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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은 Dec 11. 2023

좋은 글의 3가지 조건

본론부터 바로 말하겠다. 내 생각에, 좋은 글이란 다음 3가지 요건을 갖춰야 한다.


1. 다른 것이 있어야 한다.

2. 깊이가 필요하다.

3. 지금 유용해야 한다.


좋은 말, 좋은 생각, 좋은 글, 좋은 행동. 세상에 그런 게 있을까? 있다. 아니, 없지 않다. 그러나 이런 것은 매우 희소하고 귀하다. 착한 말, 친절한 말이 반드시 좋은 말은 아니다. 때로는 날카롭고 직선적이며 냉정한 말이 좋은 말일 수 있다. 좋은 행동도 마찬가지다. 늘 친절한 것이 흔히 좋은 행동 양식처럼 여겨지는데 좋은 행동은 때로 친절하지 않을 수 있다. 친절함이란 그렇게 해야 하는 경우에 절제 있게 표현되어야 한다.


좋은 말과 생각, 좋은 글과 행동은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좋은 생각은 좋은 글과 말을 낳고 좋은 행동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우리는 이러한 관계가 보기좋게 연결되어 있는 모습을 일컬어 교양이라 부르고 인품이라 칭한다. 흔히 말하는 것들, 즉 친절함, 착함, 자상함, 세심함, 부지런함 같은 것들은 모두 양면성이 있다. 예를 들어 착하다는 것 역시 기본적으로 좋은 성품을 뜻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바보 같음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착하다는 것과 바보 같음 혹은 순진함은 동전의 양면 같은 것이다. 따라서 착함의 모든 색이 바람직하다거나 좋다고 말할 수는 없다. 우린 때로 착함을 의지적으로 버려야 할 때가 있다. 불공정하거나 폭력적인 상황, 부당한 상황에서는 착하게 반응하는 것이 옳은 선택이 아닐 수 있다. 그땐 오히려 착함을 버리고 냉정하고 단호하게 저항해야 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모든 경우에 착해야 한다는 믿음을 신념처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딱한 일이다.


그러므로 인품, 교양, 인격, 지성이란 반드시 착함, 자상함, 세심함과 같이 가지 않는다. 칼 마르크스는 쉽게 격노했고, 스티브잡스는 독선적이란 평판이 많았다. 쇼펜하우어는 혼자 있는 것을 좋아했고 프란츠 카프카는 생부와 절연했다. 우리가 흔히 아는 정치인, 예술가, 작가, 철학자들은 착하거나 자상하거나 친절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오해하지 마시라. 다시 강조하지만 지성, 교양, 인품과 착함, 자상함, 이 둘을 등가로 생각헤서는 곤란하다.





교양, 지성, 인격이란 무언가 남다른 것이고, 향기가 배어나며 고귀한 것이다. 이것들은 모든 경우에 있어 착하거나 친절하거나 자상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부정의에는 단호하게 맞서고 막말을 서슴치 않을 수도 있고 악한 말이나 행동을 그냥 흘려넘기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자신의 교양과 인격을 지켜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글도 마찬가지다. 아름다워요, 좋아요, 근사해요 같은 것들로 가득한 글이 반드시 좋은 글이 아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단호하고 엄정하게 꾸짖는 글이 좋은 글일 수 있고 지독하게 비판적인 글이 좋은 글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좋은 글이란 몇 가지 조건을 갖춰야 한다. 우선 남이 한 이야기를 중언부언하는 것은 좋지 안을 뿐만 아니라 유용하지도 않다. 그것은 그저 무의미한 또 하나의 동의어에 불과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은 각자 다르기에 그 인간이 처한 조건과 환경, 고유한 철학과 되새김이 담긴 글은 언제나 쓸모가 있다. 철학의 역사란 어떤 의미에서 다름의 역사이기도 하다. 니체의 유용성은 칸트나 데카르트와 다르다는 데 있었다. 데카르트 철학을 되풀이하려고 했다면 니체 철학은 결코 인류 철학사에 있어 유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프란체스카 페트라르카를 최초의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로 평가하는 이유 역시 다름에 있었다. 그는 신 중심에서 인간 중심으로 글을 쓴 최초의 작가이자 라틴어가 아닌 이탈리아어로 작품을 씀으로써 르네상스 시대의 문을 열었다.




둘째, 깊이는 좋은 글의 또 하나의 유의미한 조건이다. 포털이나 블로그를 통해 올라온 수많은 글을 본다. 그러나 대부분은 그 내용에 있어 새로움이랄 게 없고 무엇보다 깊이가 없다. 도대체 하나의 글을 쓰기 위해 몇 분이나 사고하고 얼마 간의 사색을 거쳤는지 의문인 글이 넘쳐난다. 그런 글은 아무리 써도 본인에게도 도움이 안 될뿐더러 타인에게 미치는 영향도 크지 않다. 타인에게 미칠 영향이 왜 중요한가? 말이나 글이나 들어 줄 타인이 없다면, 읽어 줄 타인이 없다면 대체 무슨 소용이 있는가? 그러므로 말과 마찬가지로 글 역시 늘 타인을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이다. 좋은 글일수록 더 많은 타인을 향해 더 멀리 더 넓게 퍼져나가는 법이다. 그러려면 깊이가 있어야 한다. 어느 분야든지 간에 자신만의 독특한 관점을 만들어가기 위한 사색이 필요하고 그러한 사색이야말로 좋은 글을 낳는 것이다. 그저 생각나는 대로, 하고 싶은 대로 쓴 글이란 무의미하게 끄적거린 낙서와 다를 바가 없다. 표현이나 수사, 기교를 좀 갖췄다고 해서 없는 깊이를 있는 것처럼 포장하는 데엔 한계가 있다. 따라서 우린 좋은 글을 쓰기 위해 깊이를 가지려 노력해야 한다. 그것은 1차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유익하고 2차적으로 타인을 만족시킨다.




마지막으로, 유용성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왠지 다르고 깊이 있는 글은 유용하다. 유용한 글이란 여러 가지 측면에서 관찰할 수 있는데 무엇보다 현재성이 있어야 한다. 즉 바로 지금 써먹을 수 있는 것이 유용한 것이다. 100년 뒤쯤에야 간신히 적용될 이야기라면 지금 당장 무슨 유용성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흔히 볼 수 있는 유형 중에 글을 읽기만 하고 그 내용을 온전히 현재의 것으로, 자기 것으로 소화할 의지가 없는 이들은 말과 생각이 고루하다. 기껏해야 옛 현인들이 이미 한 이야기를 들먹거리면서 마치 현재를 꿰뚫어 보고 있는 것 마냥 말하는 이들이 있는데 이런 사람들은 지금 당장 내 앞에 있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쇼펜하우어가 말한 서적 철학자, 서적 학자들이다. 옛 고전에 파묻혀 사자성어나 읊을 줄 아는 대학교수는 민중이 지금 당장 마주 하고 있는 현실을 돌파할 만한 그 어떤 유용한 해결책 하나 제시하지 못한다.


글은 쓰지 않는 것보다는 쓰는 것이 낫다. 그러나 이왕 쓸 거라면 잘쓸 수 있도록 노력하는 편이 낫지 않은가? 그것이 자기 자신에게나 타인에게나 이로운 것이다. 그렇다면 좋은 글이 무엇인지 각자 고민할 필요가 있다. 좋은 글을 쓰는 이가 늘어난다는 것은 공동체와 사회에 큰 빛줄기가 내리쬐는 것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그것은 읽는 이를 즐겁게 하고 오늘 당장 처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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