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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혜선 Oct 29. 2019

거절을 당하는 건 굴욕적인 일일까?

인간관계. 생각. 중국 스타벅스

중국, 우리 동네 스타벅스에 커피를 마시러 왔다. 아기를 키우기 전에는 카페에 오는 이유가 주로 책을 보거나 노트북을 하러 오는 것이었기 때문에 콘센트가 있는 딱딱한 의자 자리를 선호했다. 그런데 지금은 잠깐의 휴식이 목적인 날이 많아 카페에 들어서자마자 재빠르게 푹신한 자리를 찾았다. 운 좋게 등 뒤를 든든하게 지켜주는 벽이 있는 소파 자리를 차지했다. 이어폰을 끼고 커피를 마시며 핸드폰을 만지작 거리고 있는데 한 여성이 말을 건다.  “죄송한데 여기 앉아도 될까요?”
 
당황스러웠고, 뭐 이런 무례한 경우가 다 있나 싶은 생각도 들어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커피 값에는 자리 값이 포함인데 낯선 사람과 작고 낮은 1인용 테이블을 앞에 두고 커피를 마셔야 하다니… 정말 무슨 영문인가 싶었다. 우선은 상황 파악을 해야 할 것 같아서 카페 전체를 훑었다. 자리가 없다. 4명이 앉을 수 있는 자리에 2명이 앉은 경우, 2명이 앉을 수 있는 자리에 1명이 앉아있는 테이블 몇 개가 있는데 아마도 그 여성분은 성별과 나이대가 비슷한 내가 적당하다 싶었던 것 같다. 나는 선택받은 자였다.
 
아기가 낮잠 자고 일어날 시간이 거의 다 됐으니 어차피 잠시 후 카페를 떠나야 하고, 커피 한 잔을 번갈아 가며 한 모금씩 나눠 마시는 것도 아니고, 작지만 그 작은 테이블 귀퉁이만을 쓰고 있고, 천하무적 이어폰까지 있으니 신경을 곤두세우지만 않는다면 내 공간을 침범당할 일은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괜찮기도 하고, 안 괜찮기도 한 상태로 맞은편 자리를 허락했다. 모르는 사람과 앉기는 식당에서, 기차에서, 버스에서 수도 없이 해보았으나 ‘공간을 판 다’는 그 유명한 스타벅스에서는 처음이었다.
 





이후 중국의 스타벅스, 적어도 우리 동네에서는 그 일이 꽤 흔한 일이었음을 알게 됐다. 이어폰을 꽂고도 말을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누군가 갑자기 나에게 친근한 미소를 보일 때면, 그 의미가 “우리 함께 앉을까요?”임을 알았다. 후에는 나도 “함께 앉아요”를 여러 번 써먹었다. 많은 이들이 별스럽지 않게, 때로는 흔쾌히 자리를 내주었다.
 
모든 일에는 예외가 있다. 자리 나눠 앉기에 맛이 들려가던 어느 날, 사람 많을 토요일 2시에 용감히 혼자 카페에 갔다. 정말로 자리라곤 40대 중반 정도 돼 보이는 부부의 앞자리뿐이었다. 부부는 나란히 옆으로 앉아있었다. 씩씩하게 성큼 다가가선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실례지만, 앞자리에 좀 앉아도 될까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우리는 당신의 말에 대꾸하고 싶지도 앉다’는 경멸을 담아 나를 쏘아보았고, 말 대신 고개를 가로로 내젓는 행동을 함으로써 다시 한번 강하게 거절의 의사를 표현했다.
 
“노!”
 
분위기가 무섭기도 하고 굴욕적이기도 해서 입구로 줄행랑을 쳤다. 심장이 뛰었고, 그 부부가 너무 싫었다. ‘뭐 저런 험악하고 인정 없는 사람들이 다 있나’하는 생각도 들었다. 짧은 외출을 조금이라도 더 즐기기 위해 카페까지 뛰어왔던 금쪽같은 시간, 혼자만의 시간으로 기대에 가득 찼던  들뜬 기분 역시 다 타버린 재마냥 몽땅 까맣게 으스러져버렸다.
 
갈 곳이 없어 어쩔 수 없이 걷는데 ‘왜 이런 굴욕적인 기분이 들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모르는 사람의 시간에 끼어들어 부주의한 말로 주말 휴식 시간을 망친 장본인인 내가 왜 불편함을 느끼고 있는 것일까?





 
독일의 철학자 페터 비에리는 그의 책 <<삶의 격>>에서 굴욕은 ‘욕구를 만족시켜주는 누군가의 의지와 횡포에 우리 자신이 휘둘리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자리에 앉고 싶어 하는 나의 욕구는 그들의 ‘동의’로 만족될 수 있었지만, 허락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횡포라고는 할 수 없다. 그들은 정당하게 자리 값을 지불했기에 허락하지 않을 권리가 었다.  
 
거절을 당하는 마음에 근육이 붙어있질 않다. 그들이 내가 카페에 들어서는 것을 지켜보며 나의 마음을 산산조각 내리라 작정하며 커피를 마시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저 권리를 침해당하고 싶지 않았던 거고, 내키지 않았을 뿐이다.
 
거절, 타인이 원치 않는다고 의사를 표현한 것이 굴욕은 아니다. 그저 거절일 뿐이다.
 
요즘 감정 과잉 상태다. 더불어 다른 사람의 감정도 확대 해석해 오해하고 스스로를 상처 입히곤 한다. 잘못을 인정하는 것, 객관적으로 상황을 해석하는 것이 요즘의 나를 위해 필요한 일이다.  머리를 흔들어 힘을 빼야 한다. 음악도 좀 듣고, 상쾌한 공기도 마시고, 하늘도 한번 봐야한다
 
왜냐하면, 내 앞의 사람 역시, 아프고 힘드니까.



<토머스와 그의 엄마> _ 메리 커샛



 




<커피 마시며 하는 이야기> 

https://brunch.co.kr/brunchbook/kafe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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