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크리스마스는 다신 오지 않을 거야.

by 공진구

장시간 비행기는 상상 이상으로 힘들었다. 새벽부터 내린 눈 때문에 제설 작업을 하느라 비행기 안에서 2시간 동안 기다렸고, 맨 끝에 앉아서인지 데이터도 터지지 않아 답답했다. 미리 다운로드하여놓은 넷플릭스 시리즈를 보았고, 음악을 들으며 창밖 풍경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그마저도 질릴 때면 눈을 감고 잠을 잤다. 그러니 눈 깜짝할 사이에 14시간이 지나있었다.


유럽은 소매치기가 많아 인터넷에서 소지품 관리를 철저하게 하라고 극히 당부하길래 겁에 질린 상태였다. 입국 게이트를 지나 다양한 인종과 마주쳤을 때 긴장이 되었다. 혹시나 여기 있는 사람들이 내 물건을 홈쳐가면 어떡하지. 여행용 복대를 메고 휴대폰과 헤드셋에 스트랩 줄을 연결시켜놓았음에도 말이다.


49유로 티켓으로 프랑크푸르트 중앙역으로 향했다. 수많은 플랫폼 구역, 도착 시간과 목적지가 적혀있는 전광판, 중앙에서 존재감을 드러내는 시계, 빵과 각종 스낵류를 팔고 있는 노점상, 전구들로 빛나는 크리스마스트리들을 보곤 어렸을 적 동경했던 영화 해리포터가 떠올랐다.


쌀쌀한 바람이 부는 늦은 밤, 역에서 나와 트램을 타러 길을 걷고 있었다. 역 주변에는 거리에서 노상방뇨를 하는 노숙자와 마약에 취한 사람들이 많았다. 다행히 아무 일이 없었지만 내게 미디어에서 보이는 유럽의 화려한 환상을 깨뜨려줬다.


어눌한 영어 실력으로 체크인을 마치고 호스텔 안으로 들어가니 중국인 밴주가 있었다. 나를 처음 보자마자 한국인이냐며 알고 있는 한국어를 총동원해 격하게 반겨줬다. 자신의 직업은 변호사이고 독일 대학원에서 공부를 하고 있다고 했다.


언제 제주도에 여행을 간 적이 있는데 한국이 너무 좋아 한국어를 공부 중이라고 했고, 최애 드라마는 이태원 클라쓰라고 말해줬다. 중국에서 한국 드라마의 인기가 장난 아니라는 말을 들으니 한국의 위상이 높아졌구나 생각이 들었다.

프랑크푸르트 중앙역

다음 날, 새벽 일찍 일어나 짐을 싸고 호스텔 밖으로 나왔다. 비가 와서 그런지 한산했고, 물웅덩이 때문인지 첨벙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얕게 내리는 비를 맞으며 중앙역에서 뷔르츠부르크로 가는 기차에 탑승했다. 1시간 30분 정도 걸리는데 직원분이 오셔서 표 검사를 두 번이나 하셨다. 몇 분 뒤에 독일인 어르신이 무임승차를 하셨는지 벌금을 부과하는 것을 눈앞에서 보게 되었다. 내가 한 것도 아닌데 괜히 떨렸다.

2.8 유로

뷔르츠부르크역에 도착하고 배가 출출한 상태였다. 나가는 입구 쪽에 빵 가게가 있었는데,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와플을 2.8유로를 주고 샀다. 반죽이 짭조름하고 맛있어서 이틀은 굶은 사람처럼 허겁지겁 해치웠다. 사장님과 눈이 마주쳐서 It’s good! 따봉을 날리니 부끄러우셨는지 얼굴을 가리며 좋아하셨다.


하늘은 먹구름이 껴 우중충하고 이슬비가 내렸다. 독일 사람은 아무렇지 않은 듯 비를 맞고 있었다. 성탄절이어서 그런지 영업을 안 하는 가게들이 많았다. 날씨는 흐리고 지나가는 차도 없어 유령 도시에 온 것만 같았다. 세상이 멈춘 것 같았다.

