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 대 때 나는 ‘내가 너일 수 없고, 너는 나일 수 없다’는 자명한 사실에 밤낮없이 아파했다. 어떻게 해도 나는 슈슈를 이해할 수 없고, 슈슈는 나를 이해할 수 없다. 엄마는 나의 외로움을 모르고, 나는 엄마의 외로움을 모른다. 어린 나에게는 그 당연한 사실이 ‘우리는 결코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니 영영 사랑할 수 없다’는 선고와 같았다. 각자의 자리에서 무력하게 외로울 수밖에 없다는 절망적 공표이기도 했다. 존재의 가장자리를 애써 더듬는 것…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그 눈먼 손짓뿐이라고 느꼈다.
사랑과 이해는 우로보로스의 머리와 꼬리 같아서 하나가 다른 하나를 먹으며 맴맴 원을 그렸다. 나는 누구든 온전히 사랑하고 싶었다. 온전히 이해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어서, 그건 앞으로도 내가 영영 해줄 수 없는 일이어서, 세계의 무수한 밤은 애달파 까맣게 익고 익다가 떨어졌다. 당신을 이해하지 못해서 우는 순간에도 내가 아는 건 고작 나의 괴로움뿐이었다.
존재의 비참함은 이처럼 도무지 깨지지 않는 견고한 자아에서 비롯한다. 누구도 날 이해하지 못한다는 생각은 우리를 쉽게 냉소적으로 만든다. 견고한 방어선을 구축하게 한다. 차라리 타인을 공격하고 약점을 찾아내서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려는 이들도 생긴다. 얄팍한 권력관계가 곰팡이처럼 몸을 뒤덮는다. 외로움에 대한 공포는 사람을 일종의 공황에 빠뜨린다. 혼자가 낫다거나, 버려지기 전에 버린다거나, 하는 기이한 일들이 벌어지는 것이다.
나는 이제야 ‘내가 당신일 필요가 없고, 당신이 나일 필요도 없다’는 걸 배운다. 슬퍼하는 대신 가만히 존재의 시작점으로 돌아가 사람의 설계 방식을 곱씹는다. 이제 막 세상에 태어난 아이는 가장 먼저 보호자를 통해 세계와 자아를 인식하고 발견해 나간다. 그다음 다양한 환경과 관계를 겪으며 스스로를 재정립한다. 인생은 이 행위의 무한한 반복이다. 내가 알 수 있는 건 고작 나 자신뿐이지만, 내가 나를 알아차리기 위해서는 타인과의 조우가 필수적인 것이다. 자아에 대한 인식은 타자와의 부딪힘에서 발생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관계 안에 있을 때 비로소 개별자로 존재할 수 있다. ‘나 없이는 너도 없고, 너 없이는 나도 없다.’ 혼자서도 충분히 괜찮다고 믿는 사람은 그래서 어리석다.
타인이라는 거대한 우주. 그 우주에 나의 우주를 전력으로 부딪혀볼 수 있는 동력이 사랑이다. 사랑은 개별자들을 강력하게 충돌시킨다. 그리고 진정한 자기 자신을 발견하도록 돕는다. 사랑에 빠진 사람을 떠올려보자. 평소 그를 잘 아는 친구들조차 혀를 내두를 만큼 전혀 다른 사람이 되지 않던가. 한때 어리석다고 타매했던 일도 사랑에 빠지면 얼마든지 대수롭지 않게 행할 수 있다. 기이할 정도로 친근하게 느껴지는 타인을 통해 놀랍도록 낯설고 생경한 자신과 마주한다. 그 알아차림은 가슴 벅차게 행복하고 경이롭다. 누군가가 나를 알아주면 기쁘고 즐거운 것처럼, 우리는 스스로를 알아차릴 때 생각보다 훨씬 큰 행복을 느낀다. 그러니까 아마도, 사랑하고 싶은 사람은 행복하고 싶은 사람이다. 나의 행복과 당신의 행복은 그렇게 연결되어 있다.내가 너일 수 없고, 네가 나일 수 없다는 사실에 아파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다행인 일이다. 내가 허락하지 않는 한, 나의 영혼은 결코 당신에 의해 무너지지 않을 테니 말이다. 그래서 나는 걱정 없이 마음껏 사랑하려 한다. 새로운 꿈을 꾼다. 나는 나 자신으로, 당신은 당신 자신으로, 그렇게 온전한 두 개인이 손을 마주 잡고 걸어가는 꿈. 어쩌면 그게 사랑의 최종적인 형태일 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