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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로 Sep 15. 2024

스타트업, 백지에서 시작하는 능력

AI 시대, 백지에서 그리는 능력이 핵심이다


저는 다수의 자격증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OO 년 이상의 경력이 있으며, 다수의 대형 프로젝트 참여 경험이 있습니다.
이러한 다양한 스펙이 있으므로 높은 연봉을 원합니다.



기획팀 구인면접은 마치 다양한 인생 이야기의 전시장 같다. 지원자들은 저마다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가정사부터 역경을 극복한 영웅담, 심지어 상황에 따라 교묘히 변주되는 자기 서사까지. 얼핏 보면 정말 각양각색 같지만, 수십 수백 명의 면접을 거듭하다 보면 흥미로운 패턴이 드러난다. 겉으로는 다양해 보이지만, 그 아래에는 놀랍도록 유사한 스펙과 경험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스타트업 초창기, 내가 인사 업무를 맡았을 때만 해도 이런 패턴을 알아채지 못했다. 나 역시 임원이라는 타이틀을 가진 사회 초년생에 불과했고, 지원자들 못지않게 열정과 패기로 가득 차 있었다. 그들의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읽으면서, 거기 담긴 모든 내용을 진심 그대로 받아들였다.


지원자들의 이야기에 매료되어, 나는 이력서를 검토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각 지원자의 독특한 경험과 역량을 깊이 이해하고자 노력했다. 그리고 고심 끝에 몇 명을 선발하여 합격 통보를 보냈다. 당시 나는 이 과정이 얼마나 주관적이고 감정적일 수 있는지 깨닫지 못했다.


합격한 이들은 설레는 마음으로 첫 출근을 했다. 회사 팀원들도 그들을 기쁜 마음으로 환영했다. 자리를 안내하고, 업무 매뉴얼이 없는 상황에서 구두로 인수인계를 했다. 안내하는 상사의 얼굴을 초롱초롱한 눈으로 바라보던 인턴들은 이내 동경심 어린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뿌듯함을 느꼈다. 이들이 잘 적응하면 좋은 인재로 성장하여 회사 발전의 큰 발판이 될 것이라 생각해서다. 



인수인계 2주 차가 지나자 변화가 감지되기 시작했다. 두 명의 인턴은 웃음이 많아지고, 조심스럽게 의견을 주고받는 분위기로 바뀌어갔다. 식사나 회식을 통해 가까워진 것일까, 무언가가 그들을 점점 더 끈끈하게 만들었다. 이를 보며 나는 업무 효율이 앞으로 크게 향상될 것이라는 기대감에 부풀었다.


그러나 생각과 현실의 차이를 깨닫게 해주는 사건이 발생했다. 10페이지 분량의 서비스 소개서 작성이 그것이었다. 통상 이런 간단한 업무는 설득력이 다소 부족하더라도 어떤 형태로든 결과물이 나오기 마련이다. 그런데 신규 인턴은 일주일 동안 아무런 결과물도 내놓지 못하고 보드판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숲멍~ 바다멍~ 별멍~ 보드멍~


결국 인턴은 구체적인 가이드라인을 나에게 요청했다. A부터 Z까지 문서화된 지침을 달라는 것. 이 말을 듣는 순간 '그럴 거면 왜 직원을 뽑았지?'라는 생각이 스쳤다. 더욱 놀라운 것은 다른 인턴의 반응이었다. "저도 구체적인 가이드라인이 있으면 감사하겠습니다."라는 말에 나는 충격을 받았다. 그렇게 두 명의 인턴은 한 팀이 되어 상사의 양쪽 어깨를 짓누르는 무게가 되었다.


이런 현상은 비단 인턴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대기업에서 오래 근무한 경력자들 역시 비슷한 행태를 보인다. 그룹웨어를 통해 세세한 지침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물론 조직의 효율적 운영을 위해 체계적인 가이드라인이 필요한 경우는 있다. 그러나 이들이 창업을 하거나 소규모 회사에 이직할 때 겪는 어려움은 심각하다. 백지상태에서 새롭게 시작해야 하는 상황에 막막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실제로 많은 경력자들이 이러한 이유로 이직 후 빠른 시일 내에 다시 이전 직장으로 돌아가는 사례가 있다.



