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가치를 올려주고 있다면, 그 성과를 나에게 귀결시켜라.
남의 가치를 올려주는 일(현재)에 지칩니다.
그렇다고, 나의 가치(미래)에 집중하면 생활은 어려워져요.
역설이죠.
우리 대부분은 남의 가치를 높여주고 그 대가로 돈을 받는 반복적인 노동을 한다. 직장인이든 기업이든 프리랜서든 마찬가지다. 타 기업의 의뢰로 일하고 그 대가를 받는 구조다. 경험 없던 초년 시절엔 이런 노고가 스펙도 쌓고 돈도 버는 긍정적인 일로 여겼다. 반복 노동은 경험과 스펙을 쌓아줬고, 기업은 조직의 숙련도와 수익 창출이란 선물을 얻었다.
"땀은 절대 배신하지 않는다"는 신조로 날마다 최선을 다했다. 가난한 환경에서 자라 간절함은 더했다. 경력이 쌓일수록 남들과 같은 출발선에 조금씩 다가가는 느낌이었다. 물론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위기도 있었다. 1년, 3년, 5년마다 찾아오는 그 '위기'라는 놈 말이다. 아찔한 고비를 넘기고 나니 어느새 결혼이라는 인생의 새 장을 열게 됐다. 퇴사라는 화려한 계획은 뒷전으로 밀려났고, 미뤄뒀던 내 꿈의 마법 지팡이를 휘두르려 했지만 실패했다. 그렇게 시간은 또 바람처럼 흘러갔다. 이때가 아마 회사 생활 5~6년 차쯤이었을 거다.
생활의 감각이 무뎌지고 초심을 잃어갈 즈음, 참을 만큼 참았다 싶어 사직서를 제출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때 사랑스러운 아내에게서 전화가 왔다. "나 임신했어." '임신했어~' 그 한마디가 메아리처럼 울렸다. 기쁨은 잠시, 현실의 무게가 더욱 무거워졌고 사직서는 파쇄기 속으로 사라졌다. 이제 내 영혼은 가정과 회사에 완전히 저당 잡힌 셈이다. 하지만 아내도 나에게 말 못 할 무언가가 있는 듯했다.
부모의 자유는 사라지고 자녀 중심의 삶이 시작됐다. 물론 아이가 있어 기쁠 때도 많다. 축복이라 여기며 사회생활을 열심히 하리라는 다짐이 원동력이 되어 힘이 났다. 그럼에도 세월이 흐를수록 아내의 요구와 사회의 요구 조건을 수용하고 조율하다 보면 점차 나 자신이 소외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런 때 주변 친구들은 나보다 더 잘 살고 행복해 보여 더욱 주눅이 들었다. 기가 막힌 타이밍 아닌가. 행운의 여신이 준 기회도 이렇게 타이밍을 잘 잡았으면 이렇게 살진 않았을 텐데... 게다가 인스타 같은 SNS를 보면 나만 불행한 듯해 앱을 삭제하고 싶어졌다. 이때부터 우리 부부 사이에 복잡 미묘한 갈등의 싹이 트기 시작했다.
어쨌거나 이런저런 위기의 순간들을 하늘의 도움으로 잘 넘겼다. 세월은 나이를 먹음과 동시에 속도가 복리 이자처럼 서서히 가속화된다. 어느새 직장 생활 10년 차가 되었다. 긍정의 회로를 짜내 한편으론 이 10년의 경력이 가슴에 달린 훈장 같기도 하고, 지나온 세월에 대한 보상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실낱같은 희망을 떠올려 본다. 그러나 행복한 생각은 낙엽이 떨어지는 순간보다 짧았다.
