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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정원 summer garden Oct 25. 2024

3.0 나쁜 놈을 만나는 이유 (1/4)

1부 여름이나





제레미 아이언스는 영국 출생의 배우다. 1948년생으로 어느덧 일흔 후반에 접어들었지만, 여전히 영화와 연극으로 대중을 만나고 있다. 국내에서 유명한 작품은 ⟨로리타⟩나 ⟨리스본행 야간열차⟩가 아닐까 한다. ⟨로리타⟩에서는 10대 소녀 로리타에게 욕망을 느끼는 중년의 교수 ‘험버트’ 역으로 분했고, ⟨리스본행 야간열차⟩에서는 다리에서 뛰어내리려는 여인을 구했다가 뜻밖에 미스터리와 조우하게 되는 교수 ‘그레고리우스’ 역을 맡았다. ⟨데미지⟩를 아는 분들도 있을 텐데, 이 작품에서는 아들의 연인과 금단의 사랑에 빠지는 정치인 ‘스티븐 플레이밍’ 역을 맡았다.


해당 영화들은 제레미 아이언스의 중후하고 이지적이며 금욕적인 이미지에 편승한다. 그는 187cm의 장신이지만 어릴 적부터 발레와 승마를 익혀 곧고 다부진 몸을 가지고 있다. 각진 얼굴과 은색 머리카락, 거기에 총기 어린 눈이 어우러져 우아하지만 다가가기 어려운 인상을 만들어낸다. 반면 깊고 쓸쓸한 눈빛은 우수에 찬 느낌을 자아내어 보는 이로 하여금 알 수 없는 보호본능을 일으킨다. 이 간극이 제레미 아이언스의 무기다. 차갑고 엄정해 보이던 인물이 욕망에 휘둘리며 감정적으로 무너져 내리는 모습은 그 자체로 강한 호소력을 지닌다. 로리타의 그 ‘험버트’를 연기하면서 관객에게 불쾌감이 아닌 애잔함과 연민을 느끼게 했으니 말 다했다.

여전히 셰익스피어의 연극을 사랑하고, 큰 성을 보수하느라 퀄리티와 무관하게 여러 작품에 참여해서 엉망진창인 필모그래피를 가진, 아이언맨보다 아이언(Irons)이라는 단어가 잘 어울리는 이 노년의 배우가 바로 나의 만고불변한 이상형 되시겠다. 그밖에 내가 이상형으로 자주 꼽는 인물은 ‘매즈 미켈슨’, ‘하비에르 바르뎀’, 국내에서는 ‘류승룡’ 배우 정도다. 그렇다. 내 이상형 기준은 제법 확고하다.


세상에 이상형을 만나서 연애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냐마는, 현실적인 이상형이라고 해서 그 범주가 딱히 넓어지지 않는다면 문제가 된다. 나는 어릴 적부터 ‘좋은 사람이랑 뭐 하러 연애하나. 연애는 좋아하는 사람과 해야지. 좋은 사람이랑은 친구하자!’라는 주의였다. 물론 그때는 이렇게까지 내 마음에 차는 사람이 없을 줄 몰랐다. 상대가 이성으로 보여야 뭘 하든 말든 할 텐데, 아무리 둘러봐도 주변엔 친구 할 사람만 그득했다. ‘선입견을 두면 안 되지. 누구든 일단 만나보자.’라는 마음으로 오는 데이트 신청을 막은 적도 없다. 하지만 상대가 나를 얼마나 좋아하고 잘해주든 간에 내가 좋아하지 않으면 도저히 만남을 이어 나갈 수 없었다. 그렇게 연애 생각은 아예 접어놓고 살던 중 우연히 만나게 된 사람이 ‘슈슈’였다. 지금부터 하는 얘기는 엄마 아빠 뒷목 잡기 딱 좋은 얘기다.






***

“나르시시스트인 것 같아.”

슈슈와 두어 번 데이트를 한 후 내린 나의 단평이었다. 그는 윤리관에 문제가 분명한 사람이었다. 폭력이나 돈으로 사람을 누르고 이용하는 걸 당연하게 생각했다. 예민하고 변덕스러운 성정은 자신이 가진 예술성과 비례하는 불가항력적인 것이라 여겼고, 일주일에 네다섯 번씩 술을 퍼부었다. 여성 편력도 심했다. 연애를 한다고 여색을 멈출 위인이 아니었다. 슈슈는 젠더 감수성이라곤 도무지 찾아볼 수 없는 남성우월주의자였다. 그와 만날 시 펼쳐질 고생길이 훤했다. 그러나 이 모든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나는 슈슈에게 끌렸다. 당시 룸메이트였던 친구가 제발 그러지 말라며 내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늘어졌음에도 기어이 슈슈와 연애를 시작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연애를 하기 위해서는 상대에 대한 호기심이 지속적으로 일어야 한다. 하지만 나는 사람과 관계에 대한 계산 머리가 밝은 것인지, 직관이 뛰어난 것인지, 대개 한 번의 만남으로도 상대에 대한 호기심이 충족되곤 했다. 필요한 정보를 얻고 나면 지겨움이 몰려왔다. 데이트는 세 번을 넘기가 어려웠다. 그런데 슈슈는 달랐다. 비슷한 취미와 감각, 언어 체계 덕에 그와의 대화는 매번 아우토반을 달리는 듯했다. 슈슈와 동행하는 길에 내가 바라는 풍경이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좋은 사람이든 나쁜 사람이든, 그때 슈슈는 나에게 필요한 사람이었다. 그와 함께 할 때 배우고 깨달을 게 있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았다. 들끓는 호기심 앞에서 위험 요소란 기꺼이 감수해야 하는 장애물에 불과했다. 이 죽일 놈의 호기심. 나는 이 녀석을 죽이지 못해서 언젠가 이놈 손에 죽고 말 것이다.


머리가 커지고 나서 만난 첫사랑이자 첫 연애(절망적이었던 연애 시뮬레이션은 노카운트다) 상대를 앞에 둔 나는 재는 것도, 무서운 것도 없었다. 자존심도 세우지 않았다. 나에게는 오직 첫 연애가 갖는 지독한 순정만이 가득했다. ⟨아비정전⟩을 사랑하는 남자와 연애를 하고 싶진 않았건만… 아무렴 인생은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 법이다. ⟨화양연화⟩를 사랑하는 여자와 연애할 생각은 슈슈에게도 없었을 테니.






(2/4)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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