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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팝니다, 가격은 '열정'입니다#4

IT 에듀테크 VR 서비스기획자 면접 후기 - DDP

by 세보

마지막 면접 시간이 다다랐을 때, 해는 이미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에듀테크와 VR 사업을 하는 IT 스타트업. 하루 세 탕의 강행군 중 마지막 종착지였다.


면접장소 문을 열자마자 느껴진 공기는 무거웠다. 습도 높은 장마철의 공기처럼 피로가 꽉 차 있었다. 면접관의 얼굴에도 생기가없고 눈 밑은 어두웠다. 나 역시 하루 종일 긴장 상태를 유지하느라 미소 지을 근육조차 마비된 상태였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지쳐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감지했다.

"준비되시면 자기소개해주세요."

건조한 시작이었다. 나는 남은 에너지를 쥐어짜내며 준비한 멘트를 읊었다. 하지만 면접관의 눈은 내 자기소개서를 그때 읽고 있는 것 같았고 나와 눈이 마주치지 않았다.

"본인은 리더형입니까, 팔로워형입니까?" "리더형에 가깝습니다."

주도적으로 일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기 위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그 대답은 덫이 되어 돌아왔다. 면접관은 기다렸다는 듯 압박 질문을 쏟아냈다.

"부당한 일을 겪었을 때 기업에게는 어떻게 할 겁니까?" "그럼 팀원들에게는 어떻게 대처할 거죠?" "마감 기한이 얼마 안 남았는데 일이 추가되면 팀원들을 어떻게 설득할 겁니까?"

질문의 의도가 선명하게 읽혔다. 이 회사는 지금 '부당한 상황'이나 '무리한 일정'이 많고 그 환경 속에서 불만 없이 팀원들을 다독여 끌고 갈 '해결사'를 원하고 있었다. 그들이 찾는 리더는 비전을 제시하는 선장이 아니라 구멍 난 배의 물을 퍼낼 갑판장이었다.

나의 포트폴리오 중 'AI기반 큐레이션' 프로젝트에 대한 질의응답이 오갔다. UI/UX 기획자로서의 역량을 검증하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진짜 본론은 뒤에 숨겨져 있었다.

"기획 업무 말고 교육 운영 업무를 하게 될 수도 있는데, 괜찮습니까?" "스타트업이라 그때그때 일이 들어오면 다 해야 합니다."

'기획자'로 지원했지만 '운영'도 해야 한다. 말이 좋아 멀티플레이어지, 사실상 인력이 부족하니 빈 곳을 메꿔야된다는 뜻이었다. 커리어의 전문성을 쌓고 싶은 나에게 그것은 치명적인 조건이었다. 하지만 나는 "괜찮습니다"라고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나는 '을'이니까. 합격이 급하니까.

마지막으로 내가 질문할 차례가 왔다. 앞선 면접들의 교훈을 통해, 나는 가장 현실적인 질문을 던졌다. "제가 입사하게 되면 사수 분이 계신가요? 업무는 어떻게 배우게 되나요?"

면접관은 솔직했다. 너무 솔직해서 잔인할 정도였다. "1대 1로 붙어서 가르쳐주지는 못해요. 오면 바로 실무 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덧붙인 한 마디가 쐐기를 박았다. "우리 회사는 신입한테 '주도적인' 역량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주도적'. 취업 시장에서 그 단어는 종종 '방치'의 세련된 동의어로 쓰인다. 가르쳐줄 시스템도 이끌어줄 선배도 없으니 네가 알아서 눈치껏 살아남으라는 뜻이다. 에듀테크 기업이라면서 정작 직원을 '에듀'할 여력은 없어 보였다.

면접장을 나오니 밖은 완전히 어둠에 잠겨 있었다. 하루에 세 번의 면접. 누군가는 기회라고 불렀던 그 시간 동안 나는, 자책감과 허무함을 맛봤고, 소모품 취급을 받는 차가움을 견뎠으며, 맨몸으로 전쟁터에 뛰어들라는 무책임함을 마주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에서 퇴근길 스마트폰에 비친 내 얼굴은 초췌했다. 나를 증명하려다 나를 잃어버린 날. '열정'이라는 가격표를 달고 시장에 나갔지만, 세상이 요구한 건 나의 열정이 아니라 나의 '희생'과 '인내'였다.

주머니 속 스마트폰이 조용하다. 합격 전화가 올까 두렵고, 오지 않을까 봐 더 두려운, 그런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DDP에서 면접을 하루에 3번이나 본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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