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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로 Jul 15. 2024

기획자의 고민

기획자는 우렁각시


"김 팀장! 서비스가 왜 이 모양이야?", "너희가 하는 일이 뭐야?", "통계 분석 이거 맞아?"... 이런 말들은 다 어디서 오고 어디로 가는 걸까? 그렇다. 경영진에서 시작해 곧장 기획실로 내려가는 말이다. 이번에도 규모가 작고 체계가 잡히지 않은 기획실에서 벌어지는 상황.




규모가 작은 회사의 기획팀은 CEO 입장에선 비서와 다름없다. 기획팀 하면 뭔가 그럴싸해 보이는 이미지를 풍기지만, 막상 기획실에 들어가 일해 보면 당황스러워하거나 내가 생각한 모습이 아니라는 말을 하는 신입들이 다수다. 그러곤 실망하여 다른 분야로 이직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기획에도 사업기획, 마케팅기획, 서비스기획, UI/UX기획, 상품기획, 브랜드기획, 전략기획, 운영기획 등 나열하면 끝이 없다. 그중에서 나는 서비스 기획팀의 애환을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서비스기획팀은 말 그대로 서비스의 전반적인 기획을 담당한다. IT의 경우 홈페이지 운영, 서비스 제휴 중심이지만, 서비스라는 범주가 워낙 광범위해서 어쩔 땐 마케팅기획, 또 어쩔 땐 웹기획의 경계를 넘나들며 업무를 수행하기도 한다. 심지어 다른 부서에서 귀찮아하거나 경계가 모호한 업무를 서비스기획팀에 슬그머니 떠 넘기는 경우도 있다. 그러다 보니 업무 범주가 본업 말고도 마케팅, 웹기획, 디자인, 상품 등으로 넓어지면서 일명 잡부라는 소리를 들어가며 소처럼 일하게 된다. 물론 기획 팀장이 힘이 있으면 상황은 역전되지만, 이곳은 안타깝게도 힘없는 부서장이다. 그렇다. 조리돌림의 서막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 모습을 옆에서 지켜본 나는 마치 동료가 하이에나들에게 둘러싸여 먹잇감이 된 모습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




어느 날, A이사가 기획 팀장을 급히 불렀다. 관리자 에러를 빨리 해결하라는 아우성이다. 할 일이 태산인 기획 팀장에게 또 하나의 업무가 늘었다. 문제는 지금부터다. 이사실에서 나온 기획 팀장은 우수에 찬 눈빛으로 팀원들을 바라본다. 그 눈빛이 얼마나 촉촉한지 이슬이 미끄러질 정도다. 팀원들은 눈치껏 회의실로 들어가 착석한다. 팀장이 상황을 설명하자 탄성과 함께 원망 섞인 말들이 오간다.


소리가 너무 커서 유리를 뚫고 다른 팀에까지 들리는 듯하다. 결국, A이사의 귀에 들어가 버렸다. 화를 참지 못한 A이사는 회의실로 들어가 산 정상에서나 지를 법한 함성을 내지르고 유유히 사라진다. 


전쟁터처럼 폐허가 된 회의실은 잠시 정적이 흐른다. 이후, 팀원들은 좀비처럼 자리로 돌아가 묵묵히 일한다. 멀리서 보면 무표정한 로봇 같다. 마음속의 사직서가 하나 늘었다. 그런데도 기획 팀장은 A이사의 요청만 머릿속에 맴돌며 정신없이 개발실로 향한다.


"개발 팀장님 계신가요?"

"네, 잠시 자리 비우셨어요. 조금만 기다리시면 오실 거예요."


잠시 후, 개발 팀장을 만난 기획 팀장은 읍소하며 말했다.


"바쁘신 줄 알겠지만, A 이사님이 문제가 있다고 해서요. 확인 좀 부탁드려요."

"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아무 문제없어요. 그리고 이렇게 찾아오지 마시고, 그룹웨어에 올려주세요."

"급하니까 그러죠. 한 번만 다시 확인 부탁드려요."

"저도 할 일이 많아서 나중에 확인해 드릴게요. 그리고 급하다고 해서 말로 대충 말씀하지 마시고요. 원인, 상황, 에러 코드 등 상태를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시고, 그 내용을 '요청 정의서' 양식으로 보내주세요. 제가 정확히 어디가 문제인지 알아야죠. 해변에서 바늘 찾듯 할 수는 없잖아요?"


