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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달 Nov 28. 2024

1화. 사건의 시작

[미스터리 추리소설] 나는 미쁘고 의로우사

1997년 10월 22일.



“하나도 재미없어!”



새빨간 단풍잎과 샛노란 은행잎이 거스를 수 없는 자연의 색채를 뽐내는 10월 어느 날, ‘들어가지 마시오.’라는 푯말이 세워진 거대한 느티나무 뒤로 6살 가인이 잔뜩 토라진 채 주저앉았다.


오늘은 가인이 재학 중인 소망유치원 가을 소풍날.


지금이 아니면 두고두고 후회할 것만 같은 맑고 화창한 가을 날씨에 유치원 원장은 놀이공원으로 소풍장소를 확정했다.


행여 원생을 잃어버릴까 반별로 단체복을 맞춰 입은 소망유치원 아이들은 하나 같이 들뜬 얼굴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소풍장소로 정해진 포포랜드는 15세 미만 아이들을 기준으로 만들어진 다양한 놀이기구뿐 아니라 직접체험이 가능한 작은 동물원까지 조성되어 있어 유치원 및 초등학교 소풍장소로 인기가 많은 곳이었다.


그럼에도 새싹반 가인은 포포랜드가 즐겁지 않았다. 그 아이에게는 너무도 익숙한 놀이공원이기 때문이었다.



“왜 또 여기냐고!”



통통한 볼에 심통 난 얼굴로 오리처럼 삐쭉 입을 내민 가인이 혼잣말을 뱉어냈다.


이곳 포포랜드의 소유주는 국내 중견기업 미래유통 회장 이강수의 아들 이태진 사장이었다.


그는 딸 가인이 태어나기 5년 전 서울 근교 부지를 매입해 아이들만을 위한 작은 세상을 만들어주고자 심혈을 기울여 포포랜드를 탄생시켰다.


물론 수익성과는 거리가 먼 투자였다. 그럼에도 이태진은 자금을 아끼지 않았고 그의 아내 도미연도 동물원 설계 및 조성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3년여의 열애 끝에 32살 동갑내기로 결혼식을 올린 이태진과 도미연은 원인을 알 수 없는 난임으로 인해 5년째 아이를 갖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하얀 날개의 아기천사가 내려와 회전목마를 타는 꿈을 꾼 후 도미연은 기적처럼 임신을 했고 9개월 후 딸 가인을 출산했다. 그리고 3년 뒤, 미연은 다시 건강한 사내아이 서인을 출산하며 그녀의 꿈을 완성시켰다.


4살 무렵 부모 손을 잡고 처음 포포랜드에 발을 들인 가인은 새로운 세상에 빠져 주말이면 늘 그곳에서 시간을 보내곤 했다. 이제 6살이 된 가인에게 포포랜드가 더 이상 신비롭지도 설레지도 않은 지루한 놀이터가 되어버린 이유였다.



가인이 포포랜드로 소풍을 온다는 소식에 시간 맞춰 도착한 이태진 부부가 보이자 몰래 도망쳐 나온 가인은 200년 된 느티나무 뒤로 숨어버렸다. 관심받고 싶은 6살 아이의 작은 반항이었다.


그렇게 5분쯤 지났을까?


한참을 토라져있던 가인이 나무 뒤에서 살짝 고개를 내밀었다. 혹시나 자신을 찾고 있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회전목마 앞, 색색별로 단체복을 입은 소망유치원 아이들이 저마다 시끄럽게 재잘대는 가운데 이태진과 도미연은 준비해 온 마시멜로우 꾸러미와 함께 티와 모자 세트를 아이들에게 나눠주는 중이었다.


환호하는 아이들과 선물을 가방에 넣어주느라 정신없는 선생님들이 가재 눈을 뜬 가인의 눈에 띄었다.



“치! 나는 찾지도 않네. 내가 없어진 줄도 모르나 봐.”



아이가 없어진 줄도 모르는 어른들에 단단히 삐진 가인이 머리카락 한 올조차 보이지 않도록 나무 가운데로 몸을 움직였다.


행여 뒤늦게 사실을 알고 이름을 불러대도 절대 나가지 않으리란 다짐으로.


그러나 얼마 못 가 꼬르륵 거리는 뱃속 신호는 6살 아이가 참기 힘든 본능적 압박이었다.



“아이 참…….”





가인이 등에 매고 있던 가방 속에서 막대사탕 하나를 꺼내 들었다. 6살 인생 최애 간식으로 그녀가 핑크빛 공주 옷만큼이나 아끼는 동그란 과일 맛 사탕이었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포장을 벗긴 막대사탕이 입안으로 들어가자 금세 기분이 좋아진 가인이 나무에 등을 기댄 채 나뭇잎 사이로 보이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아이는 막대사탕이 녹아 없어질 때까지만 숨어있을 작정이었다. 엄마 아빠에 대한 작은 복수심이었다.


별안간 동생이란 존재가 등장하며 나눠야 했던 가족들의 사랑에 가인은 사랑을 혼자 독차지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배워가는 중이었다.


온통 자신에게만 쏠렸던 시선이 흐트러지는…… 전과 다른 분위기에 묘한 소외감을 느꼈던 게 그 시작이었다.


가인이 세상 최고라며 함박웃음을 짓던 할아버지도, 퇴근 후 늘 가장 먼저 안아주던 아빠도…… 어느덧 동생 서인에게 같은 웃음과 같은 포옹을 하고 있는 어른들의 모습을 아이는 받아들여야 할 현실에 놓여있었다.


