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나의 초능력을 알아차린 건 스무 살즈음이었다. 나는 아주 어릴 때부터 내가 남들과 다르다는 걸 알았다. 평범한 하루하루를 보내기 위해서 아주 막대한 에너지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사는 게 안 힘든 사람이 어디 있겠냐마는, 별일 없이도 힘이 든다면 그건 퍽 곤란하다. 어디 병이 있는 건 아닐까? 이게 정말 우울증 때문일까? 근데 우울증은 대체 왜 생기는 건데? 에너지 부족 문제를 해결하는 건 나의 오랜 숙제이자 염원이었다. 그러다 스무 살 초반 ‘크리스텔 프티콜랭’의 ⟪나는 생각이 너무 많아⟫와 ‘일자 샌드’의 ⟪센서티브⟫를 읽었다. 그제야 나는 저주나 병 따위로 생각했던 나의 특성이 사실은 초능력과 축복에 가깝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생각이 너무 많아⟫는 ‘정신적 과잉 활동인(PESM)’을 다룬 책이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아무리 피곤해도 그 고리를 끊어내기가 어려운 사람의 특성에 관해 이야기한다. ⟪센서티브⟫는 ‘매우 민감한 사람(HSP: Highly Sensitive Person)’을 다루는데, 이들의 강점과 약점을 설명하고, 실제 사례를 통해 생활 속 불필요한 에너지 소진을 방지하는 방법을 소개한다. PESM 또는 HSP인 사람은 보통의 경우보다 자극에 예민하게 반응한다. 그들은 지속 가능한 삶을 위해 어느 정도 환경을 통제할 필요가 있다. 최적의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서는 우선 자신의 특성을 명확하게 파악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특성에 좋다 나쁘다 하는 가치 판단을 부여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일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들은 어릴 때부터 “제발 쓸데없는 생각 좀 하지 마”, “왜 그렇게 예민하게 구는 거야?”, “별거 아니잖아. 남들은 다 하는데 왜 너만 그래?” 같은 말을 지속적으로 들으며 자랐을 확률이 매우 높다. 그러는 동안 그들의 놀라웠던 재능은 저주가 되어 자존감을 갉아먹는다. 이 묵은 족쇄를 끊어내고 새롭게 스스로를 긍정하는 일은 절대 쉽지 않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이 새로운 정보들에 전혀 실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해방감을 느꼈다. 병이 아니었다. 타고나게 이상한 아이도 아니었다. 쓸데없이 눈물이 많은 게 아니었고, 나약하고 위선적인 게 아니었다. 나는 단지 섬세한 사람일 뿐이다. 치료도 필요 없다. 내 기질을 잘 다루기만 하면 된다. 세상에! 나는 무척 기쁘고 즐거워서 온 세상을 폴짝폴짝 뛰어다니고 싶었다. 길이 보인다는 것, 이제 내 속도와 방법대로 걸어 나가기만 하면 된다는 것, 그 안도감은 다음의 특성을 모조리 무시할 수 있을 만큼 강렬했다.
「당신(이)가 ‘정신적 과잉 활동인’, ‘매우 민감한 사람’ 타이틀을 획득합니다. 당신(이)는 타인들보다 에너지 소비가 빠르고 강렬할 것입니다!」
「‘야행성’ 속성이 추가 확인됩니다. 에너지 소비량이 증가합니다.」
「‘내향인’ 속성이 추가 확인됩니다. 에너지 소비량이 증가합니다.」
「경고! 이제 집 밖을 나갈 때마다 심각한 내상을 입을 확률이 비약적으로 증가합니다!」
흥, 어쩌라고다.
강박에 취약하다
브런치 공모전 마감을 두 달 앞두고 작업 계획을 세운다. 엑셀로 달력까지 만들어가며 열성을 기울인다. 그럴싸한 계획표를 보고 있자니 아주 낙관적인 마음이 든다. 그러고 보니 최근 몇 달은 회사 근무도 개근이다. 나라는 인간도 제법 레법업을 한 게 아닐까. 어쩌면 이번 계획은 제대로 수행할지도 모르겠다. 느낌이 좋다.
개뿔. 어림도 없지. 계획 첫날부터 나는 새벽 4시가 넘어 잠들고 오후 느지막이 일어난다. 엄마, 저더러 손이 고우니 공주처럼 물 한 방울 묻히지 말고 살라 하셨지요. 아무래도 저는 전생에 오로라 공주였던 모양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종일 잠만 잤는데 여전히 잠이 달겠어요. 아니다. 공주보다는 용이었던 편이 멋있겠구나. 용들도 맨날 자던데. 그런 생각을 하며 눈을 감았다 떴더니 밤이다. 이마를 벽에 쿵쿵 찧고 싶은 충동을 이기고 일단 밥을 욱여넣는다. 먹어야지. 다 먹고 살자고 하는 건데. 눈치도 없지. 마라탕은 맛있고 난리다.
