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중 당신의 가방끈이
끊어진다면

헌혈 독려 순례길 응답한다 1988 24 레온

by 꿈충만


18일 레온 표지.jpg


무소유


순례길 중반을 넘어서며 봄이 오기 시작했다. 첫날부터 폭설로 인해 나폴레옹 길이 폐쇄됐고 눈비 바람이 심심하면 내리던 날들이 지나 아직까지 아침저녁엔 쌀쌀하지만 오후에는 따뜻한 날이 이어졌다. 앞으로는 따뜻한 햇살을 맞으며 잔잔한 바람을 느끼며 탁 트인 풍경을 보고 걸을 생각에 즐거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 이유는 바로 장갑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장갑을 두 개나 가지고 왔었지만 비에 젖고 불편해서 필요 없을 것이라 생각해서 알베르게에 놔뒀지만 그 날 이후로 비가 더 자주 왔고 날이 추웠다. 며칠은 잘 버텼지만 비를 맞으며 걸을 때 너무 추워서 손이 시려서 고민을 하다가 결국 구입했던 35유로 방수 장갑이 없어졌다. 장갑 구입 후 이삼일 정도 유용하게 잘 썼는데 다음날부터 거짓말같이 날씨가 꽤나 따뜻해져서 그전보다 필요성은 떨어졌다.


가끔 바람이 강하게 불 때나 장갑을 끼곤 했는데 어느 순간 보니까 장갑이 손에도 없고 주머니에도 없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한 2,30분 전에 서로 사진을 찍어주다가 핸드폰을 들기 위해 잠깐 옆에 놔둔 것이 생각났다. 아무래도 그때 장갑을 두고 다시 챙기지 못했던 것 같았다. 다시 돌아가 찾아보기에는 돌아온 길으 다시 걸을 만큼 엄두는 나지 않았고 그저 35유로가 아까울 뿐이었다. 더 이상 필요는 없더라도 귀국하고 산에 갈 때나 사용하려고 했는데 몇 번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고 잃어버리다니 정말 아쉬웠다.


혹시나 해서 뒤에 오는 순례자에게 장갑을 봤는지 물어보고 누군가 알베르게에서 물어보지는 않을까 기대했지만 그 35유로짜리 장갑은 다시 내게 돌아오지 않았다. 속이 참 쓰렸다. 35 유로면 3,4일을 먹고 자는데 생활비로 충분한 돈인데... 이제까지 한정된 예산을 아끼고 또 아끼려고 매일 가계부를 쓰고 쓸데없는 지출은 줄여왔는데 거금을 주고 산 장갑이 없어졌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내 잘못으로 인해 벌어진 일이니 그저 누군가 주워서 잘 사용해줬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이 일을 하늘이 보신 건지 운 좋게 나는 길을 가다가 버려져 있는 스틱 하나를 주었다. 누군가가 필요 없어졌는지 가지런히 벤치 위에 올려놓고 갔다. 스틱 하나만을 갖고 있던 나는 덕분에 스틱 두 개를 가지고 앞으로 힘차게 걷기 시작했다.


첫날부터 폭설과 바람에 고장 난 우산과 스틱 그리고 부러진 셀카봉과 잃어버린 장갑을 생각하면서 무소유가 생각났다. 내가 가진 것을 소중히 여기며 아낄 줄 알면서 지나간 것과 물건에 대해서는 집념을 버린다면 앞으로 남은 길과 삶을 살아갈 때 마음 편하게 걸어갈 수 있지 않을까?~


