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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MMER GARDEN Nov 25. 2023

시선의 방향 7_⟨오펜하이머⟩와 ⟨난징! 난징!⟩

영화 에세이 (Film Essay)




이전 글과 이어집니다.


※ Spoiler Alert ※

영화를 보지 않은 분들도 재밌게 읽을 수 있도록 장면 묘사가 많이 등장합니다.
스포일러를 원하지 않는 분들의 주의를 요합니다.






    적(敵)의 초상화

     영화 ⟨난징! 난징!⟩은 여러 인물의 초상화를 통해 전쟁이라는 하나의 풍경화를 그려낸다. 그야말로 이상적이고 정석적인 작업이다. 초상화를 그리는 방식 또한 인상적인데, 각 캐릭터의 초상(肖像)은 이야기 안에서 다른 인물과 조우함으로써 결정된다. 한 존재가 다른 한 존재와 맞닥뜨릴 때 비로소 붓질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래서 ⟨난징! 난징!⟩의 주요 캐릭터들은 누구 하나 초상이 고정되어 있지 않다. 인물이 마침내 고정된 초상을 가지는 건 러닝타임 혹은 삶이 다했기 때문이다. 만약 그들의 시간이 어딘가에서 계속 흐른다면, 그들의 초상은 언젠가 관객이 알아차리기 어려울 만큼 변할지도 모른다. ⟨난징! 난징!⟩의 인물들은 계속해서 유의미하게 변화한다. 이는 그들이 실제 사람, 즉 관객과 동일한 시스템을 가졌음을 의미한다. 유사한 작동 로직이 영화의 허구성을 잊고 극에 더 몰입하게 돕는다.

     주인공 카도카와의 직속상관이자 악역을 담당하는 ‘이다’의 초상 역시 같은 방식으로 그려진다. 그는 전쟁이라는 상황에 죄의식을 느끼며 괴로워하는 카도카와와 대조적으로 앞장서서 범죄를 저지르는 인물이다. 그런 이다라는 캐릭터가 돌이킬 수 없게 입체적으로 변하는 순간은 그가 이용하고 괴롭히던 당천상이라는 중국인을 통해 이루어진다. 



당천상과 욘 라베



     당천상은 독일에서 온 사업가 욘 라베의 비서다. 욘 라베는 나치라는 명분을 앞세워 일본군이 점령한 난징에 안전지대를 세우고 민간인을 보호하고자 한다. 당천상과 그의 가족 역시 안전지대에서 생활하고 있다. 

     마작을 하고, 아이들에게 노래를 가르치고, 이번 달 봉급은 얼마인지 묻던 그들의 생활은 일본군이 안전지대에 들어와 어린 학생들을 강간하면서 끝이 난다. 생존을 위해 서투르게나마 일본어를 배웠던 당천상은 연신 ‘도모다치(친구)’라는 단어를 반복하며 안전지대에 들어온 이다를 뜯어말린다. 이다는 그런 당천상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돌아간다. 그가 이다의 관심을 끌고 만 것이다.



     결국 얼마 뒤 일본군은 난징의 아이들을 꾀어내어 백주대낮에 안전 지구를 무력으로 진압하고 난징의 여성들을 강간한다. 설상가상으로 욘 라베는 독일 정부에서 이른 시일 내에 독일로 돌아올 것을 강권 받는다. 그가 난징의 난민들을 돕는 것이 독일과 일본의 우호 관계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는 이유였다. 기댈 곳이 사라진 당천상은 스스로 일본군을 찾아가기에 이른다.

     일본 군영(軍營)에 가기 위해 폐허가 된 도시를 걷는 당천상의 모습이 멀리서 롱샷으로 잡힌다. 화면 앞쪽에서 나타난 일본군 몇 명이 열을 맞춰 당천상 쪽으로 걸어간다. 당천상은 두 손을 모으고 깊이 허리 숙여 그들에게 인사한다. 일본군이 모두 지나갈 때까지 허리는 펴지지 않는다. 길에는 일본군이 죽였을 동포들의 시신이 여기저기 널려있다. 다시 몇 발짝 걸었을까, 이번엔 일본군 두 명이 뒤에서 자전거를 타고 휘파람을 불며 다가온다. 당천상은 다시 한번 허리를 숙인 채 멀찍이 떨어져 길을 틔운다. 걷는 내내 그의 머리가 들리지 않는다. 






