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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MMER GARDEN Oct 31. 2023

시작하며(2/3)_슈슈에 대하여

영화 에세이 (Film Essay)





    슈슈에 대하여

     스물일곱의 나는 십 년 전 빨강을 만났을 때보다 내 마음의 소리를 듣는 데 훨씬 능숙해져 있었다. 이해할 수 없는 일들에 아파하는 시간이 지나고 나자 왜? 라는 질문이 더 선명해졌기 때문이다. 문제의 원인을 찾기 위해 매사를 복기하는 습관이 생겼다. 원래도 자잘한 기억력이 좋은 편이었다. 거기에 지나치게 많은 생각, 집요한 성격, 예민한 감각과 기질, 더 나은 선택에 대한 갈망 따위가 합쳐지자, 세상은 엄청나게 많은 정보를 내게 토해내기 시작했다. 그동안 도대체 뭘 보고 살아온 걸까 알 수 없을 정도로 나의 세상은 하루하루 빠르게 바뀌었다. 슈슈를 만난 것도 그 무렵이었다.


     나르시시스트인 것 같아. 슈슈와 두어 번 데이트를 한 후 내린 나의 단평이었다. 게다가 그 사람의 공허함은 나의 공허함과 주파수가 같았다. 불건강한 공명에 끌려서 시작하는 관계는 결과가 나쁘기 마련이다. 여러모로 위험한 사람이라는 걸 알았지만 자꾸 호기심이 동했다. 이 죽일 놈의 호기심. 나는 이 녀석을 죽이지 못해서 언젠가 이놈 손에 죽고 말 것이다. 사람에게 쉽게 흥미가 떨어지는 타입이라 우선 기다려 보기로 했다. 보통은 첫 데이트에서 모든 흥미가 바닥났다. 아무리 길어도 세 번을 넘기는 경우는 없었다. 세헤라자데를 만나지 않고서야 내가 연애를 시작하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니 누가 알았겠는가. 낯설면서 익숙한 이방인 나르시시스트와 천일야화를 찍을 줄. 비슷한 취미와 감각, 언어 체계 덕에 그와의 대화는 매번 아우토반을 달리는 것 같았다. ⟨아비정전⟩을 사랑하는 남자와 연애를 하고 싶진 않았건만... 아무렴 인생은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 법이다. ⟨화양연화⟩를 사랑하는 여자와 연애할 계획은 슈슈에게도 없었을 테니.



    그는 항상 왜냐고 물었다. 무표정한 얼굴에 시니컬한 말투로 딱 한 마디, 한 글자, 왜. 처음에는 뭔가 못마땅한가 했는데, 질문 그대로 들으면 된다는 걸 이내 깨달았다. 슈슈의 질문은 관심의 표현이었다. 나 역시 그에게 왜냐고 묻는 일에 익숙해졌다. 그가 나에게 쏟는 에너지와 내어주는 곁이 고마웠다. 둘 다 에너지가 높고 강한 편이라 비등한 힘으로 상대해 주는 사람을 만나는 게 처음이었다. 우리는 매일 지쳐서 나가떨어질 때까지 떠들었다. 대화하다 보면 그동안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사유의 영역에 아무렇지도 않게 훌쩍 다다르곤 했다. 기적 같은 날들이었다. 슈슈의 존재와 그때의 대화들 덕분에 나의 세상은 말도 안 되는 속도로 팽창했다.

     서로에 대한 대화를 매일매일 나누면서 나는 거의 슈슈의 대변인이자 변호인이 되었다. 슈슈는 특별한 사건 없이 못되게 굴 때가 잦았는데, 그가 왜 그러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면 화가 나지 않았다. 슈슈가 짜증을 내는 순간은 그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 수 있는 순간이기도 했다. 이해가 되면 화가 나지 않는다. 그건 상대의 행동이 옳다 그르다 좋다 나쁘다는 가치 판단을 떠난 영역이다. 그 사실을 깨달은 후 슈슈에 대한 나의 분냄은 15분을 넘긴 적이 없다. 이제 막 끓기 시작하려는 냄비의 불을 끄면 순식간에 표면이 잔잔해지는 것처럼 그렇게, 그냥, 괜찮아졌다. 다음에 비슷한 상황이 오면 어떻게 대처할지 차분하게 고민할 수 있었다.


     이해의 창이 열리면 사랑이 흘러들어온다. 사랑은 상대를 가슴 깊이 이해하는 일과 다름없다는 걸 슈슈를 만나면서 배웠다. 고맙게도 한때 그가 허락해 준 곁이 있어서 가능했다. 덕분에 타인의 존재를 향해 전력으로 부딪혀 볼 수 있었다. 그래서 슈슈와의 관계를 정리한 다음에도, 내가 사랑한 그의 면면들이 사라진 게 자명해 보이는 오늘에도, 그 나날들의 고마움과 이해의 자리는 고스란히 남아있다. 살면서 영혼으로 만난 게 그 사람 하나뿐이라, 만약 나의 “좋아”라는 말이 형체를 가진다면 그건 분명 슈슈의 모습일 것이다. 




To be continued →


*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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