이때, 휴대폰에서 진동이 울리며 '풍산개'라는 발신인이 떴다. A 이사에게서 온 전화다. 그렇다. A 이사는 개처럼 짖어대는 ADHD의 끝판왕이었다. 회의실에서 한바탕 소동을 벌인 지 1시간도 지나지 않았음에도 전화를 통해 문제가 해결됐는지 속사포로 물어봤다. 이 사실을 고스란히 개발 팀장에게 전달한 기획 팀장은 다시 협조 요청을 했다. 그러나 개발 팀장은 상기된 표정으로 말했다.


"벼룩이에요? 왜 또 와서 정신 사납게 하냐고요."

"죄송합니다. 사정 아시잖아요! 협조 좀 부탁드립니다."

"지금 6시 퇴근시간입니다. 내일 출근해서 봐드릴게요. 수고하세요."

"????"


그날 이 둘의 대화는 이것으로 끝났다. 기획실은 어김없이 오늘도 야근이다. 기획 팀장이 자리로 돌아와 M 대리를 불렀다.


"M 대리, 개발 부분은 내일 확인해 주기로 했어요. 그래서 지금 홈페이지 엑박(화면이 안 나오는 에러 메시지)이 뜨고 있죠? 이 부분 디자인팀에 요청해서 엑박 페이지를 귀여운 캐릭터로 수정 요청해 줘요."

"그럼 제가 기획서 작성해서 디자인팀에 요청하면 되나요? 그런데 문제는 제 잔업무가 너무 많습니다. 잔업무를 끝내면 저녁이에요. 기안서, 지출 결의서는 또 번외잖아요. 미치겠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걸 왜 저한테 물어보세요? 팀장님이 해결해 주셔야죠!"


다음 날, M 대리는 수정 요청서를 디자인팀에 보냈다. 몇 시간 뒤, 답신이 왔다. 디자인실로 와서 설명해 달라고 한다. 할 일이 많은 M 대리는 C 주임을 불렀다. 디자인실로 가서 팀장님이 요청한 내용을 구두로 전달만 하고 오라고 지시한 것이다. 경황이 없는 C 주임은 급히 내용을 파악한 후 디자인실로 향했다. 그리고 디자인 담당자에게 설명했다. 그런데 갑자기 디자이너가 짜증을 내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이번에도 또 그러네? 색상 및 콘셉트는 디자인팀에서 전체적으로 판단해서 하는 건데, 왜 자꾸 기획실에서 하나에서 열까지 간섭하려 하죠?"

"그게 무슨 말이에요?"

"아니, 우리는 크리에이티브적인 자율성을 추구하는 부서입니다만? 디자인 공장은 아니잖아요?"

"그럼, 가이드라인도 필요 없이, 그냥 알아서 하시겠다는 말씀이신가요?"

"아뇨, 가이드라인은 당연히 기획팀에서 해주셔야죠. 저희가 기획을 하는 건 아니잖아요?"

"그럼 어떻게 해달라는 말씀인지... 하..."

"그걸 왜 저한테 물으세요? 알아서 자~알 해주셔야죠. 기획실 맞아요?"


회의를 끝낸 이들은 각자 자리로 돌아가 팀원들에게 한 마디씩 했다.


"(디자인팀) 기획팀 맞아? 왜 전부 멍청해? 센스 없이..."

"(기획팀) 하... 이번에도 또 까칠해요. 개발팀, 디자인팀은 어쩔 땐 비슷하다니까요? 조율이 너무 힘들어요. 우리가 사랑의 오작교도 아니잖아요. 중간에서 왜 이런 수모를 당해야 하죠? 지들이 완전 상전이야! 우리는 하녀고..."


이러한 속 사정은 관심 없다는 듯, A 이사는 불호령을 내린다. 빨리 이사실로 오라는 긴급 호출이다. 급히 달려간 기획 팀장은 이사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


"당신이 지금 하는 게 뭐 있어요? 개발팀은 시스템을 만들죠. 그렇죠? 디자인팀은 예쁘게 디자인해서 고객들이 좋아하게 만들죠? 그렇죠? 마케팅팀은 돈을 벌어다 주죠? 그럼. 기획팀은 뭐죠?"

"죄송합니다."

