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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은 Oct 26. 2023

페소아가 되어, 나는 가끔 홀로 만찬을 즐긴다

낯선 환경과 감정은 나를 낯선 자아로 이끈다는 것을 명심하자


고독, 삶, 나




혼자만의 대화에 빠져 있던 도중에 순간적으로 타인과 대화를 나누고 싶다는 강한 욕망을 느끼면, 바로 지금처럼, 나는 지붕들 위에 폭포처럼 쏟아지는 빛을 향해 말을 건다. 소리 없는 산사태로 무너질 듯하여 더욱 가까이 보이는 도시의 비탈 위, 부드럽게 휘어진 모양으로 서 있는 높다란 나무들에게 말을 건다.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중에서


혼자 하는 식사, 이전에는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요즘은 흔한 일이 되었다. 여기저기 혼자 식사를 하는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처음 일본에 갔을 때 1인용 테이블에서 혼자 밥을 먹는 일본인들을 보고 놀란 적이 있었다. 십수 년도 더 된 일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이 우리 문화가 되었다.


나는 혼자 먹는 게 편하다. 물론 가족과의 식사, 친구와의 식사, 인품이 훌륭한 지인과의 식사는 더없이 기쁘고 즐거운 시간이자 선물이다. 다만, 혼자 먹는 밥은 생경하고 낯선 시간을 선사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나는 아주 가끔 혼자 만찬을 한다. 혼자 만찬, 이거, 하다 보면 재미가 쏠쏠하다.


낯선 인물을 스스로 연기하듯 재현해 보는 시간. 넓은 식당, 혹은 작은 노포, 어둑어둑한 주방에서 일하는 종업원, 가게의 오래된 장식, 불빛, 어둑어둑한 바깥 풍경 등 모두가 세트가 되고 미장센이 된다. 그 순간만큼은 나는 소설 속 인물이다. 이는 꽤 효용이 있는 사치다.


혼자 만찬을 하는 몇 가지 방법이 있다.


우선 약속 시간보다 30분쯤 먼저 도착해서 고기를 구우며 맥주 한 잔 마시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것은 실제로 내가 자주 이용하는 방식이다. 약속한 사람(들)이 오기 전 30분 정도 먼저 가면 짧으나마 나 홀로 시간을 만끽할 수 있다. 짬짬이 즐길 수 있는 혼자 만찬 요령이다. 보통은 약속 시간보다 먼저 나와 뭔가 먹고 있다고 해도 큰 실례는 아니다. 나의 숱한 경험상 먼저 고기를 구웠다고 뭐라 할 사람 없다.


현질을 할 만한 여윳돈이 있다면 가끔 사치를 할 요량으로 홀로 식당에 간다. 혼자입니다. 식당에 들어가며 이렇게 이야기하면 으레 그집 종업원들이 놀란다. 정말 혼자세요? 네, 혼잡니다.


혼자 놀기의 마지막 스텝, 혼자 놀기의 최상위 단계는 홀로 고기를 구워 먹는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 이야기가 맞다면 나는 혼자 놀이의 최상위 레벨에 있는 인간이 맞다. 나, 자주 혼자 고기를 굽는다. 넓은 테이블에 음식이 놓이고 나는 그 공간에 고독하게 혼자 머문다.


이러한 낯선 시간, 낯선 감정, 이질성은 독특한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홀로 있으면 오감의 문이 활짝 열려 모든 자극이 새롭게 받아들여지고 사물과 현상이 더 뚜렷이 눈에 들어오며 소리도 더 크게 들린다. 나는 정신이 곤두선 채 생각에 잠기고, 이방인이 되며 관찰자가 되고 고독한 인물이 되어 먹고 마신다.


나는 달아나고 싶다. 내가 아는 것으로부터, 내 것으로부터, 내가 사랑하는 것으로부터 달아나고 싶다. 나는 홀연히 떠나고 싶다. 불가능한 인도나 모든 것이 기다리는 남쪽의 섬나라가 아니라, 어딘가 알려지지 않은 곳, 작은 마을이나 외딴 장소, 지금 여기와는 아주 다른 곳으로.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중에서


우리는 이 세상에 올 때 홀로 태어났고, 이제 곧 이 세상에서 흔적 없이 사라질 때 역시 혼자 가야 한다. 생의 본질은 고독이고 불안이며 고통이기도 하다. 혼자 하는 경험, 체험, 제법 쓸모가 있다. 외로움을 직접 초대하는 것이다. 번잡하지 않게, 떠들썩하지 않게 혼자로 돌아가는 시간. 나는 그 시간을 즐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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