개발팀에서도 이러한 현상은 예외가 아니다. 개발자는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요리에 비유하자면, 


첫째는 즉석식품이나 반조리 식품을 활용해 요리하는 셰프이다. 이들은 다른 사람이 만든 라이브러리(미리 만들어진 코드 모음)를 가져와 조립하는 개발자다. 라이브러리는 요리로 치면 다진 마늘, 으깬 고추장, 잘게 썬 채소 같은 것이다. 이미 누군가가 준비해 놓은 재료를 활용하는 셈이다.


둘째는 모든 재료를 직접 손질하고 양념을 만드는 셰프(로우 개발자)이다. 이들은 라이브러리에 의존하지 않고 빈 메모장에 자신만의 프로그램 서사, 즉 핵심 알고리즘을 써 내려간다. 마치 요리 레시피를 처음부터 끝까지 직접 만드는 것과 같다. 


첫 번째 유형은 다시 두 부류로 나뉜다. 즉석식품을 잘 활용해 맛있는 요리를 만드는 셰프와, 즉석식품을 데우는 것조차 못하면서 마치 전체 요리를 직접 한 것처럼 말하는 셰프다. 여담이지만, 음식 주문 시 후자와 같은 셰프는 특히 주의해야 한다.(말로만 떠들기 때문이다.)


진정한 개발자의 기준은 시대에 따라 변해왔다. 2005년경 내가 개발자로 활동할 당시에는 모든 재료를 직접 손질하고 요리하는 셰프, 즉 하드코딩을 하는 개발자를 진정한 개발자로 인정했다. 더 나아가 요리 철학을 논하고 새로운 레시피 개발에 몰두한 셰프를 최고의 요리사로 여겼다. 실제로, OOO소프트에서도 개발자 면접 시 아무런 도구나 라이브러리를 제공하지 않고, 메모장과 같은 단순한 텍스트 에디터에서 프로그램 코딩을 할 수 있는 사람을 우선적으로 선발했다. 이는 백지상태에서 문제를 해결하고 창의적으로 코딩할 수 있는 능력을 더욱 중요시하기 때문이다.


세월이 흘러 주방 기구가 발달하고, 다양한 즉석식품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요리의 기본 원리보다는 플레이팅에 집중하는 셰프들이 많아진 것이다. 2020년대에는 고객 수요는 늘어나는 반면 공급은 부족해져 개발자들의 몸값이 역대 최고로 치솟았다. 실제로 국내 IT 업계에서는 개발자 연봉이 매년 상승하고 있으며, 구인난이 심화되고 있다.


문제는 여기서 시작된다. 기본적인 재료 손질부터 요리까지 할 수 있는 셰프, 즉 기초부터 코딩할 수 있는 개발자가 거의 없다는 것. 편리한 도구와 라이브러리가 넘쳐나는데 굳이 고생하며 모든 과정을 직접 할 필요가 없다고 여기는 것이다. 이러한 환경에서 학습된 공대 졸업생들이 사회로 쏟아져 나오고 있다.


회사는 이들을 고용한 후 곧 이상함을 감지한다. 면접에서 나눈 대화와 실제 현장에서 요구되는 수준 사이의 간극이 크기 때문이다. 인턴 개발자에게 새로운 코드를 만들어 달라고 하면, 앞서 언급한 기획팀 인턴과 동일한 반응을 보인다. 백지상태에서의 코딩은 해본 적이 없어 선택지가 주어져야 한다는 것. 이런 모습은 어디서 본 듯하지 않은가? 그렇다. 바로 고등학교 수능 시험의 5지선다형 문제와 같다. (이는 우리나라 교육 시스템부터 변화가 필요함을 시사한다.)


