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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정원 summer garden Oct 25. 2024

2.5 던 리스트 사용법

1부 여름이나





기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건 기록의 이유다. ‘당신은 왜 기록하려고 하는가?’ 그 대답에 따라 ‘무엇을’, ‘어떻게’, ‘얼마나’ 기록할지가 정해진다.


나는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기록을 시작했다. 어릴 적부터 허튼 공상으로 머리와 가슴이 헬륨 풍선처럼 부풀었던 탓에, 나의 두 발은 긴 시간 도무지 땅을 딛지 못했다. 시간이 손가락 사이 모래알처럼 흘러 모조리 새어나가는 느낌은 차라리 혓바닥을 삼키고 싶을 만큼 공포스러웠다. 시간을 붙들고, 다시 창조하고, 두 발에 꽁꽁 묶어 나의 중력으로 걷는 일이 절실했다. 고백하건대, 나의 발목은 스물일곱 해가 넘어서야 겨우 태어났다.


시간을 붙드는 유구한 방법 중 하나는 일기를 쓰는 것이다. 하지만 내게는 일기 쓰기가 오히려 번거로운 작업이었다. 언제든 단상이 떠오르면 휴대폰 메모장에 곧잘 기록하는 습관 때문이었다. 화면 캡처도 즐겨 사용했고, 필요한 경우 사진도 찍어두었다. 이것들은 일자와 시간을 기록하기에 무척 용이했다. 그러니 따로 시간을 내서 하루를 복기하고 소회를 적는 건 일을 구태여 두 번 하는 느낌이 강했다. 만약 감정을 들여다보고 다스릴 필요가 있다면 ‘감정 일기’나 ‘내면 아이’같은 활동을 하는 게 훨씬 효과적이었다. 깊은 감정 승화를 위해서는 시를 쓰거나 소설을 쓰는 것도 괜찮았다. 내가 원하는 건 나의 시간과 에너지를 가시화하는 것이었으므로, 한 장 한 장 채워나가는 일기는 목적에 부합하는 형식이 아니었다.


각자에게 알맞은 기록법을 찾기 위해서는 시행착오가 필수적이다. 나 역시 몇 년에 걸쳐 조금씩 기록법을 변화시켰다. 누구에게든 도움이 될까 하여 간단하게나마 공유해본다.




종이

가장 접근하기 쉬운 기록 방식이다. 문구류를 좋아한다면 다양한 다이어리와 펜을 사 모으는 재미도 있다. 나는 글의 구상 단계에서 펜으로 글씨를 끄적거려야만 머리가 돌아가는 아날로그 인간인지라 종이 기록이 자연스러운 선택이기도 했다.


2017년 5월의 기록


종이 기록의 가장 큰 단점은 부피 차지가 크다는 점이었다. 나는 일기 비슷한 것과 다이어리, 각종 아이디어 노트, 그리고 온갖 자료와 필기 공책을 담은 박스가 세 개쯤 생기고 나서야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는 걸 인정했다. 한 번 종이에 쓴 글은 수정하기 어렵다는 것도 큰 단점이었다(특히 게으른 완벽주의자라면). 만년형 다이어리가 아닌 이상 날짜가 표기되어 있는데, 6일을 바른 글씨로 채우다가 마지막 하루에 글씨를 삐뚤게 쓰면 그게 그렇게 속이 상했다. 또 아무리 예쁘게 써도 한두 해 지나면 잉크가 번져서 글씨를 못 알아보는 경우가 생겼다. 시간이 더 지나면 종이도 삭을 것이었다. 게다가 다이어리처럼 형태가 정해져 있으면 분량부터 내용의 목적성까지 다양한 제한이 발생했다. 물론 모눈이나 줄 공책을 사서 다이어리로 쓰거나, 직접 종이를 바인딩해서 다이어리를 제작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시간과 돈, 정성은 몇 배로 들어가면서 결과물은 오히려 형편없어질 확률이 높았다. 그리고 거듭 말하지만, 나는 게으르다.




태블릿

나는 공간 차지 문제를 해결하고, 필요한 내용을 필요한 순간에 손쉽게 찾아보기 위해 태블릿 시대를 선언했다. 태블릿으로 사용할 수 있는 다이어리의 종류도 상당히 다양했다. 수정이 용이한 건 기본이었고, 원하는 스티커와 이미지를 구해서 다꾸를 하기도 좋았다. 2년 가까이 사용할 만큼 제법 만족스러운 방식이었다.