그렇다고 동생이 미운 건 아니었다.


사랑을 독차지하려 꾀를 쓰거나 투정을 부리지도 않는 그저 해맑은 3살 배기 남자아이였으니까. 다만 아무런 준비도 없이 갑작스레 느슨해진 관심이 6살 아이에게는 무척이나 낯설고 차디찰 뿐이었다.


그런 아이의 마음을 눈치챈 이태진과 도미연이 딸 소풍날에 맞춰 여기까지 온 까닭이기도 했다. 게다가 다니던 유치원을 퇴소한 후 소망유치원 원생이 된 지 이제 2개월 밖에 안 된 딸이었기에 부부는 더더욱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사랑스러운 딸을 힘껏 한번 안아주고는 이내 다른 아이들을 챙기느라 정신없는 모습에 가인은 또다시 소외감을 느끼는 중이었다.


바쁜 시간을 쪼개 놀이공원에 온 이유가 사랑하는 딸을 위한 것임을 어린 가인이 깨달을 리 없었다.



“푸~ 심심해.”



사탕에 입을 오물거리던 가인이 힘없이 중얼거렸다. 나무 뒤로 숨은 지 채 10분도 안된 사이었다.


아이는 아주 살짝 후회 같은 마음이 밀려오기도 했다.


싫증난 놀이기구에 질리도록 만져본 동물들이지만 이렇게 혼자 숨바꼭질을 하는 건 못 견디게 재미없었으니까.


더군다나 아무도 자신이 화가 나있다는 사실과 없어진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것이 사탕으로 허기를 달래고 있는 아이의 기운을 쭉 빠지게 했다.


‘그냥 나갈까……?’


북적거리는 인파를 뚫고 들려오는 친구들의 까르르한 웃음소리에 6살 인생 최대의 고민을 하던 순간이었다.



“집에서도 서인이만 예뻐하잖아. 엄마 나빠!”



뭔가를 떠올린 가인이 마음을 고쳐먹고는 다시 토라진 입술로 사탕을 오물거렸다. 막대사탕을 다 먹을 때까지는 엄마 아빠 그리고 선생님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기로 한 거였다.


그렇게 다시 5분 여가 흘렀다.


콩알만 해진 막대사탕을 입에 문 가인이 최대한 발소리를 낮추며 바닥에서 일어나려는 찰나였다.


바스락!


간신히 한 걸음을 뗀 빨간 구두에 마른 낙엽이 밟히자 놀란 가인이 잔뜩 겁에 질린 얼굴로 멈춰 섰다.



“어? 꼬마야!”



누군가 가인을 향해 아이가 가장 듣기 싫어하는 이름을 불렀다. 어른남자 목소리였다.


살짝 고개를 돌린 가인이 올려다보자 역시나 가인보다 몇 배나 키가 크고 건장한 남자가 아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살짝 덥수룩한 윤기 없는 검은 머리에 검은색 니트, 검은색 가죽재킷을 걸친 날카로운 눈빛을 가진 어른이었다.


순간 본능적 경계심이 발동한 가인이 몇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너, 언제부터 여기 있었어?”



어른남자 역시 살짝 놀란 얼굴이었다.


6살 아이를 내려다보는 눈빛도 이미 동심과는 거리가 멀어있었다.



“지금……이요.”

“정말?”

“…….”

“애 겁먹었잖아!”



잔뜩 겁에 질린 가인이 동그란 눈을 크게 뜬 채 눈치를 보자 남자 뒤에서 나타난 젊은 여자가 끼어들었다.



“지금 방금 나무 뒤로 왔구나. 그렇지?”



허리까지 숙여가며 나긋나긋한 말투로 물어오는 여자에 가인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자 꼿꼿이 허리를 편 여자가 남자와 무언의 눈빛을 주고받고는 묘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언니랑 오빠가 여기 놀이공원에 처음 왔거든. 근데 병아리 옷보니까 저기 저 유치원생 같은데, 맞니?”



이번에는 가인의 눈높이에 맞춰 쪼그려 앉은 여자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상냥하게 물었다.


작은 체구에 휘날리는 긴 파마머리, 청바지에 흰색 후드, 카키색 야상을 걸친 여자는 두껍게 쌍꺼풀 진 부리부리한 눈과 함께 연신 미소를 띠고 있었다.



“……네.”

“아, 그렇구나. 근데 왜 여기 있어?”

“그냥요.”



가인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자신과 눈을 맞춘 여자에게 대답했다.


나쁜 언니 같지는 않았지만 처음 보는 낯선 어른이었기에 차마 똑바로 눈을 바라보진 못했다.



“으~음 그래 알겠어. 그럼 언니가 뭐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



무척이나 친절한 여자의 음성에 가인이 두 눈을 멀뚱멀뚱 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기 서있는 아저씨랑 아줌마 말이야. 혹시 저 아저씨 딸이 너랑 같은 유치원 다니니?”

“……왜요?”

“어? 아, 그게…….”



예상치 못한 아이의 반응에 살짝 당황한 여자, 전유정이 고개를 들어 가인 뒤에 서있는 남자, 차진수와 눈을 마주쳤다. 그러자 고개를 끄덕인 차진수가 전유정 옆에 쭈그리고 앉아 가인을 향해 불쾌한 입 냄새와 니코틴에 변색된 누런 이를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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