정한 자세로 있어라.
말은 천천히 낮은 목소리로 해라.
어른 말에 꼬박 꼬박 말 대답하지 말고 고분하게 예의를 갖춰 말해라."
나는 답답하고 힘들었다. 엄마가 권하는 로맨스 책은 재미없었고, 무협지나 판타지 소설, 추리소설이 재미있었다. 내게 사준 긴 치마는 거추장스러웠고, 책상 위에 올려놓은 로션은 뚜껑도 열어보지 않고 유통기한이 지나서 버렸다. 엄마가 집에 오는 날에는 일부러 늦게 집에 들어갔고, 친구와 과수원에 들어가 손이 새까맣게 될 때까지 오디를 따 먹고, 저수지 옆 절벽에 기어 올라 진달래를 꺾어 염소에게 먹이고, 사방팔방 뛰어다니며 놀았다.
난 엄마가 말하는 착하고 여성스러운 아이가 될 수 없었다.
사회에 나와서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여전히 위에서 요구 하는 역할을 잘해 내고 싶었고, 칭찬받는 잘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늘 무너지고 실패했다. 주위 다른 사람보다 열심히 잘했지만 끝까지 만족 시키지 못했고, 실망을 안겨 줬다. 나는 자꾸만 무너지고 멈추어 섰다. 하지만 나보다 못한 사람들은 오히려 더 잘 되는 걸 보고 의아했다.
난 저들과 무슨 차이가 있는 거지?
나는 옆에 사람을 관찰했다.
이겨내고 끝까지 간 사람은 칭찬받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다. 질책을 받는 걸 힘들어하지 않았고, 대수롭게 여기며 던져 버렸다.
" 선생님 괜찮아요? "
신기해 하며 묻는 내 질문에 그는 웃으며 대답했다.
" 기분도 안 좋은데 밥 먹으러 가요! "
그게 끝이었다. 선생님은 자신의 삶을 사는군요. 나도 모르게 속에서 깊이 올라오는 말을 내 뱉었다. 그는 짠하게 날 바라보며 말했다.
" 우리 너무 힘주며 살지 말자. 우리 그냥 살자. "
순간 눈물이 왈칵 터졌다. 나는 왜 착한 아이가 되기 위해 자꾸만 날 괴롭혔을까? 내 속에 있는 아이는 착하지 않았다. 그래서 늘 힘들었다. 애써 힘주며 버티고 있던 나에게 말했다.
이제 그렇게 힘주며 남을 위해 살지 않을 거야.
더 이상 욕 먹는것도 두려워 하지 않을 거고,
잘못될까 걱정하며 나를 옥죄는 것도 하지 않을 거야.
그냥 나는 내 인생을 살 거야.
나는 그가 아니기에 그 사람을 만족 시킬 수 없다는 걸 한참을 살고 난 후에 알게 되었다.
사람은 늘 칭찬 받을 수 없다는 걸 많은 욕을 먹어보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미움 받지 않고 살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걸 미움 받기 싫어 두려워 하며 많은 기회를 놓치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나는 참 미련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렇게 살고 보니 보호 받지 못한 아픈 내가 있었다. 이제 나에게 실망했다고 말하는 사람의 말을 듣고 피식 웃는다.
" 뭐 어쩔 수 없지! 사람은 언젠가 실망하게 되어 있어! "
라고 받아 넘기게 되었다. 예전에는 뒤에서 내 욕을 하고 수근 대는 소리가 정말 잘 들렸다. 그런데 어느 날 부터 내 귀에 잘 안 들리게 되었다. 누군가 내게 와서 말해 줘도 오래 기억 남지 않는다.
" 욕 안 먹는 사람은 없어.
내가 받아야 할 말이면 받는데 그렇지 않으면 신경 안 써.
대통령 욕도 하고 사는 세상인데 내 욕을 못하겠니? "
미음 받을 용기가 생기니 내가 더 이상 아프지 않게 되었다.
타인의 말이나 평판이 필요 없게 되었다.
그 자유로움을 경험하는 순간 나는 비로소 나다운 아름다움을 만나게 되었다.
나는 참 예쁜 사람이었다
그 아름다움을 나는 비로소 만나게 되었다.
아름답다는 말은 ' 나답다 '란 어원을 지녔다. 아름답다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아름'은 '알다'라는 동사 어간에 '음' 이라는 접미사가 붙어 알음이란 단어가 생겼다는 설이 있고, 한자 나(我) 아 자를 사용하여 '나답다' '나와같다' 는 말로 해석 된다고 하는 설도 있다. 나는 두 뜻 다 좋아한다. 아름다움은 나 다울 때 진정으로 아름답다 생각한다. 이는 알면 알수록 더욱더 아름다움은 짙어진다고 생각된다.
나는 이제 타인을 향한 시선을 거두기로 했다. 더 이상 착한 아이가 될 필요는 없었다. 이제 자유로운 나 다운 어른이 되고 싶다. 내가 나 다울 때 그리고 내가 비로소 내 인생을 살 때 나는 아름다워지기 시작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