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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마무시한 논리 무장한 내 딸, 호랑이를 키웠네

by 김정은

사무실에 출근했는데 큰딸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8시가 막 지난 시각이다.


어. 아가. 웬일이야?


아빠, 제라가 숨이 안 쉬어진대.


큰 딸이 말한다. 제라는 어젯밤 잠에 들기 전에도 숨이 잘 안 쉬어진다고 말했던 터였다. 딸래미 둘은 자주 싸우고, 특별히 큰 딸래미는 둘째를 쥐 잡듯 하는 경향이 있어 나는 평소에도 그게 못마땅했다. 둘째가 뭐만 먹어도, 뭘 해도, 뭘 봐도 큰 딸래미는 둘째를 막무가내로 닦달하고 나무란다. 소리를 지르지는 않지만 불러다 세워놓고 조근조근 을러메고 잡는다. 사람이 숨을 못 쉬게 구석으로 몰아넣는 것이다. 지켜보고 있자면 둘째가 안쓰럽고 첫째가 못마땅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물론 첫째를 구슬러도 보고 야단도 쳐 봤는데 백약이 무효하다. 자매 관계, 부모는 멀찍이 떨어져서 못 본 체 해야 한다는데 답이 없다. 그러던 차에 이런 일이 생기니, 나로서는 첫째를 문제의 원인으로 지목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게, 활리야, 제라 좀 마음 편하게 해 주면 안 되니?


아빠, 그게 무슨 말이야?


아니, 평소에 활리가 제라를 늘 몰아세우고 따지고 야단치고 윽박지르니까 제라가 숨이 안 쉬어지는 거 아냐?


첫째 딸래미, 전화를 툭 끊어 버린다.


나는 곰곰이 생각하다 장문의 카톡 메시지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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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대단한 효과를 기대하지는 않았다. 큰 딸래미, 보통이 아니다. 동생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아주 예민하고 고집을 꺾지 않는다. 자신은 잘못한 것이 없다, 모든 문제의 원인은 동생에게 있다, 이것이 큰 딸래미의 바뀌지 않는 생각이다.


메시지를 보낸 뒤 곧바로 딸래미에게 답장이 왔는데, 나, 깜짝 놀랐다. 문장이며 논리력이며 나는 두 팔을 다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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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구성이 예술이다. 먼저 자신의 감정 상태를 설명한 뒤 그 다음으론 나의 주장을 논리적으로 반박한다. 이러한 구조도 놀라운 데다 간명하고 분명한 단어를 사용해 나를 설득하는 논리력이 대단하다.


1. 자신의 감정 상태 : 나는 아빠 말에 당황스러웠다.


2. 자신의 질병이 동생 탓이 아니듯이 동생의 질병 역시 자신 탓이 아니다.


하, 놀랍다. 나, 이 말에 감동했다. 이 녀석, 호랑이였네.


어렸을 때부터 나는 두 아이를 대화로 길렀다. 자신의 감정을 판단하고 이해시키는 것, 주장 펼치기, 논리 구성하기, 비유법 등 생각하고 말하고 글쓰는 것에 대해 하나부터 열까지 대화를 통해 가르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소크라테스식 교육법이다.


그런데 이 녀석, 글을 잘쓰고 책을 많이 읽는 데다 논리적이란 건 알고 있었는데 이제 아빠를 논리로 제압하는 정도로 성장했다.


물론, 자기 방어다. 제라가 숨이 잘 안 쉬어지는 데엔 큰 딸래미와의 관계가 가장 큰 원인이 되었을 수 있다는 게 나와 내 아내의 공통된 견해다. 이 녀석, 괜찮은 논리를 들어 문제를 빠져나가려 하고 있는 것 맞다. 그런데 동시에 나는 감탄하고 말았다. 아주 간결하고 명쾌한 논리로 자신을 방어할 줄 아는 역량, 이것 보통이 아니다.


그래, 과학적으로 의학적으로, 따지고 들어가자면, 첫째 딸이 문제의 원인이라고 단정할 근거는 없지. 그저 추측하고 추정할 뿐이지. 아, 골 때리네.


호랑이 녀석을 키웠구나, 나 오늘 딸래미의 논리력에 놀라고 한편으로 (둘째의 문제와는 별개로) 대견했다. 첫째가, 이 녀석의 성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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