개발팀은 직업 특성상 기획팀보다 더 구체적인 가이드라인을 요구하는 경향이 있다. 그만큼 가이드라인에 의존적이다. 달리 말하면, 비즈니스 설계와 목적, 방향성은 윗선에서 정하는 문제라고 여기며 관심을 두지 않는다. 대신 주어진 범위 내에서 오로지 완성품 제작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


이들의 사고 프레임을 컴퓨터 폴더에 비유해 보자. '제작'이라는 폴더를 만들고, 그 안에 '가이드라인'이라는 하위 폴더를 생성한다. 그리고 이 폴더의 범위를 자신의 놀이터라 여기며 일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이러한 환경은 능동적 태도를 수동적으로 변화시킨다. 정해진 틀, 즉 프레임이 개발자를 수동적 존재로 만드는 것이다.


수동적 프레임은 우리의 뇌를 도전과 모험이라는 불확실성을 회피하는 방향으로 유도한다. 뇌는 의존안정이라는 키워드를 선택함으로써 이러한 불확실성을 제거하려 한다. 이런 기질이 강화되면 업무에도 영향을 미치는데, 그 결과가 바로 '남이 만들어 놓은 것을 빌려 쓰는' 행위다. 물론 라이브러리와 같은 도구들은 활용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니, 그 사용 자체를 부정적으로 볼 순 없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수동과 의존이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한 '빌려 쓰는 행위'의 본질이다. 이는 능동성과 적극성과는 거리가 멀 수 있으며, 결과적으로 백지상태에서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능력을 퇴화시킬 위험이 있다. 다만, 빌려 쓰는 행위가 무조건 수동성으로 이어진다고 단정 짓기는 어렵다. 이러한 도구들을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것 또한 응용의 범주에 속하며, 이를 통해 능동성을 기를 수도 있어서다. 하지만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이러한 프레임이 우리의 사고와 창의성의 폭을 지나치게 제한할 수 있다는 점에 있다.


마트에서 밀키트를 사서 간단히 요리하는 것과 직접 재료를 사서 요리하는 것은 분명 다르다. 밀키트만 오래 사용하다 보면 직접 요리하는 능력이 퇴화하기 쉽다. 물론 두 방식 모두 '맛있게 먹는다'는 목적은 같다. 그러나 영양, 정성, 고민, 요리하는 사람의 손맛 등 과정에 가치를 둔다면, 이 둘은 엄연히 다를 수밖에 없다. 결국, 수동적 프레임에서 벗어나 능동적이고 창의적인 사고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는 단순히 주어진 것을 수행하는 것을 넘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핵심 역량이 될 것이다.



지금까지 기획팀과 개발팀의 상황을 설명했지만, 이는 비단 두 팀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디자인팀 역시 같은 패턴을 보인다. 디자인 템플릿이라는 개념이 생소하던 시절, 웹디자이너들은 각자의 작업 스타일에 따라 이미지를 수집하거나 직접 만든 것을 CD에 담아 다녔다. 나 역시 포토샵 PSD, 일러스트, 사진 이미지를 CD에 저장해 휴대했다. 이 분야에서도 세 부류의 디자이너로 나뉜다. 창의적 작업이 가능한 디자이너, 기존 요소를 잘 조합하는 디자이너, 그리고 안정적인 급여와 '디자이너'라는 직함의 매력 때문에 그저 다니는 디자이너다.


