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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MMER GARDEN Dec 02. 2023

시선의 방향 9_⟨오펜하이머⟩와 ⟨난징! 난징!⟩

영화 에세이 (Film Essay)



이전 글과 이어집니다.


※ Spoiler Alert ※

영화를 보지 않은 분들도 재밌게 읽을 수 있도록 장면 묘사가 많이 등장합니다.
스포일러를 원하지 않는 분들의 주의를 요합니다.






     이웃은 어디에나 있다

     ⟨난징! 난징!⟩에 등장하는 수많은 얼굴에는 당연히 일본 병사들도 포함된다. 누군가가 언제 허물어질지 모르는 벽에 연도를 기록한다. 누군가는 죽은 병사 옆을 떠나지 못한 채 망연자실해 앉아있다. 다른 누군가는 살아남은 병사를 끌어안고 얼굴 가득 웃음이 만연하다. 누군가가 먹고 싶은 음식을 읊고, 누군가는 춤을 추고 노래하고, 또 누군가는 놀이를 즐기고 장난을 치며 전쟁통을 보낸다. 같은 상황 같은 진영 안에서도 개인 내리는 선택과 반응은 저마다 다르다. 한 개인은 그 사람만의 고유성을 갖는다. ⟨난징! 난징!⟩이 지속해서 보여주는 각각의 고유성은 그들끼리 공통 분모를 가지기도 하고 충돌하기도 한다. 덕분에 인물 한 명 한 명 이름이 영화에 등장하지 않더라도 관객은 그들에게 고유한 이름과 삶이 있다는 사실, 즉 그들이 나와 같은 인간이라는 사실을 선명하게 인식한다. 공포는 여기서 시작된다.

     


     일본 병사들이 조직적으로 범죄를 저지르고 열을 맞춰 이동하는 것을 볼 때 느끼는 아득한 공포는 그들이 나와 그리고 나의 상냥한 이웃과 닮았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사람들은 믿을 수 없는 끔찍한 범죄를 볼 때 그 범죄자가 자신과 매우 다른 무언가라고 믿고 싶어 한다. 인간의 탈을 쓴 괴물이라고 치부하려 한다. 그러나 그들이 흉악한 범죄를 저지를 수 있었던 이유는 같은 사람으로서 무엇이 끔찍한 일인지 잘 알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 현실이 우리를 반복적으로 경악하게 만든다. 이것은 인간 존재의 통렬한 비극 중 하나이자, 개인이 매 순간 당면하는 문제를 상기시킨다. 인간다운 인간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문제 말이다.





     이는 ⟨오펜하이머⟩가 끝내 제시하는 데에 실패한 질문이기도 하다. ⟨오펜하이머⟩에는 온전히 이해받을 수 있는 개인이 부재한다. 오피는 이해의 지점을 박탈당한 채 순교자로 포장되었고, 스트로스는 이야기를 위한 도구로 전락했다. 오피와 함께 일한 수많은 과학자와 정계(政界)에 있었던 자들은 또 어떤가. 관객은 영화를 통해 그들을 얼마나 알 수 있는가? 그들 중 한 사람이라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가? 바로 이런 문제 때문에 영화가 외치는 오피의 혼란과 괴로움은 힘없이 허공으로 흩어진다. 


     한 인물의 생애를 다룬 영화라고 해서 그 이웃의 생(生)을 다룰 수 없는 건 아니다. 오히려 좋은 전기 영화일수록 주인공과 그의 주변 사람이 갖는 무게가 동등해진다. 생각해 보라. 세계 안에서 당신과 내가 갖는 무게가 정말 그렇게 다르다면, 내가 어떻게 당신의 고통에 동참할 수 있겠는가. 존재의 무게를 동등하게 만들기 위해 영화에 동등한 비율로 등장할 필요는 없다. 다시 말해, 한 인물이 스크린에 몇 분이나 등장하는지는 그 인물에 대한 이해의 깊이와 무관하다. 찰나의 몸짓, 표정, 혹은 말 한마디가 한 사람에 대한 이해를 깊어지게 만드는 일을 우리는 일상에서도 충분히 경험한다. 그러니 찰나를 선택적으로 이어 붙여 탄생하는 영화가 타인에 대한 이해의 영역을 만들어내지 못한다는 건 태만이다.





     이따금 완전히 다른 ⟨오펜하이머⟩를 상상하곤 한다. 만약 정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오피의 순진함이 더 적나라하게 조명되었다면 어땠을까. 그 순진함은 원자폭탄이 전쟁을 완전히 끝낼 수 있을 거라는 순진함과 맥을 같이할 것이다. 당시 정계에서 오피에게 힘이 되어주고자 했던 인물은 아예 없었을까? 원자 폭탄 개발과 사용에 반대하는 운동가나 과학자의 비중을 늘렸다면? 원자 폭탄이 사용된 다음 후회와 자괴감에 빠진 과학자는 더 없었을까? 정치에 환멸을 느낀 과학자는? 혹은 정치를 이해한 과학자는? 아니면 아예 영화의 시간대 중 한 가닥이 2023년 현재였다면 어땠을까? 피폭 생존자의 자손이 미국으로 넘어와 오펜하이머의 일대기를 되짚어보는 방식이었다면? 오피의 이야기가 다룰 수 있는 개인의 영역이 무한히 다채로워서 더 안타까운 영화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안타까운 건 주인공 오피가 갖는 무력함이다.









To be continued →


* 주인공의 마지막 선택과 남아 있는 세계에 대한 글까지 쓰면 영화 세부 내용을 다루는 건 끝나지 않을까 싶어요 :)

*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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