행진


날이 좋아서 우리는 음식점에 가지 않고 마을 벤치에 앉아서 가방에 가지고 다녔던 빵에 잼을 발라 먹었다. 마침 우리가 점심을 먹고 있을 때 반대편에서 많은 사람들이 행진을 하고 있었다. 행진에 참여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검은 옷을 입고 있었고 행지 앞쪽에는 당나귀를 탄 예수 상이 있었다. 그들은 예수상과 함께 성당으로 보이는 곳으로 행진하여 건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어떤 행사인지 아니면 이 마을만의 축제인지 알 수 없었는데 혹시나 해서 요일을 확인하니 일요일이어서 일요일 주일 미사라고 생각했다. 독특한 행진을 보고 밥을 다 먹고 다시 떠날 채비를 준비했다. 오늘은 레온에 도착하는 날이라 발걸음도 가볍고 신났다. 대도 시기 때문에 작은 마을보다 물가는 비쌀지 몰라도 알베르게 수가 많아서 좀 더 선택의 폭이 넓고 색다른 음식도 먹을 수 있고 또 사람 구경도 할 수 있어서 흥미롭기 때문이다. 레온 사람뿐만 아니라 레온부터 시작하는 순례자들도 많아서 이제까지 보지 못한 뉴페이스 들을 많이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빨리 레온에 도착해서 여유롭게 시내도 구경하고 휴식도 하고 싶었다. 레온까지의 길은 대체로 평탄한 길이었다. 가까워질수록 자연경관보다는 공장이 많았고 도로를 걸어야 하기 때문에 재미는 없는 길이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특별하면서도 기억하기 싫은 사건이 터졌다.


가방=인생의 무게


갑자기 잘 걷고 있던 준택이의 걸음이 멈췄다.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들어서 쳐다봤는데 황당한 사건이 터졌다. 준택이의 가방끈이 끊어진 것이었다. 한 달을 넘게 걷는데 혹시나 가방이 너무 무거우면 버틸 수 있을까 상상은 해봤는데 그 상상이 현실이 된 것이다. 처음엔 나와 준택이 우현이 모두 어안이 벙벙해서 어떻게 할까 고민하고 고민하다가도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눈, 추위, 비바람 등 시련이 가고 나니 가방 끈이 끊어지다니 황당할 수밖에 없었지만 이내 정신을 찾고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준택 : 다행히 팍 무너지지는 않더라고 괜찮을 거야

우현 : 맞아 허리끈 하고 가슴 벨트 있으니까 쌔게 졸라매면 괜찮아


연신 준택이는 담배를 태우다가 이내 침착해졌다. 우리는 이 사태가 너무 웃기면서 큰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서 안타까웠다. 고민하다가 마침 준택이가 바느질 용구가 있어서 대충 꼬매고 레온에서 수선집을 찾아가 고치거나 새로 가방을 구입하기로 했다. 어깨끈 하나가 끊어졌지만 가슴 부분과 허리 부분 벨트를 꽉 졸라매면 그나마 걷는데 지장은 덜했다.


우리는 예상치 못하게 준택이 가방끈이 끊어져서 레온을 눈앞에 두고 강제로 휴식을 했다. 나도 혹시나 가방에 문제가 있는지 잘 살펴보다가 뭔가 이상해서 동생들에게 물어봤다. "원래 배낭에 다 가슴 끈이 있는 거야?" 왜 내 가방에는 없는 거지?... 자세히 살펴보니 내 가방에는 가슴 끈이 없었다. 동생들 가방에는 어깨끈과 허리끈 그리고 가슴 끈이 있었는데 내 가방엔 없었다.


나는 이제까지 어깨벨트와 허리벨트만 있고 가슴 끈이 있어야 하는 줄은 몰랐는데 원래 등산배낭에는 가슴 벨트도 함께 달려있는 것이었다. 백화점에서 이 제품만 30% 할인 판매한 이유가 불량품이어서 인 건가 아니면 실수인가 별의별 생각이 들다가 준택이가 한 마디 했다.


준택 : 형 가방 'M'사 거예요?

충만 : 응 백화점에서 'M'사 매장에서 구입했는데 네 가방도 'M'사 제품이구나...


알고 보니 어깨벨트가 끊어진 준택이 가방과 가슴 끈이 없는 내 제품이 똑같은 'M'사 회사 제품이었던 것이다. 그저 허탈한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일상에서 사용하는 가방과 다르게 등산 가방에는 어깨벨트뿐만 아니라 가슴벨트와 허리 벨트가 달려있다. 허리 벨트는 배낭이 앞뒤로 흔들리는 것을 방지하고 배낭의 무게가 어깨에만 집중되는 것을 방지하고 허리로 분산해 체력 소모를 방지한다.


