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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MMER GARDEN Dec 12. 2023

시선의 방향_11 ⟨오펜하이머⟩와 ⟨난징! 난징!⟩

영화 에세이 (Film Essay)




이전 글과 이어집니다.


※ Spoiler Alert ※

영화를 보지 않은 분들도 재밌게 읽을 수 있도록 장면 묘사가 많이 등장합니다.
스포일러를 원하지 않는 분들의 주의를 요합니다.








     세계는 여전히

     ⟨오펜하이머⟩의 주인공 오피가 어떤 선택도 하지 않고 폭격 같은 자신의 최후를 감내하고 있을 때, ⟨난징! 난징!⟩의 주인공 카도카와는 영화의 마지막 15분에서 중대한 세 번의 결정을 내린다. 그의 결정은 자신의 운명뿐 아니라 타인의 운명에도 영향력을 행사한다.



     앞서 보았듯이, 카도카와의 첫 번째 결정은 위안소로 끌려갈 위기에 처한 선교사를 당사자의 부탁대로 사살하는 것이었다. 그다음으로 카도카와는 선교사가 살리려던 저항군을 숲에 풀어주기로 한다. 사실 이 저항군은 동료들이 끝까지 전장에 남아 싸울 때 혼자 도망쳤던 자다. 고작 열 살이나 되었을까 싶은 어린 병사인 ‘소두자’도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켰던 싸움에서 그는 혼자 도망쳤다. 양민인 척해보지만 결국 발각되어 숲으로 끌려가는 그의 걸음에는 아직도 두려움이 가득하다. 그는 한순간도 죽음 앞에서 담대하지 못했다. 도망친 자는 살고 싶은 자다. 반면 함께 끌려가는 소두자의 표정에는 비장함이 서렸다. 그는 어린아이지만 전장에서 죽음을 각오한 이의 얼굴을 하고 있다.

     두 사람의 뒤에서 일본 병사 하나가 총을 멘 채 걷고 있다. 카도카와가 매춘부인 유리코와 결혼하겠다고 말하자 머리에 성병이 옮은 게 아니냐고 묻던 병사다. 병사와 카도카와는 바로 직전 장면에서 난징 점령을 기념하는 행사와 전사자들을 위한 추모제를 지낸 참이다. 웅장한 북소리에 맞춰서 기합을 넣고 춤을 춘다. 행진하는 병사들 뒤로 연기가 자욱하게 피어올라 하늘이 보이지 않는다. 앞줄에 선 카도카와의 눈은 공허하게 이글거린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그의 새까만 눈동자와 살짝 벌어진 입이 그렇게 묻는 것만 같다. 양민으로 분류받지 못한 포로들과 소두자도 추모제를 지켜본다. 소두자의 눈에 카도카와와 같은 질문이 담긴다. 그들은 무엇을 위해?

     숲을 향해 얼마나 걸었을까. 카도카와는 저항군과 소두자를 포박한 끈을 풀어주라고 병사에게 명령한다. 병사는 끈을 풀어주고, 상황을 파악하지 못해 어리둥절하게 선 저항군과 소두자의 등을 떠민다. 저항군이 소두자의 어깨를 감싸안고 숲을 향해 걷는다. 소두자가 힐끗 뒤를 돌아보면 카도카와가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다. 숲의 입구는 여전히 멀기만 하다. 그래도 둘은 숲에 도착할 것이다. 숲을 지나면 자유가 기다린다. 그 희망의 땅은 카도카와가 끝내 닿을 수 없는 곳이다. 네 사람 옆으로 펼쳐진 풀밭에 들꽃이 가득하다. 


살아 있는 게, 죽기보다 더 힘들구나.


     이 말이 카도카와의 유언임을 병사도 알고 있다. 어찌할 바를 모르는 병사에게 카도카와가 마지막 경례를 한다. 병사는 허리 숙여 인사를 하고 왔던 길을 혼자 되돌아간다. 그러다 멈춰서서 뒤를 돌아 한 번 더 깊이 허리 숙여 인사한다. 비로소 혼자 남은 카도카와는 흙길에 쪼그려 앉아 들꽃을 보며 흐느낀다. 화면 상단에 카도카와가 앉았고 그의 아래로 너른 풀밭이 펼쳐져 있다.

     총소리가 들린다. 카도카와의 고통스러웠던 생이 풀밭으로 쏟아진다. 이것이 그의 세 번째 결정이다. 걸어가던 저항군과 소두자가 놀라서 걸음을 멈춘다. 그들은 서로의 가슴팍과 배를 더듬거리다가 뒤를 돌아본다. 굳은 표정으로 다시 소두자의 어깨를 감싸 안고 걷던 저항군은 이내 소두자를 내려다보고 미소 짓는다. 그 웃음에 굳어 있던 소두자의 표정도 비로소 풀어진다. 도망쳤던 자도 맞서 싸웠던 자도 모두 살고 싶었을 뿐이다. 저항군이 소두자에게 민들레를 꺾어다가 주고, 둘은 민들레 홀씨를 불며 장난을 친다. 행복한 두 사람의 모습은 들꽃 사이에서 잠든 카도카와의 모습과 대조적이다. 카도카와의 마지막 결단은 자기 자신에게는 해방을, 두 명의 타인에게는 자유를 남긴다. 그리고 혼자서 다시 광기 속으로 돌아가야 하는 병사에게는 균열을 남긴다. 귀에 들꽃을 꽂고 행복하게 뛰어가는 어린 소두자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영화 ⟨난징! 난징!⟩은 끝이 난다.