와이프라는 이름의 VIP에게서 전화가 온다. 이럴 땐 남자도 여자 못지않은 육감을 발휘한다. "여보, 오늘 OO 입학식인 거 알지?" 어김없이 그 예상은 맞아떨어졌다. 그렇다. 자녀들이 학교에 간다는 사실을 잠시 잊고 있었던 것이다. 같은 시기, 가족에게 가장 중요할 때 회사는 희망퇴직이라는 비보를 전한다. 시대가 정년을 앞당기는 바람에 내가 그 범주에 들어간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아이들의 새로운 시작과 맞물려 내 직장 생활은 막바지에 다다른 듯했다. 회사를 다니며 틈틈이 미래를 준비하지 못한 나는 후회와 자책을 하면서 동시에 사회를 향해 술병을 나팔 삼아 원망의 메시지를 던진다.
불행히도 이때부터 자녀는 사춘기를 맞이한다. 부모의 관심과 뒷받침이 더욱 필요한 시점 아닌가? 그러나 보통 우리는 이 시점부터 정반대의 상황에 놓인다. 서로 상충되는 이 상황에 우리는 속으로 울며 갈등한다.
반면, 미래가 불안해 회사에서 언제 잘릴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미래를 우선순위에 두고 사는 이들도 있다. 결혼과 연애를 사치로 여기며 꿈과 목표를 향해 나아가리라 다짐한다. 물론 연애는 한다. 하지만 나의 경제적 안정이 최우선이다. 안정을 이루기 전이라도 자신의 라이프스타일을 존중해 주는 상대가 나타나면 쿨하게 연애할 수 있다. 두 마리 토끼를 잡고 싶어서다. 그 중심엔 어김없이 자본이 자리 잡고 있다. 그래서 언제 헤어져도 타격이 크진 않다.
단지 마음이 공허할 때, 육체적 본능을 충족해야 할 때, 주변의 시선을 의식할 때처럼 마음속 빈 공간을 채워야 할 때만 상대가 필요한 건지도 모른다. 물론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다. 미래를 함께 꿈꾸고 싶은 순간도 많다. 하지만 결혼은 현실이기에 냉철히 계산하고 따질 수밖에 없다. 이것이 현실이라 여기면서...
이런 자기중심적 성향은 가끔 일탈로 이어지기도 한다. 남이 하면 불륜, 내가 하면 로맨스라 했던가. 부적절한 행위가 아니라고 스스로 합리화한다. 나의 미래는 누구도 보장해 주지 않는다는 명제 아래, 선과 악의 중간에서 외줄 타듯 망설인다. 사회심리학에서도 사람과 상황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렇다. 사람은 사람과 상황이라는 환경의 영향을 크게 받는 사회적 동물이다. 그래서 상황이라는 방아쇠가 나를 악의 유혹에 쉽게 빠지게 한다. 환승 연애라는 말이 보편화된 요즘, 그만큼 사회가 자기중심적으로 변해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래도 부모님 덕분에 출발선은 남들보다 앞서 있음에 감사한다. 부모님의 도움이 없었다면 대학 졸업도 못 했을 것이다. 현실적인 비용을 일부 완충해 주셨기에 나는 온전히 미래 준비에 집중할 수 있었다. 이런 경제적 뒷받침은 내 마음의 여유를 더 넓혀 준다. 즉, 여유는 포용력과 시야를 확장시킨다. 그래서 남들보다 경제와 시장 흐름을 잘 살필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여유 있는 시간 덕분에 나는 그 시간을 미래 준비에 투자한다. 주로 경제와 자기 계발 관련 도서를 읽는 것으로 말이다. 남들이 타인의 가치를 쌓아주는 활동을 하는 그 시간 동안, 나는 온전히 나의 가치를 쌓는 일에 매진한다.
어느 날 로버트 기요사키의 저서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를 보게 된다. 이 책을 읽는 순간 또 하나의 통찰을 얻게 되는데, 그건 바로 이 그림이다.
