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여름이나
이나는 한 달에 보름가량 내 집에서 지낸다.
“한 번 오면 일주일 정도 있다가 가. 집도 먼데 어떻게 매번 왔다 갔다 해. 일 끝나고 같이 야식도 먹고 영화도 보고, 좋아.” 나는 미숙 씨와 전화를 하다가 이나와의 반동거 사실을 담백하게 알렸다. 남자 친구랑 잘 지내는지 안부나 물었던 미숙 씨가 당황해서 말을 더듬었다. “아니, 아우, 딸아, 요즘 여자들은 다, 그렇게 막, 그러니?” 인천에 사는 이나와 서울에 사는 나에겐 여러모로 합리적인 결정이었건만, 미숙 씨에겐 그렇지 않았나 보다. 그래도 엄마에게 거짓말은 하긴 싫었다. 놀란 미숙 씨가 헐레벌떡 창원에서 서울까지 올라오지 않을 것도 알았다. 우리는 다년간의 경험을 통해 마주한다고 해서 꺾을 수 있는 고집이 아니라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어련히 알아서 잘하려니, 그렇게 생각하는 게 서로의 정신 건강에 이로웠다.
물론 반동거에 대해서는 나도 고민했다(5분 정도). 아, 보고 싶은 걸 어떡하나. 처음엔 이나도 기껏해야 이틀 정도 머물 뿐이었다. 그런데 “하루만 더?”를 주거니 받거니 하다 보니 닷새를 넘는 게 우스웠다. 속옷이 부족해서 본가에 돌아가는 일을 몇 번 겪고 나서는 자연스레 짐이 늘었다. 나는 그때쯤 옷장 맨 위 칸을 비워줬다. 이나가 조금이라도 더 편하게 머무르기를 바랐다. 여자 친구의 집이 아니라 ‘우리’가 머무는 공간으로 인식해주는 게 나도 편할 것 같았다. 매번 ‘손님’으로 이나를 대하고 싶진 않았다. 다행히도 이나의 적응력은 내 예상보다 훨씬 뛰어났다. 한 번 왔을 때 머무는 기간이 일주일을 넘기고 열흘쯤 됐을 때 이나가 빨래를 시작했다. 잔뜩 지쳐서 퇴근했는데 청소와 빨래가 되어있는 걸 보고 나는 거의 비명을 질렀다. 우렁총각의 등장이었다.
현재 프리랜서인 이나는 출퇴근이 따로 없다. 워낙 성실한 덕에 마감에 쫓기지도 않는다. 심지어 아침형 인간인 그는 우리가 전날 야식을 먹고 나온 식기를 내가 자는 오전 동안에 정리한다. 결국 함께 지내는 동안 화장실 청소를 뺀 나머지 집안일은 거의 이나가 담당하게 되었다. 한 번씩 양심에 찔려서 부엌에 나가면 설거지하던 이나가 손을 휘휘 내젓는다. “아, 침대 가서 웹툰 봐! 누워 있어!” 그럼 나는 우물쭈물하다가 슬그머니 침대로 돌아가곤 하는 것이다. “고마워. 네가 최고야. 그래도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되는 거 알지?” 슬그머니 말을 건네자 이나는 별소리를 다 듣는다는 표정이다.
이제는 내가 출근 시간에 맞춰서 겨우 눈을 뜨면 이나가 커피를 내려다 주는 게 일상 풍경이다. 아주 그냥 버릇을 잘못 들인다며, 어쩔 거냐고 헤벌쭉 따져 묻는 내게 이나가 당당하게 대답한다. “아, 그거야!” 으스대듯 쭉 펼친 가슴팍을 보자 나도 모르게 웃음보가 터진다. 이나와 함께 하는 기상 시간은 하루도 빠짐없이 떠들썩하다.
***
공간을 공유하며 함께 지낸다는 건 삶의 대부분을 공개한다는 뜻이다. 부부든 연인이든 룸메이트든, 타인과 함께 지낼 때 다툼은 보통 삶의 사소한 생활 양식 차이에서 비롯한다. 왜 먹은 걸 바로 안 치워? 치약은 아래서부터 짜면 안 돼? 양말 뒤집어서 벗지 말라니까. 방문 좀 살살 닫아. 하는 것들 말이다. 다행스럽게도 이나와 나는 이 부분에서 아직 부딪히는 게 없다. 우선 이나가 워낙 무던하고, 어떤 환경이든 잘 적응하는 덕이다. 어지간한 건 그냥 내가 맞추면 된다는 마인드여서 늘 고맙다. 물론 나는 예민하다. 하지만 세상을 내 입맛대로 바꿀 수 있었다면 진즉에 그리했을 것이다. 적당히 타협하지 않으면 이 다채로운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게다가 나는 내 예민한 기질을 가지고 남에게 성질부리는 걸 정말 싫어한다. 그래서 나와 이나가 만나면 이런 상황이 탄생한다.
감각이 예민한 나는 주광색(晝光色) 등을 선호하지 않는다. 새하얗고 밝은 전등을 지나치게 많이 설치한 카페에 가면 금방 피로감과 두통을 호소한다. 요즘은 가정에서도 LED를 쓰다 보니 좁은 방에서 전등을 켜면 곧잘 눈이 아프다. 그래서 내 방에서만큼은 전구색 간접 등을 켜고 생활한다. 침대 옆에는 커튼을 하나 달아서 전등 빛을 한 번 더 차단할 수 있게 했다. 나에게는 당연한 조치이지만 이나에게는 모든 게 낯선 정보다. “전등을 켜면 눈이 아파? 왜? 안 켜면 어둡지 않아?” 그래도 이나는 간접 등 생활에 금방 익숙해졌다. 집에서 영화를 볼 때면 간접 등에 천을 얹어서 조도를 더 낮추는 일에도 익숙해졌다. 그래도 어쩌다 한 번씩 본인도 모르게 ‘방이 왜 이렇게 어둡지?’하고 무심코 LED 등을 켠다. “키에엑!” 영화에 나오는 뱀파이어처럼 기겁하는 내 소리를 듣고 놀란 이나가 후다닥 불을 끈다. 짝꿍이 나한테 맞춰서 일부러 낮은 조도에서 생활하고 있다는 걸 아는 입장으로서는 이런 상황이 그저 웃기다. 결국 우리는 시답잖은 일로 한참을 낄낄거린다.
(2/2)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