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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MMER GARDEN Nov 04. 2023

시선의 방향 1_⟨오펜하이머⟩와 ⟨난징! 난징!⟩

영화 에세이 (Film Essay)






※ Spoiler Alert ※

영화를 보지 않은 분들도 재밌게 읽을 수 있도록 장면 묘사가 많이 등장합니다.
스포일러를 원하지 않는 분들의 주의를 요합니다.





     취향입니다, 존중해 주시죠.

     당신은 어떤 영화를 좋아하는가? 흔한 질문이지만 대답은 사람마다 천차만별이다. 누군가는 스릴 있고 짜릿한 활극을 선호하고, 누군가는 인물의 감정선을 섬세하고 풍부하게 그린 드라마를 선호한다. 새로운 기술과 영리한 연출을 선호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뒤에 있는 이야기의 골조와 의미에 집중하는 사람도 있다. 취향에는 개인의 특성이 반영된다. 그래서 취향을 묻는 말은 흔하지만, 매번 흥미롭다.

     그렇다면 좋은 영화란 무엇일까? 앞서 말한 요소를 모두 갖추면 좋은 영화가 되는 걸까? 좋은 영화가 갖춰야 하는 절대적인 기준이 존재하는가? 많은 사람이 관람한 영화면 좋은 영화라고 정의해도 무방한 걸까?


최근에 뽑은 포토 카드들. 귀여운 6공 바인더에 보관한다.



좋다
형용사


1. 대상의 성질이나 내용 따위가 보통 이상의 수준이어서 만족할 만하다.

Ⅱ. 「…이」
1. 어떤 일이나 대상이 마음에 들 만큼 흡족하다.
2. 감정 따위가 기쁘고 만족스럽다.

Ⅴ. 「…보다」
1. 어떤 것이 다른 것보다 질이나 수준 따위가 더 높거나 가치가 있다.


- 출처: 표준국어대사전



     ‘좋다’에는 많은 사전적 정의가 있지만, 방금 기술한 내용 정도가 앞선 질문에 적용하기 적합해 보인다. 해당 정의를 바탕으로 보면 ‘좋은 영화’라고 하는 건 크게 두 가지를 만족시켜야 한다. ①그 성질이나 내용이 보통 이상의 수준을 갖출 것. ②관객에게 기쁘거나 만족스럽거나 흡족한 감정을 제공할 것. 


     대부분의 경우 ①이 충족되면 ②라는 결과가 따라온다. ①에서 말하는 ‘보통 이상’이라는 판단에 대해 우리는 어느 정도 공통된 기준을 도출할 수 있다. 3막 구조, 카메라 촬영 법칙, 삼점 조명, 장르성, 연기력 같은 수많은 척도를 두고, 한 작품이 그것들을 얼마나 훌륭하게 수행해 내고 또 변주했는가를 논의하는 과정은 까다롭지만 불가능하진 않다. 선호도를 제외하고 작품의 우수한 부분에 대해서만 논할 때 사람들이 탐탁지 않아 하면서도 납득하는 것을 여러 차례 보곤 했다.


     그러나 문제는 ②의 존재다. 만족스러운 감정이라는 게 꼭 ‘보통 이상’의 퀄리티에서만 발생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취향이 ①을 묵살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무리 대중이나 평론가가 찬사를 보내는 작품이어도 어떤 이에게는 좀처럼 감흥이 없을 수 있다. 반면 부족한 퀄리티의 영화라고 할 지라도 개인의 마음에 별안간 반짝이는 순간을 만들어 낸다면, 그는 그 작품의 영원한 팬이자 변호인을 자처할지도 모른다. 다른 예술과 매한가지로, 아니 어쩌면 세상만사가 다 그러하듯이, 영화 역시 지독한 개인의 영역인 것이다. 그래서 결국 질문은 다시 ‘당신은 어떤 영화를 좋아하는가?’로 돌아간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당신은 어떤 영화를 ‘왜’ 좋아하는가?








     ⟨오펜하이머⟩와 ⟨난징! 난징!⟩

     당신은 ‘왜’ ‘그 이야기’를 ‘영화의 형태’로 하고자 했는가? 나는 이 질문에 각자의 방식으로 납득할 만한 답변을 주는 작품을 좋아한다. 이 질문을 좀 더 풀어서 말하면 다음과 같다. 이야기의 목적에 적합한 서사 구조와 연출 방식을 선택했는가? 그 결과 영화가 하나의 유기체를 이루었는가? 유기체에서 창작자의 독창성 혹은 아이덴티티를 발견할 수 있는가? 다른 매체가 아닌 반드시 영화여야만 하는 이유가 드러나는가? 작품이 가지는 발언은 현시대에 얼마나 유효한가? 세상에는, 전체적으로든 부분적으로든, 이 질문들에 놀라운 답을 내어놓는 작품이 수두룩하다. 새로운 인식을 창출해 내는 대체 불가능한 작품은 공고해 보이던 취향의 허들을 간단히 뛰어넘기도 한다.


사실 이 포스터보다 헤드룸이 많이 비어 있는 흑백의 아트 포스터를 더 좋아한다.


     나에게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적어도 독창성과 아이덴티티에서 그 나름의 독자적인 답변을 가진 감독 중 한 명이다. 하지만 최근 작품 ⟨오펜하이머⟩(2023, 크리스토퍼 놀란)를 보고 난 뒤에는 어떤 즐거움이나 놀라움 혹은 반가움 없이 찝찝함만이 남았다. 찝찝함의 원인을 문장으로 명확히 정리하기 전에 곧바로 한 영화가 떠올랐다. 바로 루 추안 감독의 ⟨난징! 난징!⟩(2009)이다. 



국내에서 정식 개봉하지 않았다. 왓챠에서 서비스 제공 중.


     ⟨난징! 난징!⟩은 1937년 중일전쟁 당시 난징을 점령한 일본군이 6주간 약 30만 명의 중국군 포로와 난징 시민을 무차별 학살한 ‘난징 대학살’을 다룬 영화이다. ⟨오펜하이머⟩와 시기적인 유사점이 있고, 전쟁을 소재로 하긴 했지만, 또 흑백이라는 표현 방법을 선택했지만, 이런 표면적이고 러프한 공통점은 작품에 대해 아무것도 말해주지 못한다. 심지어 자세히 들여다보면 공통점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은 공통점이 아니라는 것도 알 수 있다. 각 작품의 특성을 결정하는 건 차이점이다. 타인과 부딪힐 때 나의 특성이 더 뚜렷하게 보이는 것처럼, 영화 역시 비교할 때 각자의 특성이 더 선명하게 보이는 법이다.


     그렇다면 두 감독은 어떤 이유로 난징 대학살과 맨해튼 프로젝트를 오늘날 사람들 앞에 가지고 나온 걸까? ⟨난징! 난징!⟩에는 있지만, 〈오펜하이머〉에는 부재하는 요소란 도대체 무엇일까?







To be continued →


* 이미지 출처: 네어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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