뷔르츠부르크 궁전

호스텔에 짐을 놓고 가장 첫 번째로 향한 곳은 뷔르츠부르크 궁전이었다. 궁전 앞에는 깃발을 들고 있는 분수가 있었다. 고색이 짙은 건축물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교했고 아름다웠다. 아쉽게 내부에는 들어가지 못했지만 서울의 높은 고층 빌딩만 보면서 자란 나에게 뷔르츠부르크 궁전은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알테 마인교 풍경

하늘은 점차 어두워지기 시작했고 나는 숙소 근처에 있는 알테 마인교에 갔다. 뷔르츠부르크의 동부와 서부를 이어주는 다리인데 야경을 바라보며 손에 쥔 와인을 마시는 독일인들을 보니 낭만이 넘쳤다. 갈색 지붕으로 지어진 건물과 움푹 솟아있는 이름 모를 성당, 그곳을 유유히 지나가는 사람들. 이 낯선 도시에 점차 마음을 열게 되었다.

크리스마스 분위기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마트에 들러 립톤 아이스티와 과자를 샀다. 호스텔 주방에 앉아 먹고 있었는데 같은 방을 쓰는 일본인 유리와 마주쳤다. 서로 오늘 무엇을 했는지 안부 인사를 건네며 대화를 이어나가는 도중 호기심에 내가 물었다.


”오늘 무슨 날이야? “

”양이 너무 많아 보이는데 다 먹을 수 있어? “


“크리스마스니까 혼자라도 재밌게 파티를 보내야지. 괜찮으면 나랑 같이 먹을래?”


“나는 너무 좋지! “

가득 담긴 셀러드와 소세지. 한식과 만나다

유리의 제안에 나는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유리는 잠깐 기다려 보라며 어딘가로 가더니 와인 한 병을 들고 컵에 따라줬다. 식탁에는 샐러드와 소시지가 가득 담긴 그릇이 놓여 있었다. 나도 조금이라도 보답하고 싶어 캐리어 안에 욱여놓은 햇반 두 개와 비비고 김치, 소고기 장조림을 꺼냈다.


“헐 이거 김치야? 나 김치 엄청 좋아해!”


한 입 먹어본 유리는 조금 매웠는지 밥과 함께 먹었다. 다 씹고 나서는 이 김치 정말 맛있다며 혹시 일본에서 구매할 수 있는지 물었다. 신난 나머지 옆에 있던 소고기 장조림도 한 번 먹어보라고 권유했다.


“이건 김치와 다르게 안 매워. 짭조름해서 좋아할 거야. “


“이거 장난 아니다. 혹시 더 남는 거 없어? 사진 찍어도 돼? 이거 일본 가면 무조건 구매해서 인증할게.”

유리와 함께 사진도 찍었다.

우리는 부족한 영어 실력임에도 불구하고 번역기의 도움을 받으며 대화를 이어갔다. 유리는 독일에서 대학교를 다니고 있는데 지금은 잠깐 여행하는 중이라고 했다.


“너는 지금 여행 중이라고 했지. 어느 나라를 갈 생각이야?”

“독일부터 시작해서 오스트리아, 체코, 슬로바키아, 슬로베니아, 헝가리까지 여행하려고.”


“무슨 일본 애니메이션 좋아해?”

”강철의 연금술사랑 진격의 거인, 86 에이티식스! “


“한국 사람들은 일본 좋아해?”

“당연하지! 내 주변에 일본어 배우는 친구들이 얼마나 많은데?”


“한국 정치인들은 어때? 일본 정치인들은 이기적이거든. “

”한국도 똑같아. 할 말이 없어 그냥. “

서로 인스타그램도 교환했다.

서로의 나라에 궁금한 것을 이야기하니 순식간에 3시간이 지나고 4시간이 지나 새벽이 되었음에도 우리의 대화는 그칠 기미가 안 보였다.


우리는 남들 못지않은 특별한 크리스마스를 보냈다. 내가 만약 여행이라는 목표가 없었다면 지금 집에서 지루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을 거다. 여행이라는 목표가 있었기에 만날 수 있던 거고, 함께 밥을 먹을 수 있던 거겠지. 내일은 어떤 세상과 사람을 만나게 될까. 상상하며 잠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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