결국 시작도 안 한 채 글 작업은 이틀 분량의 차이가 벌어진다. ‘십 대의 여름’이었다면 한참 전부터 좌절과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졌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일평생을 청개구리이자 게으른 완벽주의자로 살아온 ‘서른의 여름’이다. 진화형이라는 거지. 어그러진 계획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일시 정지하는 데에는 도가 텄다. 이제부터는 나를 꼬셔야 한다. 우선 뭘 하든 배가 든든해야 한다며 김치 제육을 시켜 먹는다. 부른 배를 붙잡고 샤워를 한다. 봐줄 만한 몰골이 되면 방을 치우고 커피를 사 온다. 이나가 두고 간 블루투스 스피커로 세 시간짜리 빌 에반스 재즈 플레이리스트를 튼다. 노트북은 거치대에 올려 눈높이를 맞추고, 좋아하는 피치축 키보드와 반투명의 손목 받침대를 꺼내고, 태블릿은 독서대에 비치한다. 나는 분위기에 약한 사람이다. 그 점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서 작업을 하고 싶도록 스스로를 꼬신다. 나에게 이 방법은 무척이나 효과적이다. 앉은 자리에서 미뤄둔 퇴고를 마치고, 다음 화 초안을 구상한다. 흐름을 탄 김에 요 며칠 읽고 있던 책도 완독한다. 오래 앉아 있었으니 스텝퍼도 좀 타 준다. 그리고 다시 앉아서 초고를 쓴다. 내일도 이렇게 하면 좋겠지만 그건 내일의 나한테 맡겨야 한다. 강요해선 안 된다. 내일의 여름이 하고 싶은 일은 오늘의 여름이 알 수 없는 법이다. 나는 공들인 엑셀 계획표를 과감하게 머리에서 지운다. 결국 이번 도전도 나의 특성을 재확인하는 것으로 끝났다. 어쩌겠는가, 이게 나인 걸. 마음이 한결 가볍다.
***
이렇듯 나의 모든 기질이 계획에 저항한다. 반골 기질은 정말 계획이 필요한 거냐며 삐딱한 자세로 일관하고, 야행성은 아침 일찍 일어나겠다는 포부에 진절머리를 낸다. 매사에민감한 몸은 수시로 변덕을 부리고, 강박에 취약한 머리는 기어이 계획을 세워서는 게으른 완벽주의자와 청개구리를 소환한다. 그들은 계획을 모조리 엎어버리고 싶어서 안달이다. 결국 나는 폭식과 잠으로 스트레스를 회피한다. 아아, 너무 끔찍하다. 혹시 이 글을 읽는 사람 중에 나와 비슷한 사람이 있거든 부디 ‘투 두 리스트(To do list)’ 따위는 갖다버리는 걸 권장한다. 우리는 계획과 연이 없다. 정체성의 큰 부분을 충동성에 빚지고 있음을 인정하자. 순간에 충실할 때 훨씬 다양한 작업을 즐겁게 할 수 있다. 현재를 온전히 만끽하는 거, 그거 아무나 못 한다.
또 하나, 당신의 특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잔소리나 해대는 사람을 굳이 곁에 둘 필요 없다. 이나는 루틴인이지만 단 한 번도 내 생활방식에 트집을 잡은 적 없다. 내가 오래 자면 “잘 자네~”하며 이불을 고쳐 덮어주고, 내가 많이 먹으면 “잘 먹네~”하며 음료를 가져다줄 뿐이다. “글 쓴다던 거 잘 쓰고 있어?” 그런 질문도 하지 않는다. 매일 같은 시간에 꾸준히 작업하는 이나 입장에서는 내가 하는 모양새가 불안하고 한심해 보일 법도 한데 말이다. “자기가 알아서 잘하는데 뭐~. 그리고 자기는 뭘 하든 잘할 거야!” 실로 심플하고 견고한 믿음을 보고 있자니 반드시 그 믿음에 보답하고 싶다. 그러니까 미숙 씨가 20년 만에 깨달은 사실을 이나는 한 달 만에 깨달은 것이다. 나는 뭐든 ‘내버려둘 때 제일 잘한다’는 사실을.
환경을 바꾸는 것도 고려해 보시라. 지금 나는 13시에 출근해서 20시 30분에 퇴근하는 직장에서 일한다. 덕분에 지각 걱정이 사라졌다. 주 4일 근무이기 때문에 약한 체력 부담도 덜었다. 몸을 쓰는 업무에서 입으로 떠드는 업무로 옮긴 것도 에너지 절약에 큰 도움이 됐다. 나는 매 상담을 진심으로 해내고 보람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6~7시간씩 풀 상담을 해도 잘 지치지 않는다. 그리고 여전히 계획을 위한 ‘투 두 리스트’는 쓰지 않는다. 대신 하루에 한 일을 기록하는 ‘던 리스트(Done list)’를 쓴다. 큰 방향성을 잡는 데 도움이 되고, 시간이 손가락 사이로 줄줄 새어 나가는 불안을 예방해 준다.
나는 앞으로도 나에게 가장 잘 맞는 방식으로 삶을 꾸려나갈 것이다. 당연하게도, 그편이 행복하기 때문이다. 진정한 ‘갓생’의 단서는 개인의 내면에 다양한 형태로 존재한다. 사회가 바라는 이상향과 얼마나 차이가 나든지 간에, 우리는 먼저 그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