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슈는 나의 재능을 가장 먼저 알아차린 사람이기도 했다. 내가 쓰는 글, 영화와 책을 읽어내는 눈, 사람과 상황을 다방면으로 보려는 태도, 생각하고 느낀 걸 명확하게 언어로 표현하는 재능. 슈슈는 그 모든 걸 아꼈다. “넌 맞는 말만 해. 그래서 좋아.” 그리고 그는 내가 정말 그 모든 재능을 가진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걸 믿게 만들었다. 그는 나의 트리니티였다.
물론 감당해야 하는 힘겨운 점도 많았다. 슈슈는 특별한 사건 없이 못되게 굴 때가 잦았다. 나는 툭하면 욕받이를 해야 했고, 갖가지 고약한 소갈머리를 감당해야 했다. 슈슈는 혼자만의 시간이 꼭 필요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가 원할 때는 새벽이고 한밤중이고 반드시 옆에 있어 줘야 했다. 일단 심사가 뒤틀리면 상당히 지독하게 심통을 부렸는데, 왜 그러는 건지 결단코 이유를 말해주지 않아서 애를 먹었다. 나는 오기가 생겼다. 대체 저 인간이 왜 저러는지 듣기 위해 길바닥에 무릎을 꿇기도 했고, 뺨을 얻어맞기도 했다. 기어이 그 입을 열어 이유를 들었을 땐 묘한 승리감마저 들었다. 그렇게 보면 슈슈가 짜증을 내는 순간은 그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 수 있는 순간이기도 했다. 신기하게도 슈슈가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이해가 되면 화가 나지 않았다. 그건 그의 행동이 옳다 그르다, 좋다 나쁘다는 가치 판단을 떠난 영역이었다. 이런 사실을 깨달은 후 슈슈에 대한 나의 분냄은 15분을 넘긴 적이 없었다. 이제 막 끓기 시작하려는 냄비의 불을 끄면 순식간에 표면이 잔잔해지는 것처럼 그렇게, 그냥, 괜찮아졌다. 다음에 비슷한 상황이 오면 어떻게 대처할지 차분하게 고민하면 됐다. 그리고 마침내 그도 나도 깨달았다. 슈슈보다도 내가 슈슈를 더 잘 안다는 사실을.
사람은 변하고 발전한다. 쌍둥이라고 해서 계속 같은 길을 걷는 건 아니었다. 나는 언젠가부터 트리니티 없이도 내가 네오임을 믿을 수 있었다. 반면 내가 사랑했던 슈슈의 모습은 점점 희미해졌다. 재능 있는 사람이 자신의 변화와 발전을 포기하면 그 대가가 더 가혹하다는 걸 새삼스레 깨달았다. 더 이상 그에게서 무언가를 배울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와 나누는 대화들도 즐겁지 않았다. 폭력적인 언행과 실망스러운 모습만이 마음에 켜켜이 쌓여갔다. 일이 이렇게 될 걸 알고 있었다지만, 정리의 순간은 생각보다 빠르게 찾아왔다. “나랑 대화할 생각을 하지 마.” 슈슈가 그렇게 말했을 때 비로소 나의 첫사랑은 끝났다. 그를 끊어내는 일은 나의 약한 지점과 작별하는 마지막 단계이기도 했다. 사랑을 결심했을 때처럼, 사랑을 끝내는 것도 나의 몫이었다. 한때 사랑이었던 것의 죽음을 온전히 수용하기 위해서 나는 울었다. 그러고 나자 남은 건 뜻밖에도, 나에 대한 온전한 주권 회복이었다. 전율이 온몸을 휘감았다. 내가 얻게 된 것들이 그제야 보였다.
원 없이 최선을 다해 사랑하면서 나는 놀라울 만큼 강인하고 또 유연해졌다. 인내를 배웠고, 수용을 익혔으며, 해로운 관계를 끊어내는 결단을 터득했다. 지금 내 곁에 있는 이나라는 아름다운 사람을 알아볼 수 있는 식견이 생겼다. 그리고 무엇보다 상대를 사랑하는 과정에서 나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깨달았다. 비록 나의 첫사랑은 결실을 이루지 못했으나,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값진 결과를 안겨주었다.
그렇다고 나가서 아무 나쁜 놈이나 붙들고 연애하라는 얘기가 아님을 꼭 한 번 짚고 넘어가야겠다. 내가 겪은 연애는 누구에게도 먼저 권장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다만, 언젠가 당신이 사랑하게 된 사람의 영혼이 가난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랑을 포기할 필요는 없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경험은 그 자체로 축복이다. 그러니 최선을 다해 부딪혀보라. 나는 그 사랑이 당신의 영혼에 도움이 될 것을 간절히 바라고 또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