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부모가 되고 싶은 마음 굴뚝같은데 에너지가 바닥났어.
부모라면 대개는 좋은 엄마, 좋은 아빠가 되고 싶은 바람을 가진다. 이런 바람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 좋은 부모가 될 자격, 제1의 덕목은 갖춘 것이다. 이런 바람조차 없는 사람도 의외로 많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자, 우리, 우선은 체력이 부족하다. 인간이 가진 에너지란 한계가 있는데 이것의 대부분은 바깥에서 다 탕진하고 돌아오기 때문이다. 세상살이, 직장생활, 만만하지가 않다. 남의 돈, 공짜로 받아올 수 없는 게 세상 이치다. 직장에서는, 사회에서는 내가 가진 힘을 다 쓰고 집에 가라고 요구하지 않는가? 그래서 나도 모르게, 혹은 타의에 의해서 에너지가 바닥나 있는 것이다.
그건 한 사회 전체의 책임도 있다.
한 명의 아이는 한 사회가 키우는 것이다, 라는 말이 있다. 내 아이 교육, 엄격히 말하자면 오롯이 부모 두 사람만의 책임은 아니다. 아무리 부모가 좋은 육아의 준비를 했다고 하더라도 사회 여건이 이를 떠받쳐 주지 않으면 결핍이 생긴다. 영국 런던 취재를 갔을 때, 영국의 아빠들은 의무적으로 대개 오후 3시에는 퇴근하도록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영국 아빠가 한국 아빠보다 나은 아빠가 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빼어난 남자이기때문만이 아니다. 사회 여건이 영국 남자들로 하여금 좋은 아빠가 될 수 있도록 뒷받침해 주고 있다.
좋은 아빠가 되려면 필연적으로 나 자신과 싸워야 한다.
나만 해도, 좋은 아빠가 되려 직장에서 참 많이 싸워야 했다. 우리 아이들, 어린이집 다닐 때 늘 가장 일찍 가서 가장 늦게 하원하는 아이들이었다. 그거, 안 겪어 본 사람은 모른다. 어린이집 아이들은 한 명의 아이가 하원하면 언제 자기 차례가 될까, 하고 부모를 기다리기 시작하는데 만약 매일 같이 자기 부모가 제일 늦게 온다면 그 기분이 어떻겠는가?
아빠가 오늘도 늦었네. 너무 미안해.
나는 이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아이들 표정, 아빠를 기다리다 기다리다 지친 그 얼굴, 나는 잊을 수가 없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일찍 아이들을 데리러 가려 사투를 벌였다. 그러다가 선배들하고 많이 싸웠다. 그런데 어쩌랴. 선배가 내 아이 키워주나? 나는 그 알량한 선배들보다 내 아이가 우선이었다. 그래도 부족한 게 내 모습이었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싸워야 한다. 지쳐가는 자기 자신과, 내가 좋은 아빠가 되는 것을 방해하는 세상과. 때로는 매정해져야 할 때가 있다. 물론 자신이 속한 집단의 규범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회사에서 잘리면 이 아이들 어떻게 재우고 입히고 먹이겠는가?
부모는 전쟁 한가운데에서도 정신을 차리고 있어야 한다, 내 아이를 위해서.
삶이 고될지라도, 부모는 정신을 놓으면 안 된다. 지금 내 아이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냉철하게 생각하고 판단해야 한다. 남들이 낭떨어지에서 떨어져 내린다고 같이 뛰어 내리면 곤란하다. 군중심리, 집단무의식, 사회 문화 같은 것들, 조심해야 한다. 거기에 함정이 있다.
옆집 엄마가 초등학교 때부터 아이를 학원 보낸다 해서 내 아이도 그래야 한다는 법은 없다. 좁은 틀에서 사고하고 판단하면 아이 교육을 그르친다. 세계의 아이들이 어떻게 자라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 영국의 아이들, 미국의 아이들, 스웨덴의 아이들이 어떤 교육을 받고 자라는지 알아야 한다. 더 넓은 세계, 더 많은 정보와 데이터 기반 위에서 판단해야 한다. 주변만 둘러보자면, 마음이 흔들린다. 조급해지고 시야가 좁아진다. 그러면 지는 것이다.
팁을 드리자면, 틈틈이 유튜브를 서칭하라. 이것을 알아야 한다. 세계의 부모들은 대한민국과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교육한다. 우리의 방식, 반드시 옳은 것이 아니다. 교육이란 결국 스무 살 이후 경쟁력을 갖춘 성인으로 키우기 위한 것 아닌가? 그 목적을 잃어버리면 안 된다. 지금 당장 결과를 내는 방식은 아이의 미래를 망치는 지름길이 될 수 있음을 기억하라.
내 어린 시절을 떠올리는 것, 좋은 방법이더라.
나는 자주 내 어린 시절을 떠올린다. 이는 내 아이를 이해하고 내 아이에게 어떤 방향을 제시하는 데 있어 아주 좋은 방법이 되었다. 아이의 고민이나 생각을 들을 때 나는 옛날 내 어린 시절의 나로 돌아간다. 그 시절의 나로 빙의해 내 아이의 말을 듣는다. 눈높이를 낮추면 그 아이의 심장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 아이에게 필요한 대응을 해 줄 수 있고 그 아이가 원하는 표정을 지어 보일 수 있다.
아이들에겐 친구가 필요하다. 동시에 자신의 상처를, 고민을, 고통을 이해해주는 어른이 필요하다. 부모가 그 역할을 해 줄 수 있다면 더할나위 없이 좋으리라.
부모는 이미 지친 상태로 집에 돌아왔지만 다시 힘을 내야 한다. 내 아이에게 쏟아부을 에너지를 일부 남기고 돌아온다면 가장 좋다. 단 십 분이라도 좋다. 따뜻한 거실에서 소파에 앉아 아이와 대화하라. 이것은 아이 삶의 일부가 되는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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