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하다. 세상에 모든 의미 있는 것은 힘이 든다. 힘이 들지 않고서는, 고통 없이는, 대가를 치르지 않고서는 의미를 얻을 수 없다니. 적어도, 스무 살 이후 내 경험상으론 그렇다. 신은 참으로 고약하다. 하와가 최초에 선악을 인지하는 열매를 먹은 죄치고는 인류가 받은 처벌이 너무 크다. 모든 것이 고통이란 거친 강을 뗏목을 타고 건너지 않으면 얻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우리의 생이 아닌가? 이것을 깨닫는 과정이 삶이리라.
무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 혹은 '지식이나 경험이 없는 상태'
오랜 앎의 과정 끝에 어린아이의 특권이란 '무지'라고 나는 생각하게 되었다. 유년기에 나를 온전히 무지(알지 못하는 상태) 속에 가두어 준 어머니에게 늘 감사하게 된다. 어머니는 나를 믿고 사랑해 주었을 뿐 무엇을 강요하거나 다그치지 않았다. 학교 수업만 마치면 나는 그야말로 자유였다. 그것은 한 마디로 '무지의 놀이터'였다. 그 안에서 나는 자유롭게 탐색하고 모험하고 방황하고 놀았다. 나의 영혼은 그리 고통스럽지 않았다. 그래서 내 유년기, 온갖 기억, 행복하고 아름다운 기억으로 가득하다. 이 유년 시절의 다채로운 기억은 지금 나를 똑바로 서게 만든다. 어떤 힘든 순간이 닥쳐와도 이겨낼 준비가 되어 있고 맞서 싸울 용기가 있다.
이것을 깨닫자마자 나는 선언했다. 나 역시 내 아이에게 '무지'를 선물하리라. 아이에겐 '무지의 놀이터'에서 뛰어놀 권리가 있다. 그것만이 아이에게 풍요롭고 다채로운 기억을 만들어 주리라. 아이의 영혼은 고통없이 자유를 만끽하리라. 그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
'무지'란 나에게는 곧 '고통의 양적 적음'과 같다. 즉 고통이 적은 상태다. 그것이 무엇이 됐든, 알면 알수록 세계의 비참을 깨닫게 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만약 부모를 잃어 열 살 때부터 고아로 컸다면 그 아이가 받는 고통이 얼마나 클까? 그 아이는 너무 빨리 냉정한 세상의 비참으로 불려나온 것이다. 그 나이에 몰라도 될 것을 고통스럽게 체험하게 된 것이다. 우리가 그런 아이에게 느끼는 연민이란 그 아이에게 주어진 고통이 너무 이르다는 데 있을 것이다.
부모는 아이를 보호하는데 무엇보다 '때 이른 고통'으로부터 보호할 책임이 있다. 이는 절대 유약하게 기르라는 말이 아니다. 정신의학적으로 볼 때 과잉보호보다 강하게 키우는 편이 훨씬 낫다. 내 말은 일부러 고통을 주는 행위, 가학 행위로부터 보호하라는 의미다.
자녀에게 이른 고통 주기, 가학을 즐기는 우리 사회 부모들
요즘 아이들, 자살을 많이 한다. 어떤 조사를 보면, 자살 충동을 느껴 본 적이 있다고 답한 아이가 무려 절반에 이른다. 이는 부모와 사회의 가학 행위에 대한 아이들의 반응이다. 놀라운 결과가 아닐 수 없다.
공부가, 성적이 능사가 아니다. 아니, 너무 이른 앎은 죄다. 죄의 어원은 활과 과녁을 가리키는 말에서 유래했다는 주장이 있다. 즉, 화살을 잘못 조준하거나, 활을 아예 당기지 않은 상태, 혹은 아예 활을 들지 않은 상태 역시 죄가 될 수 있다. 너무 이른 앎이란 너무 일찍 활을 들게 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나라면, 어린아이에게 너무 일찍 활을 들려주지 않을 것이다. 참전을 위해 실전용 활을 드는 것은 시기가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지금 아이들에게 공부하라, 고 강요하는 이들은 지금 공부를 하지 않고 있는 어른뿐이다.