이 그림에서 나는 어디에 속할까? 아마도 E의 범주에 있는 듯하다. 오 이런, 뒤통수를 맞은 듯 현타(현실 자각 타임)가 왔다. 책이나 유튜버들은 하나같이 왼쪽 분면에서 오른쪽 분면으로 넘어가려면 미친 듯이 노력하라고 외친다. 한마디로 내가 잠든 사이에도 누군가 나 대신 돈을 벌어다 주는 시스템을 구축하라는 뜻이다. 나는 속으로 '말은 쉽지, 실제로도 쉬울까?'라는 생각을 하며 씁쓸히 웃는다. 그런데 문득, 앞서 말한 사회심리학의 책 구절이 떠올랐다. 사람은 사람과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는 말. 즉, 상황이 바뀌면 내 몸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반응하고, 결국 정신도 부정에서 긍정으로 점점 적응한다는 뜻이다.
결국, 내 미래를 좌우하는 건 하나의 키워드로 수렴한다. 바로 "상황"이라는 것. 그렇다면, 현재 나는 E분면에 있는데 어떻게 오른쪽 분면으로 넘어갈 수 있을까? 경우의 수는 여러 가지다. S분면을 거쳐 오른쪽 분면으로 넘어가는 방법, 바로 오른쪽 분면으로 넘어가는 방법 등이 있다. 잠시 생각의 시간을 가져보기로 했다. 그러다 문득, 의문점이 하나 생긴다. 아니, 오류라고 해야 할까?
왜 꼭 오른쪽 분면으로 넘어가야 할까? 자본주의 사회의 본질 차원에서 틀린 말은 아니지만, 모두가 오른쪽으로 향한다면 왼쪽 분면은 누가 담당할 것인가? 피라미드 구조도 안정적인 삼각형 아닌가? 빈도율이라는 게 있을 텐데, 역피라미드가 된다면 균형이 맞지 않는다는 건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이다. 세상은 아직 수요자가 사람 중심이다. 공급자와 수요자의 패러다임 변화 가능성은 잠시 접어두더라도, 이 질문은 시간이 흐를수록 오류를 유발하는 명제가 될 수 있다. 단, 모두가 오른쪽으로 넘어가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늘어날 가능성이 높다는 전제하에서다.
그런데 사람의 뇌는 환경 변화나 불안정한 상황을 거부하는 성격을 지녔다. 그래서 오른쪽으로 가야 한다고 끊임없이 외쳐도 넘어갈 사람만 넘어가고, 다수는 뇌의 통제를 받는다. 즉, 피라미드 구조는 형태가 조금씩 바뀔 순 있어도 큰 틀은 바뀌지 않을 것이라고 유추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므로 오류는 일어나지 않는다.
결국 나를 포함한 다수의 사람들은 왼쪽 분면에서 다람쥐 쳇바퀴처럼 살아가야 하는 운명이다. 좋은 미사여구로 희망과 소망을 표현하고 싶지만, 자본주의 사회 구조상 현대에도 "내가 노예임에도 노예인지 모르는 세상 속에 살고 있음"을 자각해야 했다. 수백 년 전이나 지금이나 이러한 구조는 하나도 바뀌지 않았으니 말이다.
나는 오른쪽 분면으로 과감히 넘어갈 용기도, 상황도 되지 않는다. 하지만 오른쪽 분면에서 행복하게 살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다. 몸과 마음이 따로 노는 이 상황. 한편으론 내 정체성을 의심하면서도 인간 본연의 욕망이란 단어를 상정함으로써, 그것을 합리적 위안으로 삼는다. 그렇다면 나는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할까? 다람쥐 쳇바퀴에서 오랫동안 나오지 못할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세월이 흐르면 그곳을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 말이다.
이 대비되는 두 이야기는 실제 창업팀 및 여러 세대와 나눈 대화에서 공통점을 취합해 작성한 내용을 살짝 각색한 것이다. 물론 사람마다 자라온 환경과 생각이 각양각색이니 양극단의 내용에 속하지 않는 분들도 많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럼에도 이러한 환경에 놓여있고 고민하는 분들이 많기에, 다소 자극적으로 양극단으로 나눠봤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의 해법을 찾아야 한다. 아니, 실타래를 풀어야 하는 게 더 적절한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굴레에서 어떻게 벗어나야 할까?