     겨우 일본 군영에 도착하면, 한 장군이 안전지대에 있는 난민을 쫓아내고 위안소를 속히 설치할 것을 명령하고 있다. 이를 알아들을 리 없는 당천상은 방금 자신이 들어온 문 쪽을 흘끗 뒤돌아본다. 마치 ‘지금이라도 돌아가야 하지 않는가’ 하는 표정이다. 그때 장군 옆에 선 이다가 당천상에게 미소를 지으며 슬쩍 손을 흔들어 아는 체를 한다. 도망치기엔 늦었다. 그는 안전지대에 숨은 부상병들을 넘기는 대신 자신과 가족들의 안전을 보장한다는 서류에 서명한다. 이다는 이제 진짜 친구(도모다치)라며 당천상을 안심시키고, 당천상은 자신을 둘러싼 일본군에게 박수갈채를 받는다. 화면 가장 가까이 있는, 중국어와 일본어를 모두 구사하는 일본인 통역관만이 굳은 표정으로 애써 손뼉을 치고 있다. 이제 남은 건 비극뿐이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당천상의 고발을 구실로 일본군은 안전지대에 들어가 숨어있던 부상병들을 즉결 처형한다. 안전지대는 완전히 무너졌다. 일본군은 안전지대에 있는 여성들을 다시 강간하려 한다. 당천상의 아내와 처제도 끌려가기 직전이다. 당천상은 계약한 서류를 보여주며 일본 병사를 말리려 하고, 어린 당천상의 딸도 병사의 다리를 붙들고 늘어진다. 다른 병사 하나가 웃으며 당천상의 딸을 안아 들어 창밖에 던진다. 이 사건은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태연히 그리고 단숨에 벌어져서 꿈처럼 느껴질 정도다. 관객이 상황을 채 받아들이기도 전에 당천상의 절규가 이어진다. 딸아이가 죽었다. 동포들을 죽이는 데 일조했다. 여성들은 위안소에 끌려갔다. 나치니, 안전지대니 하는 명칭이 유명무실한 것처럼 자신의 서류도 아무런 힘이 없음을 그는 절망 속에서 깨닫는다.




가운데서 화면을 보고 있는 인물이 '이다'



     당천상의 처제는 이때 위안소로 끌려갔다가 정신을 놓고 만다. 이다는 그런 그녀를 건물 뒤로 데려가 총살한다. 저렇게 살 바에야 죽는 게 더 낫다는 이다의 단언을 카도카와가 듣는다. 위안소로 끌려간 100명의 여성 중 살아남은 건 일곱뿐이다. 그들이라고 몸과 정신이 멀쩡하진 않다. 이런 상황을 감당할 수 없었던 병사 한 명이 발작하듯 일본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소리친다. 이다가 힘껏 뛰어가 병사의 뺨을 주먹으로 후려친다. 병사는 번뜩 정신이 든 것처럼 곧장 집단 광기 속으로 복귀한다.

     물론 실상은 반대다. 병사는 잠시 제정신을 차렸다가 이다의 주먹질에 다시 정신을 놓은 것이다. 광기를 벗어나면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이다는 누구보다 알고 있다. 폭력의 가장 중심지에 자리하는 것. 그리하여 폭력의 질서를 유지하는 것. 그게 이다가 선택한 생존법이기 때문이다. 이 장면은 하이앵글로 촬영되었고, 주변부를 넓게 보여주는 대신 인물은 작게 보여준다. 그 장면에 있는 모두가 보잘것없어 보인다. 그들은 폭력의 꼭두각시 인형을 자처한다. 폭력은 그것을 행하겠다고 마음먹고 나면 그리 어려운 대상이 아니다. 우리 안에 있는 괴물에게 통제권을 넘겨주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To be continued →


*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다음 영화

* 이번 소제목의 글은 제법 길어요. 나눠서 올리는 것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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