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난, 무반응, 외면 앞에서 무너지지 않는 법
요즘 네 글 진짜 보기 싫더라
이런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나는 있다. 그날 이후 며칠 동안 밥도 제대로 못 먹고 글 한 줄 쓰지 못했다.
댓글이나 메시지가 아니었다. 전화로, 아주 또렷하게 들었다. 그 사람도 글을 쓰는 사람이었는데 아무렇지 않게 이유 하나 없이 내 글이 너무 이상하다고 했다.
“그냥 요즘 느낌이 별로야.”
“읽기 힘들어. 진심이 없잖아.”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어.”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그 목소리, 내가 허술하다고 확신하는 듯한 그 어조는 지금도 뇌리에 박혀 있다. 칼날 같은 말에 심장이 무너졌다. 다시 내 글을 읽을 수 없었고 한 문장 쓰는 것도 두려웠다.
나는 그때 묻고 싶었다.
“왜 그렇게까지 말해야 했을까?”
“왜 내가 쓴 글을, 굳이 이유도 없이 깎아내렸을까?”
하지만 지금은 이유가 궁금하지도 않다.
왜냐하면 이제는 잘 알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내 글을 '그냥' 싫어할 수 있다는 걸. 그건 내가 못 써서가 아니라, 그냥 그 사람의 취향과 감각, 혹은 감정의 문제일 수도 있다는 걸.
비난은 크게 들린다. 하지만 위로는 오래 남는다. 단지 우리가 고통에 더 오래 머무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내 글을 읽고 좋았다고 말해준 이들의 반응을 따로 저장해 두기 시작했다.
댓글, 메시지, 따뜻한 인사 한 줄. 스크린샷을 찍거나 복사해 두고, 마음이 흔들릴 때 꺼내 본다. 그 작은 말들이 말해준다.
“당신의 글이 누군가에게는 필요한 문장이었어요.”
그 한 줄이, 누군가의 비난 열 줄보다 훨씬 깊이 남는다. 비난은 감정을 건드리지만, 응원은 존재를 지지한다. 나는 그것을 기억하고 싶다. 그래서 쓰는 나를 지킬 수 있었다.
모두를 만족시키는 글은 아무에게도 감동을 주지 못하는 글이 될 가능성이 높다.
글은 누군가에겐 위로가 되고, 누군가에겐 불편할 수도 있다. 그건 내 글이 ‘문제’라서가 아니라, 글이 살아 있어서 그렇다.
단순히 ‘좋아요’를 받기 위한 글이 아니라, ‘기억에 남는 문장’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러기 위해선 먼저 나 자신을 설득해야 했다.
“이번 글은 누구에게 닿았으면 좋을까?”
그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면, 비난은 흐릿해지고 방향이 선명해진다. 모두에게 사랑받지 않아도 괜찮다는 걸, 나는 나로서 쓸 수 있다는 걸, 그렇게 내 글의 중심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래서, 나는 계속 쓴다
다시 말하지만, 누군가는 여전히 내 글을 싫어할 것이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나는 괜찮다. 왜냐하면 나는 내 글을 기다리는 단 한 사람을 위해 쓰기로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단 한 사람이 가장 먼저 구해주는 존재는 다름 아닌 나 자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