한때 웹디자이너라는 직업은 그 위상이 하늘을 찌를 듯했다. Dot 디자인, 일러스트 디자인, 플래시 디자인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이 분야 역시 자세히 들여다보면 문제점이 적지 않다. 디자인은 계산력이나 기획 능력과는 별개로, 타고난 재능이 필요하다. 바로 색감이다. 물론 연습을 통해 어느 정도 향상될 수는 있지만, 타고난 감각이 디자인 역량을 크게 좌우한다는 점은 대부분이 동감할 것이다. 색감이 부족한 디자이너들은 다른 능력을 키워 경쟁력을 확보하려 한다. 그중 하나가 HTML과 CSS를 다루는 능력이다. 이로 인해 '웹퍼블리셔'라는 새로운 직군이 탄생했다. 이들은 웹디자이너와 개발자 사이에서 웹코더로서 역할을 하며, 기획팀과 조율하는 역할을 맡았다. 특히 스타트업에서는 다재다능한 만능 엔터테이너로 활약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망고보드, 캔바, 미리캔버스, 피그마와 같은 강력한 제작 플랫폼이 등장한다. 이로 인해 웹디자이너와 웹퍼블리셔의 입지는 더욱 좁아졌고, 결국 순수 창작 능력을 가진 디자이너 혹은 변화된 직군에서 적응한 디자이너만 그 명맥을 이어가게 된다.


이러한 변화는 한 가지 사실을 명확히 보여준다. 백지상태에서 창작할 수 있는 순수 창작자만이 생존할 수 있다는 것. 실제로 AI의 등장으로 모든 분야가 급변하고 있지만, AI 역시 한계는 있다. 인간의 창작 의도와 명확한 가이드라인 없이는 제대로 된 결과물을 만들어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는 결국 백지상태에서 그릴 수 있는 능력과 역량을 갖춰야만 AI 시대에도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셈이다.



기획자, 개발자, 디자이너를 살펴보면 한 가지 공통점이 드러난다. 가이드라인의 필요성과 동시에, 더 큰 성장을 위해서는 그 틀을 깨는 사고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즉, 가이드라인을 스스로 만들 수 있는 능력과 시야가 요구된다. 이는 수동적 태도에서 능동적 태도로의 전환을 의미하며, 이전 챕터에서 언급한 '피라미드 위의 피라미드'를 목표로 하라는 조언과 일맥상통한다.


그렇다고 해서 가이드라인 설계 담당팀이나 상급자와 대립하라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설계 담당자와의 대화 후, "그들은 어떻게 설계할까?"라는 호기심을 가지고 스스로 구상해 보는 연습을 권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다양한 경우의 수를 고려하고 예측하게되면, 궁극적으로는 자신만의 시나리오를 만들어낼 수 있는 구성 능력이 강화된다. 이는 새로운 능력과 역량을 키우는 토대가 된다. (내 업무가 아니라고 배제하지 말아 달라는 호소이다.)


백지상태에서 그리는 능력은 '피라미드 위의 피라미드'를 목표로 나아가는 핵심이다. 이는 자신의 분야에 대한 기본 역량을 강화하는 동시에, 보다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사고를 가능케 한다. 사회생활에서 핵심 역량은 리더십을 기르는 것이다. 지금 말단 직원이라 해도, 그 자리에 영원히 머물 수는 없다. 실제로 국내 기업들은 승진과 역할 변화를 통해 직원들의 성장을 도모하고 있다. 시간이 흐를수록 우리는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즉, 리더십 역량은 선택이 아닌 필수라는 것이다.


'백지상태에서 그리는 능력'은 바로 이 리더십의 핵심이다. 그렇다면 이 능력을 어떻게 기를 수 있을까? 거창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기획자라면 화이트보드에 자신의 생각을 도식화하며 정리하는 것에서 시작할 수 있다. 개발자는 자동화 도구에 의존하지 않고 기본 원리를 이해하며 직접 코드를 작성해 보는 것이다. 디자이너는 고객과 마케팅의 관점을 고려해서 디자인을 연구하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시도해 볼 수 있다. 또한 평소에 생각을 연필로 그리며 정리하는 습관을 들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아날로그의 힘은 지금도, 앞으로도 매우 중요하다.)


결국, '백지상태에서 그리는 능력'은 자신의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하고 리더로 성장하기 위한 필수 요소다. 우리 모두가 이 능력을 발전시킬 때, 비로소 진정한 성장과 혁신이 가능해질 것이라 믿는다.




[다음 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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