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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은 Jan 02. 2024

딸내미가 화장하기 시작했다

논쟁은 오래전부터 시작되었다.


지금 맨얼굴 그대로가 얼마나 예쁜데 화장을 하려고 하니, 안 돼!


아내가 말한다.


다른 애들은 다 하고 있단 말야!


중1, 큰 딸내미가 반박한다.


나? 나는 그저 듣고 있을 뿐이었다. 이런 논쟁, 꽤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그리고 새해를 얼마 앞두지 않은 12월, 드디어 딸내미가 화장을 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 밑자락은 내가 깔았다.


지금 시작하나, 내년에 시작하나, 10년 뒤에 시작하나, 무슨 차이가 있겠니. 외국 애들은 중학생만 되면 차도 모는 판인데.


내 말에 아내는 대꾸하지 않았다. 내 말을 못 들은 건지, 아니면 동의하는 건지 알 수는 없다. 나에게는 동의처럼 느껴지는 침묵이 이어졌고, 며칠 뒤 딸내미는 혼자 시내에 나가서 친구들과 함께 드디어 화장품을 몇 개 구입했다. 화장 초보님의 첫 구매 프로젝트는 내 문자로 일일이 찍혀 날아왔다. 딸내미가 쓰는 카드가 내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래서 오늘 딸이 뭘 샀는지 다 안다.) 뭘 샀는지는 알 수 없으나 구매 장소와 구매 액수가 정확히 찍혀 있었다. 올리브 영, 15000원!


샀구나, 드디어!


나, 딸내미의 선언에 그저 묵직하게 동의를 해 준 것이다. 솔직히 나에게는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리라. 벌써 14살인데, 그 나이쯤 되면 꾸미고 싶고, 자신을 확인하고 싶고, 세상에 나를 더 나은 모습으로 내놓고 싶은 욕구가 생길 만도 하다. 나는 그 나이에, 아버지의 외투를 입고 외출한 적이 있다. 아버지 외투를 입고 외출한 옛 14살의 나나 화장을 하고 자신을 꾸미고 싶어 하는 지금 현재의 내 딸이나 같지 않은가? 그래서, 그저 나긋한 목소리로 딸 편을 든 것이다.





2023년의 마지막 날 밤, 교회에 갔다. 내 옆에 앉은 딸내미는 손수 장만한 화장 거울을 들고 입술을 빨갛게 칠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나는 괜히 웃음이 나왔다. 이 녀석, 다 컸구나. 듬직하다!


2024년 새해 첫날 새벽 1시 40분경, 송구영신 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나는 딸내미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다. 이제 막 중2가 될 딸은 걱정이 많은 모양이었다. 딸애에게 세상은 괜한 걱정거리를 안겨주는 시끄러운 동네일 뿐이다. 대학에 못 가면 인생 망친다, 지금 성적이 곧 네 인생이자 미래다, 좋은 학원은 어디일까, 나는 어느 대학에 갈 수 있을까, 내 인생은 잘 흘러갈 수 있을까? 짐작컨대, 내 딸, 벌써 이런 걱정을 하고 산다. 아빠가 아무리 제자리로 돌려놓아도, 세상의 관성에 의해 자리를 벗어난다. 나는 다시 같은 말을 반복한다. 아이를 제자리로 돌려놓기 위한 특수 처방이다.


네가 지금 배우는 모든 것은 누군가 공부한 결과잖니. 내가 열심히 공부를 한 결과는 반드시 타인에게 돌아가게 되는 거란다. 그러니까 공부는 애초에 경쟁이 아니라 공유란다. 남과 경쟁하기 위해 공부한다는 생각을 버리렴.


네 삶에 있어 경쟁이란 어제의 너와 오늘의 너 사이의 경쟁, 그 경쟁뿐이란다. 그것 이외의 다른 모든 경쟁은 무의미하다.


네가 목표를 가지고 더 높은 곳을 향해 올라가기 위해 공부하게 될 곳이 대학이란다. 그러니 네가 대학에 들어가기 전에 하게 될 모든 체험은 가치가 있을 거야. 공부뿐만 아니라 가족과의 관계, 여행, 고독한 시간, 친구와의 놀이, 읽은 책, 음악, 영화... . 이 모든 것들 중에 단 한 가지도 가치 없는 게 없다. 이런 것들 위에 너란 존재가 길을 찾게 될 테니까.


공부만이 전부라고 말하는 세상 사람들의 말을 믿지 마라. 그들은 네 인생을 책임져 주지 않는단다.


한참 이야기하는데 옆을 보니 아이가 자고 있었다. 얼마 간이나 나 혼자 떠들고 있었는지 알 길이 없었다. 아, 한숨이 나왔다. 그래도 중간까지는 듣고 있었겠지?


이제 막 화장을 시작한 내 큰딸내미, 이제 막 제 인생의 키를 쥐고 나아가는 내 딸을 따뜻한 마음으로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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