     대개 영화는 주인공의 마지막 선택과 결말을 통해 메시지를 전달한다. 물론 러닝타임 내내 엉뚱한 이야기를 하다가 엔딩에서 급히 포장한다고 해서 그것이 영화의 발언이 되지는 않는다. 점진적으로 쌓아오다가 엔딩에서 완연하게 꽃 피는 것이 영화의 발언이고 메시지다. ⟨난징! 난징!⟩의 엔딩이 말하는 인간다운 삶을 향한 열망과 소중히 붙든 희망은 이미 영화 곳곳에 포진되어 있었다. 덕분에 엔딩이 그토록 강한 힘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난징! 난징!⟩에는 사람들이 노래 부르는 장면이 종종 등장한다. 난징의 민간인들은 죽음이 문턱까지 쫓아왔음에도 아이들에게 노래하는 법을 가르친다. 겁탈당한 뒤 정신을 놓은 여인이 마지막까지 기억하는 것도 노랫말이다. 일본 병사들이 광기를 피해 잠시 긴장을 푸는 것도 노래를 부르는 순간이다. 그래서 ⟨난징! 난징!⟩에서 노래하는 일은 평화롭고 자유로운 삶을 향한 열망의 표현이 된다. 아이들에게 노래를 가르치는 마음이란 전쟁의 고통 속에서도 기어이 생이 이어지고, 평화로운 세계가 도래하라는 염원이다.

     양인과 군인을 구분하기 위해서 사용했던 척도 중 하나는 오랜 시간 군모를 벗지 않아 이마에 생긴 패인 자국과 피부색 차이다. 함께 싸우던 어른들이 모두 처형당하고 혼자 살아남은 소두자가 안전지대로 넘어왔을 때 그는 여전히 군모를 벗지 않은 채였다. 자신이 기억하는 한 항시 군인이었을 어린아이의 군모를 안전지대의 여인이 비로소 벗겨준다. 아직은 자국이 남지 않은 고운 이마가 드러난다. 아이가 다시 전장에 나가는 일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이 여인의 손길에 담긴다. 그 마음은 전우들이 처형당하는 모습을 보지 못하도록 소두자의 눈을 가려주던 한 병사의 마음과 동일하다. 소두자가 붙잡힌 병사의 밧줄을 이로 끊어내는 장면은 다소 작위적이나, 어른이 아이를 품에 안아 눈을 가리고 학살 장면을 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필요했던 장면이라면 납득이 된다. 소두자는 결국 ⟨난징! 난징!⟩이 하려는 발언이 응집된 존재다. 어린 아이로 표상되는 살아남은 희망을 보며 어른은, 다음 세대는, 인류는, 우리는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 것인가? 





     영화의 시간이 끝나면 세계의 시간이 흐른다. 등장인물의 시간은 이제 영화가 아닌 관객의 삶과 영혼에 자리를 잡는다. 세계는 처음부터 스크린이 아니라 관객이 사는 현실에 존재했다.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지혜로운 감독들은 관객에게 답이 아닌 질문을 쥐여준다. 관객은 각자의 방식으로 세계를 살아내며 영화가 남긴 질문의 답을 찾는다. 

     무엇을 위해 그토록 많은 비극이 이 땅에 필요했는가? ⟨난징! 난징!⟩에 하늘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 그래서 모든 비극은 오롯이 땅의 영역이라는 것은 달리 말하면 땅에서 인간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는 의미다. 이 비극들은 천재지변 같은 자연의 영역이 아니다. 인간이 만들었고 인간이 해결해야 한다. 무엇을 위해서? 그것이 결국 끝없이 되돌아가야 하는 우리의 질문이다. 오늘날 전쟁 영화를 만드는 모든 이들이 해야 하고, 또 전쟁 영화를 보는 모든 이들이 복창해야 하는 질문이다. 우리는 도대체 왜, 무엇을 위해 이렇게까지 큰 희생을 감수하는가. 또 그래야만 할 것인가? 도대체 왜? 무엇을 위해? 그 질문을 충족할 수 있는 답이 정말 존재하는가. 

     그러나 ⟨오펜하이머⟩는 계속해서 이유가 있었을 지도 모른다는, 타당한 선택이었을 지도 모른다는 구멍을 만든다. ⟨오펜하이머⟩의 엔딩이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이유 역시 그 때문이다.










To be continued →


*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pastemagaz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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