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사하는 마음
촉각
젖은 손
부드러운 머리카락
차가운 바람
시각
카푸치노 색의 곱슬머리
어두운 우산
흐릿한 하늘
청각
빗방울 소리
바람 소리
나뭇잎이 흔드리는 소리
후각
흙 냄새
오래된 나무의 향기
비 내린 뒤의 비릿한 냄새
미각
입 속에 들어간 빗방울
부드러운 카푸치노처럼 따뜻한 갈색 머리카락 사이로 빗물이 차갑게 목덜미를 타고 흘러내린다. 어두운 우산 밑으로 스며드는 흙냄새에 그녀는 입술을 깨문다.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 사이로 그의 발자국 소리를 기다리지만, 차가워지는 바람만이 시간의 더딤을 알려줄 뿐이다.
1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거야?"
들어주는 이 없는 한밤 중, 그녀는 입안에서 투덜거림을 굴렸다. 한국으로 돌아오자마자 자신을 반기는 건 날벼락 같은 소나기뿐. 공항에서 마주친 그 남자가 아니었다면 지금쯤 비에 젖은 생쥐 꼴이 되었을 것이다.
'근데 그 남자는 날 아는 건가? 에이, 그럴 리 없겠지.'
아스팔트를 두드리는 빗소리 사이로, 연보라색 우산을 건네며 말없이 입꼬리를 올리던 그의 얼굴이 자꾸만 떠올랐다. 마치 오래전부터 그녀를 기다려왔다는 듯한, 그 따스한 미소가.
2
창밖은 어느 새 반물빛으로 물들었다. 차가운 유리창 위로 빗방울이 흐르며 세상을 흐릿하게 만든다. 간신히 보이는 시야 사이로 익숙한 얼굴이 다가온다. 회사에서 야근 중이라던 그가 낯선 여자의 우산 아래서 미소 짓고 있다.
3
뒤집힌 우산 아래서 깨질 듯한 머리를 부여잡은 채, 그녀는 스무 해 전 이곳에서 울던 어린 자신을 마주했다. 그리고 그 옆의 작은 손을 내밀던 낯익을 소년도 함께.
회전목마처럼 모든 것이 천천히 멈춰가는 이 순간, 차가운 바람이 뺨을 할퀴어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소년의 입술 사이로 '그'의 이름이 새어 나오기 전까지는. 그 이름에 심장이 쿵 울리기 전까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