쇼펜하우어는 20대야말로 지식과 경험을 쌓(기 시작하)는 시기라고 말했다. 지금 공부하지 않는 사람(부모)이 아이들에게 공부를 강요한다, 이는 필연이다. 학습을 잘못 체득한 이들, 일정 기간에 학습을 멈춘 이들, 그래서 지금은 학습하지 않는 이들만이 자신의 아이에게 활을 들려주려 안달이 나 있다. 참전을 통해 전쟁의 참상을 아는 사람, 숱한 전우가 전장에서 죽음을 맞는 것을 체험한 이, 그래서 전쟁이 어떤 것인지 그 본성을 잘 아는 사람은 활을 일찍 들려 하는 아이를 말리는 법이다.
그것은 죄다. 어린아이는 활을 들지 않을 권리가 있다. 들더라도 가벼운 것, 모조품(활 모양을 본뜬 것), 살상 목적으로 만들어지지 않은 것을 들도록 권면해야 한다. 그것이 순리요, 제대로 된 부모다. 즉 아이들의 공부란 적절할 때 의미가 있다. 양이든 때든 넘치면 안 하는 것만 못하다.
그러나 오늘날 어른들은 한 살이라도 더 빨리, 더 무겁고 정교하게 제작된 활을 들게 하지 못해 병이 나 있는 듯하다. 맘카페 같은 초등학교 부모 커뮤니티엔 '내 아이는 고등학교 과정을 밟고 있다'고 자랑하는 이들로 가득하다. '내 아이는 초등학생인데 벌써 살상용 활을 쏘며 다닌다', 고 말하는 꼴이다.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내 반석이신 하나님께 말하기를 어찌하여 나를 잊으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압제로 말미암아 슬프게 다니나이까 하리로다, 내 뼈를 찌르는 칼 같이 내 대적이 나를 비방하여 늘 내게 말하기를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도다. (시편 42장 9-10절)
원수의 압제, 내 뼈를 찌르는 칼. 이는 생의 고통을 절묘하게 표현한다. 참 고약하지, 왜 신은 내게 시련을 주었을까? 성경 시편에서 말하는 바, 삶은 원수의 압제로 인해 슬프게 다니는 것, 또 내 뼈를 찌르는 칼 같이 나의 적이 나를 비방하고 모함하며 비웃는 전쟁터다. 삶은, 세상은, 인간의 생은 그런 곳이다.
쇼펜하우어는 '산다는 것은 그 자체가 고통'이라고 말했다. 누구나 스무 살이 넘으면 인생이란 전쟁에 참전하게 되어 있다. 어차피 생은 전쟁터다. 정신 질환 환자가 아닌 한, 이는 모든 인간의 공통된 조건이다. 어떻게 고통을 피할 수 있는가?
답은 생에 대한 의지(니체), 삶에 대한 강한 애착(쇼펜하우어), 성장뿐이다. 우리는 오직 성장을 통해서 고통을 극복하고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나 자신이 성장하고 있지 않다면, 내 아이에게 성장이란 비밀을 가르쳐 줄 수 없다. 성장하지 않는 자는, 지금 치열한 성장의 전쟁터에 참전하지 않은 이는 무모하게 내 아이에게 살상 무기를 쥐어 주어 내 아이를 고통스럽게 만들 수 있다. 이들은 그것이 아이에게 너무 이른 것인지 알지 못한다. 그것이 얼마나 아이에게 고통스러운 일인지 무지하기 때문에 도리어 그것을 통해 기뻐한다.
그 양과 시기가 적절하지 못할 때 배움이란, 공부란 가학 행위가 될 수 있다. 아이를 너무 일찍 세상의 비참 가운데 두지 말라. 아이들에겐 무지의 놀이터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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