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쓸모있는 인간일까?
이 질문은 많은 것과 연결되어 있다. 우선 내 가정에서 아빠로서 나는 쓸모있는가. 내 아이들에게, 내 아내에게, 나의 어머니와 형제들에게 나는 과연 어떤 쓸모가 있는가? 나아가 나에게 급여를 주는 직장에서 나는 쓸모있는가? 또 이 공동체, 지역사회에 나는 과연 필요한 존재일까?
이는 매우 어려운 질문이다. 동시에 자기 삶을, 운명을 개척해 나갈 때 반드시 필요한(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질문이기도 하다. 우리는 각자 개인으로서 살아가는 동시에 작든 크든 어느 공동체, 어느 사회의 일부이기 때문이리라.
죽음이란 그저 살아있는 것들의 일부이다.
시간 속에서 셀 수 없이 많은 인간(동식물)이 죽었다. 지금 살아 있는 자들도 언젠가는 죽을 것이고, 또 다른 생명이 새롭게 태어날 것이다. 삶과 죽음은 이렇게 반복되는 것이다. 니체가 말한 영겁회귀다.
대학 시절, 나는 니체를 좋아했다. (물론 대학 시절엔 마르크스를 더 좋아했다.) 니체가 말한 삶 긍정, 생 긍정에 박수를 쳤다. 모든 학생들이 집으로 돌아간 밤 늦은 시간, 혼자 도서관 2층 휴게실에 앉아 100원짜리 자판기 믹스커피를 마시면서 니체가 써 내려간 문장에 감탄하며 홀로 탄식하곤 했던 것, 그게 나였다. 인간은 스무 살이 넘으면 자기 생의 의미를 찾아 떠나기 마련이다. (어떤 인간은 더 일찍, 어떤 인간을 더 늦게) 대학 시절, 나는 그 질문에 답을 찾고 싶었다. 나란 존재의 의미가 뭘지, 나는 왜 태어난 것인지, 난 뭘 해야만 하는지. 그 질문에 답을 준 것은 사람들이었다. 마르크스, 니체 같은 사람들.
이야기가 딴 길로 샜는데, 다시 돌아가자. 나라는 인간의 쓸모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은 매우 유익한 일이다. 그것은 꿈, 목표와 연결되어 있고 꿈과 목표는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을 제공해 준다. 꿈과 목표 없이는 우리는 세계를 나의 방식 대로 인식할 수 없다. 철학이 필요한 이유다. (동시에 종교가 필요한 이유다.)
지금 이 생을 다시 살으라고 한다면 나는 어떤 기분일까?
이는 매우 핵심적인 질문이다. 이 질문에 대해 명확하게 대답할 수 없다면, 여전히 갈 길을 찾지 못하고 헤매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니체는 이 질문을 던지면서 그러므로 오늘 이 순간을 최고의 순간으로 만들어야 할 이유를 제시했다. 다시 돌아간다 해도 의미와 가치를 만들어낼 수 있는 삶이라면 이는 최고의 삶이자 선이다.
쓸모있는 인간이 된다는 것, 매우 중요한 문제다. 나의 행위와 지적 육체적 결과물이 의미와 가치를 지닌 것이라는 데 기쁨과 행복이 있기 때문이다. 오늘 지금 이 순간을 살되 아무 쓸모가 없다면 그것은 얼마나 무가치하고 무의미한가? 나로 인해 누군가 필요를 채우고, 기쁨과 평안을 누린다면 그것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어떤 이에게는 조금 어려운 주제일지 모르겠다. 쓸모에 대해 이야기를 꺼낸 것은 당신의 아이들에게 어떻게 말해야 하는가, 에 대해 다루고 싶었기 때문이다. 어설프게 세상의 도덕, 군중의 가치 따위를 아이들에게 주입시키지 말자. 아이로부터 놀려고 하는 미적 욕망을 빼앗지 말자. 내 아이가 쓸모있는 인간으로 자라리라는 믿음을 갖자. 그러려면 우선 자유로움, 행복감, 자기 효능감이 있어야 한다. 듬뿍 충분히 사랑받아야 한다. 존재만으로 찬양받아야 한다. 그 다음에 쓸모에 대해 함께 싸워야 한다. 내 아이의 쓸모를 창조하기 위해 내 아이에게 무기를 쥐어주어야 한다. 아이가 지닌 장점, 고유한 재능이 무엇인지 찾아야 하고, 그것이 이 세상에서 지닌 쓸모에 대해 토론할 진지한 토론 상대가 되어 주어야 한다.
나 자신을 쓸모있게, 그리고 내 아이를 쓸모있게!
오늘을 의미있게, 내 삶을 의미있게, 다시 반복되어도 좋을 오늘이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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