2024년 2월의 기록


하지만 여전히 종이 다이어리 때 느꼈던 형식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 다이어리에는 나에게 불필요한 형식이 매우 많았다. 나는 위클리와 데일리를 사용하지 않고, 오직 먼슬리만 사용했다. 연간 계획이나 버킷리스트, 가계부 같은 자잘한 페이지도 필요 없었다. 판매하는 태블릿 다이어리의 하이퍼링크 기능이 편하긴 했으나, 가장 중요한 먼슬리가 중심인 다이어리는 찾기 어려웠다. 결국 나는 먼슬리 형식을 따로 만들어서 사용했다. 하지만 이미지와 글씨가 늘어나자 로딩이 지나치게 오래 걸렸다. 또 한눈에 전체 내용을 파악하기가 어려웠고, 내용 검색 역시 불가능했다. 그렇게 태블릿 시대는 막을 내렸다(글 작업용으로는 여전히 잘 사용하고 있다).





엑셀

나는 엑셀을 전혀 다룰 줄 몰랐다. 그래도 간단한 형식을 만드는 건 가능했다. 아쉽게도 스티커로 다꾸를 하는 건 끝내야 했지만, 내가 그토록 바랐던 시간 사용을 한눈에 보는 데에는 엑셀이 가장 적합했다. 로딩을 기다릴 필요도 없었고, 수정이 용이했으며, 검색 역시 가능했다. 이제 형식을 어떻게 개발할 것인가의 문제만 남아있었다.


현재 사용중인 던 리스트의 기본 폼
2024년 8월의 메인 표


이게 현재 내가 사용하는 던 리스트 형식이다. 던 리스트는 상황에 따라 다르게 기능한다. 하는 일이 없거나 게으르게 느껴지는 날에는 아주 사소한 것까지 기록한다. 밥 먹는 것, 얼굴에 팩을 한 것, 산책하러 나간 것, 누워서 웹툰을 읽은 것까지도 말이다. 쓰다보면 생각보다 많은 일을 하면서 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리고 아주 일이 많고 바쁠 때는 삶이 원하는 방향대로 흘러가고 있는지 점검하기에 용이하다. 나에겐 문화 활동이 중요한데 지나치게 일만 하고 있다거나, 사람도 어느 정도 만나야 하는데 집에만 있었다거나, 애니는 많이 봤는데 영화는 한 편도 안 봤다거나 하는 점을 관찰하며 삶의 균형을 조율한다.



2024년 8월의 서브 표: 통계와 내용


간단한 통계도 직관적 인식에 도움이 된다. ‘이번 달은 영상 컬러칩을 이만큼 모았구나! 대단한데?’, ‘음, 지난달에 독서를 더 하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확실히 컬러칩 수가 늘었구나. 잘하고 있어.’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아기자기한 게임을 하는 느낌도 든다.





앞선 글에서 말한 것처럼, 안티-루틴인이라면 던 리스트를 시도해 보자. 던 리스트는 며칠 혹은 몇 주가 밀려도 채우는 게 어렵지 않다. 메신저나 사진첩을 찾으면 내가 누굴 만났는지, 뭘 먹었는지, 어떤 걸 봤는지 충분히 트랙킹할 수 있다. 날짜가 반드시 들어맞을 필요도 없다. 중요한 건 내가 그 작품을 보는데 시간을 투자했다는 사실이지, 그걸 본 게 지난주 화요일인지 수요일인지가 아니기 때문이다(물론 본인의 리듬을 좀 더 파악하고 싶다면 날짜가 중요하다. 나는 주로 화요일에 영화를 보는구나! 같은 것). 이 모든 건 할 일(To-do)이 아니라 한 일(Done)이기에 가능하다. 당신이 보낸 하루는 절대 그냥 증발하지 않는다. 부디 매일의 소중한 시간을 가시화해서 마음에 담는 경험을 많은 이들이 해보기를 소망한다. 그리고 본인에게 잘맞는 방법을 고민하면서 이전보다 스스로를 잘 이해할 수 있기를 누구보다 다정한 마음으로 응원한다.







TMI 1.

현재를 위해 필요했던 디벨롭 과정

TMI 2.

지금도 한 달치 밀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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