"뭘 죄송해요. 여기가 군대도 아니고, 냉정히 생각해 보라고요. 기획팀이 증원돼서 현재 4명인데. 한 달에 월급만 1,200만 원 넘게 가져가요. 나도 대표님께 보고를 해야 하는데, 자꾸 밥버러지 소리 듣는다고요."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여기 열심히 안 하는 사람 없어요. 잘하시라는 겁니다. 성과를 내셔야죠. 책상에 앉아서 손가락만 굴리고 있잖아요. 머리 뒀다 뭐 합니까? 기획실 아닌가요?"

속으로 이렇게 외친다. '어떻게 성과를 보여줄까?'


기획 팀장은 본연의 업무는 뒷전인 채, 하루 종일 디자인, 마케팅, 개발 부서를 오가며 이사와 팀원들 사이에서 조율에 급급했다. 마치 조리돌림 당하는 듯한 하루다. 겨우 모든 일과를 소화하고 이제 막 자신의 일을 시작하려는 찰나, 주변이 어수선해졌다. 퇴근 시간이 된 것이다. 하지만 기획 팀장에겐 또다시 야근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처럼 기획팀의 노고는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 마치 전업주부가 육아와 살림을 도맡아 하면서도 그 기여를 인정받지 못하는 것과 비슷하다. 회사 내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음에도 말이다. 더 안타까운 점은 기획팀이 가장 쉽게 구조조정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성과가 적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이는 기획팀의 역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결과다. 기획팀은 회사의 미래를 설계하고 각 부서 간의 협업을 조율하는 핵심 역할을 한다. 단기적 성과로는 측정하기 어려운, 장기적이고 본질적인 가치를 창출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기획 팀장의 하루는 끝없는 야근의 연속이다. 월화수목금금금, 7일 내내 일하는 듯한 패턴이 그의 일상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이런 헌신에도 불구하고 그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현실이, 많은 기획팀 구성원들의 가슴에 무거운 짐으로 남아있다.



이런 상황에서 기획 팀장은 어떻게 현명하게 대처해야 했을까? 다시 본질로 돌아가자. 서비스기획팀의 핵심은 서비스 품질을 높여 고객 만족도를 올리고 재구매율을 높이는 것이다. 이를 위해 통계 데이터를 구축하고, 매출과 손실률을 관리하며 상부에 보고해 기여도를 인정받아야 한다. 또한 업무 효율성을 극대화하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 이때 팀장의 결단력과 조율 능력이 매우 중요하다. 


잔업무는 시간에 따라 함께 늘어난다. 이는 물리학에서 말하는 엔트로피(무질서) 증가와 같다. 팀장은 이를 줄이면서 팀원의 성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 무조건 시키는 대로만 하다 보면, 자칫 팀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할 수도 있다. 성과도 중요하지만, 냉정한 결단을 내리는 것이 더욱 중요하지 않을까. 선택과 집중 말이다. 


끝으로, 중소기업에서 기획팀은 여러 가지 일을 하느라 '잡부'로 불리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다재다능함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현업에 종사하는 기획자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 다른 부서와는 달리 기획팀은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받는다. 불합리한 상황이 아니라 더 많은 기회와 경험을 쌓을 수 있는 환경 속에 놓였다고 생각해 보라. 흥미롭게도 대기업 출신 기획자들이 스타트업(프리랜서 포함)을 설립할 때 유리한 위치에 있는 경우가 있다. 스타트업에서는 스펙트럼 경험, 문제 해결, 조율 능력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기획팀에서의 경험이 스타트업에서 간접 체험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새로운 관점에서 동기를 부여받을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마음먹기에 따라 세상은 다르게 보이는 법이다.



PS) 기획 팀장이 조리돌림 당하는 것을 보며, 나는 다짐했다. '나는 저렇게 되지 말아야지.' 시간이 흘러, 나는 다른 회사에서 프로젝트 장으로 일하게 되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자주 나오는 매우 유명한 대사가 있다. 딸이 어머니처럼 살지 않겠다고 하지만, 결국엔 어머니처럼 살아간다는 것. 그렇다. 말이 씨가 되어, 이번엔 내가 조리돌림을 당했다.(조리돌림이 유행이다. 여자 네 명에게 조리돌림 당하는 것도 모자라, 이곳까지...) 이처럼, 상황이 세팅(프레임)된다는 것은 매우 무서운 것이었다. 그때의 기억, 팀원의 충격적인 말, 주변의 무시와 조롱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남의 일이라고 가볍게 생각하면 안 되었다. 언제든 나의 일이 될 수 있으니까.



[다음 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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