나도 명확한 해법을 제시할 자격은 없다. 나 역시 왼쪽 분면에 있기 때문이다. 솔직히 오른쪽 분면에서 당당하게 제시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물론 오른쪽 분면을 잠시 경험해 봤기에 함께 고민을 나누는 차원에서 이 글을 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다음과 같은 명제를 제시하고자 한다. 정확히 말하면, 성공한 스타트업과 자산가들이 공통적으로 나에게 들려줬던 말을 내가 쉽게 수정해서 표현한 것이다. 바로,
타인의 가치를 나의 가치로 귀결시켜라!
이 문장을 보면 어떤 느낌이 드는가? 나 역시 '당연한 말 아닌가?'라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론 '원론적이고 교과서적인 내용'이라 여겼다. 그런데 시간을 두고 곱씹어 보니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조금은 알게 됐다. 가령, 편의점 알바를 할 때를 떠올려 보자. 알바 경험이 없다면 소설이라 생각하고 상황에 감정이입 해보라. 알바할 때는 보통 급여에 맞춰 시키는 일만 한다. 지시받은 범위에서 남의 가치를 높여주려 노동을 제공하고 그 대가로 급여를 받는다. 자, 이게 전형적인 다람쥐 쳇바퀴의 표본 아닌가?
다람쥐 쳇바퀴를 달리 표현하면 "미래의 땔감을 팔아 생존을 위해 현재에 불을 지펴 소멸시키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이렇게 미래를 땔감으로 소멸시키니 미래는 당연히 없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미래를 준비한단 말인가? 그런데 시야와 관점이란 놈은 마법사처럼 참으로 신비로운 구석이 있다. 관점의 전환에 따라 같은 상황에 처해 있어도 누구는 현재를 살고, 누구는 미래를 준비하는 사람으로 바뀐다는 말이다.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단순히 알바를 하러 온 게 아니라 내가 편의점 사업을 위해 체험 알바를 하러 왔다고 마음먹으면 180도 세상이 바뀐다는 뜻이다. 관점은 사고를 바꾸고, 다른 시각에서 생각하게 함으로써 결국 우리의 관념을 조금씩 바꿔놓는다. 이러한 관념은 신념과 사명감에 영향을 미쳐 동기를 유발하고 행동으로 이어지게 만든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자본이라는 강력한 중력에 이끌려 우리는 종종 자유로운 사고를 포기하곤 한다.)
나는 편의점 알바가 아닌 창업을 해야만 하는 상황으로 가정했다. 물론 더 현실적이고 건설적인 상황을 설정하면 더욱 좋다. 이렇게 스스로 높은 기준을 세우면, 그것을 더 많이 알아야 하고 더 많은 정보를 습득해야 한다는 마음이 생긴다. 그래서 시간대별 고객 연령대, 이동 동선, 시선, 유통 과정, 홍보 방법 등 다방면에 관심과 노력을 자발적으로 기울인다. 달리 말해, 오른쪽 분면의 상황을 만들 수 없다면, 내가 오른쪽 분면에 놓여 있다고 스스로 가정하는 방법이 있다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자, 이것을 하나의 방정식이라 생각해 보자. 나는 실제로 입대할 때 이 식을 적용했다. 흔히들 군대에 가면 바보가 된다느니, 시간이 아깝다느니 하는 말을 한다. 이런 얘기는 전역 후에도 단골 술자리 안주거리다. 하지만 나는 군대에서 보낸 2년이 인생의 큰 추억이자 기회였다고 자신 있게 말한다. 왜 그럴까? 당시 나는 전역 후 창업을 목표로 삼았다. 마침 군대는 누구에게나 리더십을 기를 기회를 준다. 조직 관리를 위한 잡다한 일도 많다. 보통 이런 일을 귀찮아하거나 싫어하지만, 창업을 위해 리더십이 필요한 나에겐 어떤 의미였을까? 싫은 일이 아닌, 꼭 해야 할 일이 된 것이다.
