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눈, 내 기억이 맞다면 오늘이 첫눈이다. 왜 이렇게 설레지? 마흔일곱인데 여전히 난 어린아이인 모양이다. 그렇다 해도 무슨 상관이겠는가? 자연의 섭리에 마음이 흔들리고 가슴 속 깊이 따뜻해질 수 있다는 건 그것 자체로도 행복한 일 아닌가?
나는 그런 시스템이 여전히 내 안에서 작동하고 있다는 데 기쁘다. 동심. 어린아이의 마음. 풋풋하고, 나약하지만 순수하고 무지하지만 잠재력이란 에너지가 있던 시절, 나를 움직이고 살게 만들었던 정신 체계. 첫눈 하면, 참 기억이 많다. 몇 개라도 떠올릴 수 있다. 어떤 일 때문이라고 공개하긴 싫지만 그날, 어머니와 나, 누나 셋이 기차를 탔다. 강원도 시골의 새벽 기차역엔 눈이 소복이 쌓여 있었다. 우린 심난한 상태로 기차를 기다렸고 산은 적막하게 저 멀리 버티고 서 있었다. 공기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어머니를 따라가면 거기엔 무엇이든 안정적인 게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게 집이든 방이든 무엇이든. 나와 누나는 그저 어머니를 따라가는 것 외엔 달리 생각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어린아이는 그저 따라가는 존재다. 어린아이는 스스로 목적지를 정할 수 없다. 그건 부모의 몫이다.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땐가 겨울에 첫눈이 내린 날 아침, 나는 가족 중에 가장 먼저 일어나 13층 아래 소복이 쌓인 눈을 바라봤다. 당시 내가 살았던 도시는 황량했고, 아파트단지 앞에 넓다란 공원이 있었다. 공원 서쪽으로는 몇 개의 상가 건물이 서 있었다. 공원 너머로 기찻길이 있었고 그 북쪽으론 농가 구역이었다. 그 모든 것이 하얗게 덮여 있던 광경을 잊을 수 없다.
크리스마스 트리가 있었던가. 논리적으로는 없는 게 맞는데 내 기억은 있었다고 주장한다. 내 기억 속 크리스마스 트리는 초라하고 약간 변변찮으며 처량하다. 아마도 어머니와 누나가 나서 손수 꾸민 것일 텐데 거기엔 미래에 대한 희망찬 무엇이라곤 전혀 발견할 수가 없는 것이다. 크리스마스 트리란 본래 희망적인 것일 때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과거에 대한 환희, 그리고 다가올 새해에 대한 벅찬 기대가 걸려 있어야 제맛이 나는 것이다. 내 기억 속 그날의 트리엔 그게 빠져 있다. 내가 서 있었던 넓다란 거실은 조용하고 적막하며 삭막하다.
나의 어린 시절은 환희란 게 없었던 것 같다. 내가 가지고 있는 기억 속 내 어린 시절은 한 마디로 무지이자 막연함, 그리고 암흑이다. 그렇다고 오해하지 마시라. 이건 어디까지나 언어적으로 표현했을 때 그렇다는 이야기다. 나는 어머니로부터 사랑받았다. 누나로부터 보살핌과 관심을 듬뿍 받았다. 누구에게나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나의 경우엔 그것만으로도 족하다. 나는 그 두 사람이 내 어린 시절의 전부였다고 생각한다. 만약 그 두 사람이 없었다면 내 소년기는 아무것도 써내려갈 것이라곤 없는 색채 없는 이야기가 되리라.
지금 내 집엔 아내와 두 딸이 만들어놓은 크리스마스 트리가 있다.
우리집은 부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가난한 것도 아니야. 딱 중간이야.
아이들은 말한다.
그래? 딱 중간이란 이야기는 어떤 의미지?
말 그대로 중간이지. 부족하지도 않고 넘치지도 않아.
그렇구나.
나는 아이들의 말에 탐탁잖다. 기묘하게도 그 말이 왠지 섭섭한 것이다. 물론 우린 아주 부자야, 라고 말할 수는 없으리라. 그건 거짓이다. 그런데 중간? 그래, 어떤 의미에서는 중간 정도가 맞겠지. 그러면서도 아이들이 우린 중간 이상이야, 라고 말해주길 바랐는지도 모른다.
그 바람은, 현재 만들어지고 있는 아이들의 기억, 그 기억이 환희로 가득하기를 바라는 마음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소년이었을 때, 어머니를 따라 기차역에 도착했을 때 바라봤던 그 산의 삭막한 풍경, 그리고 얼마 후 아파트 13층에서 내려다봤던 흰 눈 소복이 쌓인 공원과 농가. 그것은 환희의 풍경이 아니었다. 그러니 내 아이들의 기억에는 환희가, 환희 같은 것이, 혹은 환희 이상의 무엇이 담기기를 바라는지도 모르겠다.
(오늘 첫눈이 아니라고 말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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