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고비를 힘겹게 넘었다 싶으면 또 다른 고비가 앞에 놓여 있다. 높은 허들 하나를 넘었는데, 어느새 더 높은 허들 앞에 서게 된다.
인생, 고난, 이 녀석 끝이 보이지를 않는다.
물론 삶이 순탄함의 연속인 복 받은 자도 없지 않으리라. 자신이 그런 사람이라면 신께 매일 감사해야 하리라. 왜냐하면 삶은 대개의 경우 고통의 연속, 고난의 반복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고통은 인간으로부터, 타인으로부터 생긴다. 학교, 직장, 공동체 안에서의 어려움은 대개 인간관계에서 발생한다. 악인은 널리고 널렸다. 사이코패스, 소시오패스가 아니더라도, 일상에서 아주 작은 악행을 일삼는 이들, 남에게 고통을 주는 이들, 험담하는 이, 모함하는 자, 거짓말하는 자, 괴롭히는 자, 지배하고 억압하려는 자, 때리는 자, 욕하는 자 등이 줄을 서 있다.
삶이란 선악의 측면에서 보면, 이러한 악 속에서 자신을 구원하는 과정이다. 우린 세상의 악 속에서 자신을 선의 길로 인도해내야만 한다. 이 길을 포기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누군가는 삶을 도중에 포기하기도 한다. 삶의 무대를 옮겨 도망을 가기도 한다. 약이나 술을 이용하는 이도 적지 않다. 그러나 이것들은 그리 좋은 구원의 방식이 아니다. 그럼 어떻게 하지?
나의 경험상 다음의 몇 가지를 늘 점검해 보아야 한다.
나의 고통은 정당한 것인가?
내 힘과 선택으로 극복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고 극복할 수 없는 것은 무엇인가?
나에게 고통의 해독제라 할 만한 것들이 존재하는가?
내가 겪는 고통 중엔 정당하지 않은 것들도 있을 수 있다. 피할 수 있으면 이것들은 피해 나가야 한다. 학교나 직장을 옮길 수 있다면, 그래야 한다면 이 또한 적절한 선택이 될 수 있으리라. 찾을 수 있고 실행할 수 있는 선택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실행 가능한 것은 과감하게 실행하는 것이 좋다. 관계를 끊는 것이 가능하고 그것이 좋은 대안이라면 그것도 좋다. 내 힘으로 극복이 불가능한 것에 대해서는 도움을 요청하거나 법의 힘을 빌려야 한다. 그것도 안 된다면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무시는 좋은 대안이다. 물론 무시할 수 있다면 말이다. 일부러 그 대상을 보지 않고, 의식하지 않고 지각의 영역에서 삭제해 버리는 것이다.
나에게 무례한 자, 일정한 규범의 선을 넘어 나를 모함하거나 위협하는 자를 향해서는 엄중히 경고할 줄도 알아야 한다. 가장 소중하게 대해야 할 사람처럼 나 자신을 대해야 하는 것이다.
나의 숱한 경험상, 내 고통과 고난에 가장 적절한 방식으로 공감해 주고 함께 대안을 찾아 주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아니 거의 없다. 타인은 내 일에 대체로 무관심하다. 그들은 고통에 있어서 그저 그림자 같은 이들일 뿐이다.
고통과 고난, 허들에는 해독제가 필요하다. 가족 중에 그러한 이가 있다면, 나의 고통에 공감해 주고 이를 같이 해결하려 돕는 이가 있다면 이는 더없이 큰 축복이다. 나의 경우에 내 아내는 내게 천군만마 같은 존재다. 나의 딸들 역시 혼돈과 고난의 해독제 같은 존재다. 나는 감당할 짐이 컸지만 그만큼 충분한 해독제가 있었다. 다행히!
음악을 들으라. 영화를 찾아 보라. 산책을 하라. 운동을 하라. 역기를 들라. 몸을 쓰고 부딪히라. 또 좋은 관계를 맺으라. 관계에서 혹은 인간에게서 생긴 고통은 또 다른 관계, 인간을 통해 극복할 수 있다. 찾아 보면 좋은 친구는 얼마든지 있다. 얕은 관계도 좋다. 어쩌면 얕은 관계가 나에게 부담 없이 큰 안식처가 되어 줄 수 있다.
오늘도 힘든 일상을, 허들을, 고난을 짊어지고 나아가는 이들이여, 피난처를 찾으시라. 견디시라. 이겨 내시라. 해독제를 사용하고 휴식처를 발견해 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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