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에 아무 이유 없이 버려진 사람들
우리가 가장 이해할 수 없는 사실 중 하나는 우리들 자신이 이 세상에 아무 이유 없이 던져졌다는 거야. 우린 어느 순간 어딘가에 버려진 것이나 다름없어. 물론 아주 좋은 조건 속에 태어난 사람들은 버려졌다는 말이 맞지 않을 거야. 그들은 분명 좋은 환경 속에 태어났으니까 버려진 게 아니야. 어쩌면 인격이 훌륭한 사람들, 부모라고 불릴 만한 능력을 가진 이들, 아름다운 집과 기구들, 멋진 가구, 따뜻한 방. 하지만 이런 환경이 아니라 열악한 환경, 즉 아무것도 없는 상태, 혹은 아무것도 없는 상태나 다름없는 상태에 놓쳐진 이들은 탄생, 그리고 삶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지?
난 네가, 적어도 이 글을 읽고 있는 네가 그런 악조건, 최악의 상황, 혹은 최악의 상황이라 불러도 좋을 만한 환경에서 태어나고 자라고 지금도 살고 있다고 생각할게. 그렇다면 이런 종류의 삶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좋은 거지?
버려진 이들은 이제 어디로 가야 하지?
어쩌면 넌 여전히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지 못했을지도 몰라. 식물이 뿌리가 없다면 줄기도 가지도 뻗어갈 수 없듯이 인간 역시 뿌리가 필요해. 그래야 일정한 방향을 가지고 뻗어가고 확장하고 나아갈 수 있을 테니까. 인간에게 있어 악조건이란 뿌리가 없는 것이나 다름없어. 뿌리가 없거나 연약하거나 제대로 서 있지 못한 것이지. 그렇다면 그런 조건에서는 어떻게 나아갈 수 있을까?
너의 방황, 무지, 두려움, 결핍은 바로 뿌리가 없거나 연약하거나 모호하다는 데 기인하는 걸지도 몰라. 그렇지?
어디로 가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모든 인간에게 공평하게 주어진 숙제다
하지만 모든 인간은 사실 이 뿌리란 측면에서 나약하다는 점을 아니? 너뿐만 아니라 사실은 좋은 환경, 좋은 조건 속에서 태어난 이들조차 마찬가지야. 이렇게 말하면 용기를 가질 수 있을지 모르지만, 흔히 말하는 부자들, 귀족, 부유층, 중산층이란 사실 삶의 뿌리, 삶의 근원이나 이유, 즉 자신이 왜 살아나가야 하는지 왜 태어났는지 어떻게 인생을 설계하고 개척해 나가야 하는지에 대해 더 무지할 수 있어. 왜냐하면 이런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기 때문이야.
좋은 조건, 안락함, 여유와 부라는 것은 역설적으로 근본적인 문제를 외면하게 만들 수 있어. 그들은 어떤 측면에서 이런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도 없었기 때문이야.
오히려, 가난한 이들, 삶이 시작부터 고통스러웠던 이들, 뿌리가 없는 이들은 이 근원적인 문제를 해결해야만 하잖아. 왜 난 이런 상태일까? 왜 난 태어나면서부터 부모가 없을가? 혹은 내 부모, 내 가정은 왜 이모양일까? 왜 난 상처받았을까? 왜 난 이처럼 가난하고 모질고 나약하기 그지없는 환경에 놓인 걸까?
가난, 결핍, 외로움, 고통은 나를 파괴할 수 없는 한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
삶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질 수 있다는 점에서, 넌 귀족이나 부유층, 상대적으로 안락한 조건 속에 태어나고 자란 이보다 강해. 삶은 언젠가 죽음이란 종착지가 있어. 그렇지? 자, 그렇다면 삶이란 누구에게나 죽음이란 마지막으로 향해 가는 여정일 거야. 그런데 모든 이가 종류는 다르지만 각자 고통과 역경을 가진다는 걸 아니? 어떤 이는 부모로부터 받는 억압 때문에, 너무 높은 기대 때문에 고통스럽고 어떤 이는 삶에 대한 무지 때문에 어떤 이는 무지 가운데 그저 살아내야 한다는 의무감 때문에, 노동의 강도 때문에 사람에 대한 환멸 때문에 무관심 때문에 외로움 때문에... 삶의 무게를 견뎌내지 못해. 즉 거의 모든 인간은 나름대로 고통과 역경, 어려움을 가지고 있어.
그러니 고통과 역경, 어려움이란 측면에서 인간은 어느 정도 공평한 거야.
자, 너의 눈엔 너만 특별히 불공평하게 어려움에 직면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억울할 수도 있어. 실제로 그럴 수 있고. 하지만 눈을 들어 좀 더 넓게 보자면, 사실 모든 인간은 다 짐을 지고 있어. 그 짐의 종류가 다를 뿐이야. 이는 결코 네가 진 짐이 가볍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야.
결국 중요한 문제는 이제부터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 하는 것
자, 처음으로 돌아가서 우리 모두는 이 세상에 제각기 다른 모습으로 던져졌어. 그 조건은 다 달라. 어떤 이는 뷰유하게, 어떤 이는 가난하게. 하지만 삶이란 여정을 출발하는 과정이란 모든 인간에게 버거운 문제야. 이 점에서는 어느 정도 공평하다는 거야. 그러니, 우리에게 남은 문제는 얼마나 불공평한가보다는 이제 어떻게 시작할 것인가, 에 달려 있어. 나는 어떤 삶을 살아갈 것인가. 내게 주어진 여정을 어떻게 감내할 것인가, 말이야.
넌 어떤 삶을 살고 싶지? 너의 생이 어떻게 진행되길 바라지? 우리에게 남은 유일한 문제는 바로 이것뿐이야. 내가 얼마를 가졌고, 얼마나 배웠고 어떤 부모이고 어떤 집에서 사는지는 근본적인 차원에서 중요하지 않아. 물론 이는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서는 엄청난 차이이긴 하지만, 극복할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린 이 차이를 넘어설 수 있어. 생각해 봐. 모든 존재, 모든 생명은 어차피 거저 온 거야. 들판에 핀 꽃도 거저 왔고 사자 새끼도 새끼 고양이도 거저 와서 제 몫을 하다 죽잖아. 오직 인간만이 계층과 부의 차이가 있기에 그 문제가 커 보일 뿐이야.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분명한 목표가 있었기에 어디에서든 자신감있고 당당할 수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직업은 목수였지만 그는 세상을 구원한다는 원대한 목표가 있었어. 그 과정은 실로 고통스러웠어.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이 태어난 목적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고 단 한 번도 그 목표를 의심하지 않았지. 그는 스스로 가난을 택했고, 그럼으로써 자기 자신을 독려하고 마음을 다잡았지.
그러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목표야. 목표만이 우리를 바로잡을 수 있어. 목표가 있다면, 어떤 악조건도 견딜 수가 있게 돼. 과거와 태생, 조건, 환경을 탓하지 말고 목표를 세워야 해. 네 인생을 바로잡아야 해. 그렇게 된다면 길이 보일 거야. 남은 것은 그 길을 묵묵히 가는 것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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