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UMMER GARDEN Oct 31. 2023

시작하며(1/3)_빨강에 대하여

영화 에세이 (Film Essay)




아무것도 모르는 자는 아무것도 사랑하지 못한다.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자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다.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자는 무가치하다.
그러나 이해하는 자는 또한 사랑하고 주목하고 파악한다……
한 사람에 대한 고유한 지식이 많으면 많을수록
사랑은 더욱더 위대하다……
모든 열매가 딸기와 동시에 익는다고 상상하는 자는
포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 파라켈수스






    왜 날 좋아하는데?

     어릴 적부터 내 이상형은 줄곧 나와 닮은 사람이었다.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 책에서 구원을 찾는 사람. 자연의 질서를 존중하는 사람. 세상에는 더 많은 다정함이 필요하다고 믿는 사람. 모르는 것보다 배우지 않음을 부끄러워하는 사람. 근사한 미소와 형형한 눈을 가진 사람. 자유를 포기하는 일에 죽음이 숨어 있다고 여기는 사람. 한마디로, 내가 사랑하는 것의 가치를 이미 자신만의 방식으로 깨달아 지키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나의 이상형이다.

     이런 이상형 기준은 나와 비슷한 가치관을 가진 사람이 나를 더 정확하게 이해하고 수용할 거라는 판단에서 비롯한다. 나의 모습 그대로를 알아차리고 사랑해 주길 바라는 마음과 닿아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과연 가능한 일인가? 나와 가까웠던, 그러나 지금은 사라진 이들을 떠올려 본다. 나는 너를 얼마나 알았던가? 너는 나를 얼마나 알았던가? 우리가 ‘안다’고 생각했던 순간들이 결국 우리의 뒤통수를 치지 않았던가? 내가 사랑한 건 정말 너였을까? 혹은 너의 부분에 불과했을까? 그 부분은 전체의 얼마쯤 될까? 핵심에 가까웠을까? 사실 모든 건 오해와 오독이지 않을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은 우주를 머릿속에 가져온다. 펑. 대폭발. 세상에, 우리가 진짜 만나긴 했던 걸까!

     이 모든 혼돈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타인을 알고 사랑해야 하는 걸까? 도대체 왜?






    빨강에 대하여

     본가에서 차로 다섯 시간 삼십 분쯤 떨어진 곳에 있는 고등학교에 다녔다. 그곳은 집에서 자유로워진 아이들의 방종으로 가득 차 있었고, 약 반년 동안 나의 유토피아가 되어줬다. 그 유토피아에서 처음 빨강을 만났다.

     빨강은 하얀 피부에 적당한 살집을 가진 여자애였다. 부드럽게 아래를 향하는 눈매의 정반대 방향으로 두꺼운 아이라인을 그리곤 했는데, 예나 지금이나 화장에 무지한 나로서는 빨강이 화장하는 모습을 보는 게 무척 신기하고 즐거웠다. 빨강은 옷에도 관심이 많았다. 액세서리나 소품을 모으는 것도 좋아했다. 그림도 곧잘 그렸고, 자기 취향인 만화책이나 앨범도 종종 소개해 줬다. 일 년 내내 눈이 내리는 마을의 포근한 동굴에 사는 눈토끼와 친구가 된 기분이었다.

     자주 빨강의 동굴을 방문했다. 빨강과 나의 유대감은 영문을 모른 채 깊어져서 그 애 남자친구의 질투를 사기도 했다. 알 바냐. 그게 내 마음이었다. 수업이 끝나면 익숙하게 빨강의 자취방으로 하교했다. 밤새 떠들다가 해가 뜰 때 잠들어 수업을 빼먹는 일도 허다했다. 학교를 자퇴한 뒤에도 이따금 그곳을 찾아갔다. 빨강의 동굴은 언제나 어질러진 옷더미로 꾸며져 있었다. 그 틈바구니에 누워 학교에 간 집주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다가 까무룩 잠들면 그리움과 편안함이 땅거미처럼 내려앉았다.


     하루는 빨강의 엄마와 마주쳤다. 얼핏 봐도 자유롭고 개성이 강한 분이었다. 빨강의 엄마는 정중한 말씨에 꾸밀 줄 모르는 수더분한 범생이 같은 내가 자기 딸과 친한 걸 의아해하셨다. 얘랑 있어봤자 별로 도움 될 게 없을 텐데? 차가운 눈을 갸웃거리며 빨강의 엄마가 물었다. 아니 묻지 않았다. 그렇게 말하고 곧바로 고개를 돌려 다른 이야기를 하셨으니까. 그래 계속 친하게 지내라, 하고 학부모님 같은 말씀도 하셨는데, ‘어디 한 번 지켜보겠다’는 냉소처럼 들려서 어색하게 웃고 말았다.

     빨강의 엄마가 떠난 후에 나는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가늠하려고 노력하지만 쉽지 않은 사람처럼 꼼짝없이 앉아 눈만 끔뻑거렸다. 빨강은 짐짓 경쾌하다는 듯 떠들고 움직였다. 미간에 힘이 들어갔다. “뭔가 도움을 바라고 너랑 있는 거 아니야.” “그건 이상한 말인 거 같아.” 괜히 찬장을 뒤적이던 빨강이 터덜터덜 걸어와 내 옆에 나란히 앉았다. “우리 엄마가 그런 사람인 거지.” 그 애가 한숨처럼 웃어서 나는 그만 울고 싶어졌다.


     빨강과 있었던 이유를 그 순간에 소상히 말해주었다면 참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는 몰랐다. 열일곱의 나는 누군가를 ‘그냥’ 좋아하는 일에 의심을 품는 사람이 아니었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같은 질문은 하지 않았다. 그저 ‘내가 너일 수 없고, 너는 나일 수 없다’는 자명한 사실에 밤낮없이 아파하기 바빴다. 그건 마치 ‘나는 너를 사랑할 수 없고, 너도 나를 사랑할 수 없다’는 선고 같았다. 각자의 자리에서 무력하게 외로울 수밖에 없다는 절망적 공표 같기도 했다. 하지만 빨강은 왜 우리가 서로를 아끼는지 알았던 것 같다. 질투에 빠진 자신의 못난 옛 남자친구와 나를 비교하면서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걔는 동인(同人)이 아니야. 겨우 몇 부분이 비슷한 걸로는 동인이라고 할 수 없어. 너 정도는 되어야 동인인 거지.” 내가 사랑한 친구는 그렇게 일찍이 똑똑했다. 외로울 수밖에 없도록.





To be continued →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