같은 상황이라도 생각의 차이에 따라 결과는 크게 달라진다. 결국 나는 군 생활을 통해 리더십이 뭔지, 조직 관리가 뭔지, 말썽을 일으키는 부하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등을 직접 경험하며 이해했다. 사회에서 팀장급 이상이 돼야 겪을 수 있는 일들을 군대에서 직간접적으로 경험했다고 생각하면, 이는 분명 인생의 큰 기회였다고 본다.
이 방정식은 비즈니스, 특히 협상 전략에서도 빛을 발한다. 이 부분은 나중에 따로 포스팅으로 자세히 다루겠지만, 간단히 설명하자면 이렇다. 상대가 적은 예산으로 의뢰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럴 때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보통은 거절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눈에 보이는 자본이 '갑'이니까. 자본이 없으면 끝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이 돈'이라고 말하면서도, 정작 그런 상황에 닥치면 사람보다 돈을 선택하는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의 세계는 유형보다 무궁무진하다. 우주에서 눈에 보이는 건 고작 5%라고 하지 않던가? 즉, 유물론적 세계의 계산법칙과 무형 세계의 계산법칙을 교집합 시켜 상계하는 방법이 있다는 말이다.
좀 어려운 말일 수 있어 예를 들어 설명해보겠다. 내가 파는 물건의 값이 10만 원이라고 하자. 그런데 고객이 5만 원밖에 없으면서도, 꼭 사고 싶다고 말한다. 보통 이런 경우에는 거절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앞서 말한 방정식을 적용해보면, 고객과 대화를 통해 무형의 자산이 무엇이 있는지 확인하게 된다. 예를 들어, 고객이 좋은 인맥을 가지고 있거나, 알고 보니 그 고객이 CEO여서 유능한 직원을 소개해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런 상황을 파악했다면, 유형과 무형의 자산을 교환하는 등가 거래(1:1교환)가 가능해진다. 물론, 이런 교환 방식은 전통적인 물질적 거래보다 복잡할 수 있다. 하지만 무형의 자산을 계산하는 법을 알게 되면, 새로운 세상이 펼쳐지게 된다.
지금까지의 내용을 간단히 정리해 보자. 온라인 게임은 가상의 유토피아 공간에서 서로 소통하며 문화를 즐긴다. 등급 차이는 있지만 노력에 따라 누구나 쉽게 올라갈 수 있어, 모두가 이 판타지 세계를 동경한다. 반면 오프라인 세계는 견디기 힘들다. 온라인과 정반대여서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듯한 경험을 하게 된다. 눈치챘는가? 그렇다. 왼쪽 분면과 오른쪽 분면은 오프라인과 온라인 공간과 닮아있다.
하지만 현실은 오프라인 세상이라 쉽게 오른쪽 분면으로 넘어가기 어렵다. 그래서 나는 이를 가상의 게임 공간으로 여기고, 그 생각을 하나의 방정식으로 정의해 현실의 다람쥐 쳇바퀴에 적용해 보자고 제안하는 것이다. 물론 가벼운 설정이 아닌, 간절한 마음으로 구체적인 미래 모습을 그려 현실에 대입해야 한다. 그러면 가상의 상황이 머릿속에 설정되고, 그 상황에 내 몸이 놓이게 되어 관점이 바뀐다. 결국 다른 관점은 다른 시야를 만들고, 우리의 관념을 바꿔 서서히 오프라인의 내 육체를 변화시키게 된다.
이렇게 우리는 현실과 이상, 오프라인과 온라인의 경계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관점 변화다. 단순히 주어진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 상황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고 재해석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타인의 가치를 나의 가치로 귀결시키는' 과정은 단순한 말이 아니라, 우리의 삶과 일에 대한 근본적인 태도 변화를 요구한다. 이는 현재의 위치에 상관없이 모두에게 적용될 수 있는 원리다.
결국, 우리가 처한 상황은 변하지 않더라도, 그 상황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이 바뀌면 전혀 새로운 기회와 가능성이 열릴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진정한 '변화'의 시작점이 아닐까?
[다음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