가슴벨트는 배낭이 무거울 때 배낭이 덜렁거리는 것을 막아주고 배낭이 뒤로 흐르는 것을 막아 허리와 고개를 굽지 않고 바른 자세로 유지하는데 도움을 준다. 이제야 내 배낭만 가슴벨트가 없는 것을 알고 억울했다. 만약 가슴벨트가 있었으면 더 편하게 걸을 수 있었을 텐데 출국하기 전에 잘 알아볼걸...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KKK?


준택이는 끊어진 벨트를 잘 부여잡고 나는 내 가방을 만든 회사를 조금은 원망하면서 걷다 보니 어느새 레온주의 주도 레온에 도착했다. 공립 알베르게는 5유로이고 사립 알베르게는 10유로였는데 우리는 편하게 쉬고 움직이기 위해서 사서 알베르게를 선택했다. 작은 마을의 사설 알베르게는 주인장이 있고 민박이나 하숙 같은 느낌이지만 대도시에서 사설 알베르게는 관리자가 따로 있고 며칠씩 묵어도 상관없으며 입출입도 자유로워 늦게 들어가도 상관없다.


37km 거의 10시간을 걸어서 다리가 아파 우리는 택시를 타고 부르고스에서 갔었던 뷔페 '웍'으로 저녁을 먹으러 갔는데 4시 30분부터~8시 30분까지는 영업을 하지 않아 조금 기다렸다 들어갔다. 법적으로 시에스타는 없어졌지만 아직까지 그 흔적을 볼 수 있었다.


식사가 끝나고 밤거리를 구경하며 여유를 즐겼다. 우현이는 내일 하루 쉬고 다음날부터 한국에서 우현일 만나러 온 친구와 함께 걷는다고 했고 나와 준택이는 이야기를 하다가 순례길 첫날 생쟝(St. Jean pied de port)부터 레온까지 17일 동안 쉬지 않고 걸어서 내일 하루 레온을 구경하며 휴식을 갖고 다음 날부터 다시 순례길을 걷기로 했다. 시내를 구경하다가 알베르게로 돌아가는 길에 갑자기 북과 나팔 소리 등 음악소리가 크게 들려서 그 소리를 따라가 봤더니 악단이 행진을 하고 있었다.


낮에 봤던 행진과 비슷한데 다른 점은 악단이 있는 것과 뒤에 따르는 사람들이 KKK단과 비슷한 복장으로 행진을 하고 있었다. 세명 다 처음 행진을 보고 깜짝 놀랐다."저 복장 KKK 단 아니야?"

자정이 다 돼가도록 악단은 연주하고 뒤에 KKK 단 복장을 한 사람들은 뒤를 따랐다.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누구 하나 시끄럽다고 말하는 이들도 없었고 심지어 집에서 테라스로 나와 다들 구경하느라 정신없었고 행진을 따라 걷는 이들도 있었다. 과연 뾰족한 두건을 쓰고 마스크를 쓴 이들은 누구인 것일까?



IMG_6279.JPG 순례자 무덤


IMG_6297 (1).JPG Mansilla de las Mulas
IMG_6305.JPG 행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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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G_6322.JPG 레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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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G_6339.JPG 레온 도착
IMG_6356.JPG 레온
IMG_6357.JPG 레온
IMG_6362.JPG 레온
IMG_6370.MOV.jpg 택시

문명의 혜택

IMG_6371.JPG 중국인이 운영하는 부페, 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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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G_6389.JPG 레온
IMG_6402.JPG 레온
IMG_6418.JPG 부활절
IMG_6443.JPG 레온에서의 첫 날


오늘 쓴 지출 내역

맥주 케이크 3.00유로

맥주 3.90 유로

알베르게 10.00

저녁식사 중국 뷔페 17.15


택시비는 준택이가 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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