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날로그의 힘을 믿어요

생활공책 <맑은 샘> 下편

by 곽예지나

<맑은 샘>은 크게 2개의 섹션으로 나누어져 있다. 1부는 하루 생활 체크리스트, 2부는 아이들의 이번 주 반성과 학부모님의 말씀, 그리고 <선생님 말씀>란이다.


<이번 주를 돌아보며>에는 학생들이 한 주 생활 중에서 기억에 남는 것이나 스스로 반성해야 할 점을 적는다. 재미있었던 활동 위주로 쓰는 아이들, 자신의 일주일 생활 중에서 아쉬웠던 점을 쓰고 다음 주에는 어떻게 해야겠다는 다짐을 쓰는 아이들, 학교 생활과 전혀 상관없는 생뚱맞은 내용을 써 놓는 아이들, 선생님께 사랑을 담은 메시지를 보내는 아이들 등 매우 다양하다. 어떤 내용을 어떤 분량으로 쓰는지는 크게 관여하지 않고, 일단 뭐라도 써 놨으면 통과로 한다. 아이들이 <맑은 샘>의 기록을 성실히 하는 것만으로도 자기 할 일은 다 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반의 최다 사랑고백자❤️
평범한 일주일이었지만 산성비 안 받은 것만으로도 너무 좋은 한주가 되는 마법!


<학부모님 말씀>은 아빠, 엄마, 할머니, 할아버지, 때로는 이모, 삼촌, 기타 등등까지 아이의 어른 보호자께서 하고 싶으신 말씀을 쓰는 란이다. 가정환경에 따라서 다양한 보호자가 쓰게 되시지만, 일반적으로 학부모님으로 통칭하겠다. 이 란은 각 가정에서 학부모님의 스타일을 쉽게 알아볼 수 있는 척도가 된다. 싸인만 하나 쿨하게 남겨져 있는 경우부터, 칸이 부족할 정도로 꽉 채워주시는 분까지 스펙트럼이 매우 넓다.

감사하다는 인사를 챙겨주시는 마음
부모님 말씀을 읽는 재미도 은근히 쏠쏠하다.

분명하게 구분해야 하는 것은 학부모님의 스타일을 알아볼 수 있다는 것에서 정보 해석을 끝내야 한다는 것이다. 학부모님께서 상세하고 정성 들여 칸을 작성해 주시든, 싸인만 해서 보내시든, 그것이 내가 학생들을 지도하는 것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 물론 더 정성을 들여서 작성해 주시는 분께는 그냥 읽고 넘어가기가 왠지 죄송해서 밑에 하트 하나를 그려 넣기는 한다.


아, 그리고 몇 년간 맑은 샘을 가정과 연계하여 써오며 발견한 제일 재미있는 점! 아이들의 글씨체와 학부모님의 글씨체가 무서울 정도로 일치한다는 것이다. 2010년도에 한 어머님께서 “아들의 글씨가 너무 악필이라 정말 고민이에요.”라고 적어서 보내주셨는데, 어머님 글씨하고 그 학생의 글씨가 너무 똑같아서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할지 잠깐 고민에 빠진 적이 있다.

물론 글씨가 일치하지 않을 때도 있다. 범인(?)은 아마도 아버님?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파트인 <선생님 말씀>이다. 선생님 말씀에 쓰는 내용은 학생들마다 조금씩 달라진다. 한 주 동안 생활을 하면서 학생들이 잘한 점이나 개선된 점, 학생이 보여주었던 인상적인 점을 쓴다. 너무 자주는 아니지만 아이들의 교실에서 생활할 때 고쳐주었으면 하는 점을 쓰기도 한다. 생활 공책에 고칠 점을 적으면 곧바로 그다음 주에 부모님께서 읽게 되시기 때문에, 가정에서 꼭 아셔야 하는 아이의 상황과 관련이 있을 때에만 쓰려고 하는 편이다. 너무 잦은 부정적인 피드백은 의도치 않은 불안과 긴장 상태를 만들 수 있으며, 교사가 학생을 계속 부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오해를 낳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굳이 이것을 칭찬해야지 기억해두지 않아도 선생님 말씀을 쓸 때가 되면 자연스레 떠오르는 경우가 많다.
Deep한 상담건이 있었던 주. 학생의 마음을 다독임과 동시에 교사가 변함없이 사랑으로 지켜보고 있음을 전해주기 위해.


월요일 오전의 일과는 항상 아이들의 맑은 샘을 걷은 뒤 선생님 말씀을 적는 것으로 시작한다. 예전에는 줄 없이 칸만 있는 공간이었는데 그러다 보니 너무 써야 할 양이 많아져서 작년부터는 일반 공책처럼 줄을 그은 양식을 사용하고 있다. 보통 4줄 정도로 마무리하지만 할 말이 조금 더 있을 때에는 5~6줄까지 빽빽하게 쓰곤 한다.


<선생님 말씀>은 아이들에게 보내는 편지와 같은 글이다. 직접 얼굴을 보고 말로 표현하기에는 조금 쑥스럽지만, 글로는 전할 수 있는 마음들이 있다. 그래서 선생님 말씀을 쓸 때에는 첫머리를 “사랑하는 OO”으로 시작하며, 마무리는 “사랑해”로 맺는다. 다 적고 나서 아이들에게 맑은 샘을 돌려줄 때, 아이들이 얼른 맑은 샘을 펴서 선생님 말씀부터 읽는 모습을 보는 건 나의 작은 행복이다. '그만큼 나의 글이 아이들에게 중요하고 궁금하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 쓰면서 힘들었던 기억은 사라지고 마음에 따뜻한 보람만 남는다.


보통 한 학급에 23~24명의 학생들이 있는데, 매주 맑은 샘을 걷어서 한 명 한 명에게 맞춤 이야기를 써 주는 것이 솔직히 쉬운 일은 아니다. 그날의 교과 전담 시간, 쉬는 시간, 중간 놀이 시간, 그 외의 시간을 총 동원해야 한다. (그래서 월요일에는 꼭 미술 시간을 배정한다. 아이들이 각자의 작품을 만드는 동안 짬을 내서 선생님 말씀을 쓸 수 있기 때문이다.) 쓰다 보면 팔과 손가락이 아프기도 하고, <맑은 샘> 검사를 위해 다른 일을 다 미루기 때문에 하루 스케줄이 매우 빡빡해진다.


하지만 한 번도 이것을 그만두어야겠다거나, 손이 아프니까 키보드로 두드리고 인쇄해서 뽑아야겠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나는 오로지 손글씨로만 전해지는, 시간을 많이 들여 천천히 쌓아 올라가는 아날로그의 방식만이 전할 수 있는 마음이 있다고 믿는다. 교사가 학생들에게 갖고 있는 사랑, 정성, 신뢰 같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늘 전해주고 싶은 이런 가치들을 아이들이 가장 쉽게 느낄 수 있게 해주는 나만의 방법이다.


교사가 아이들과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나의 경우에는 손글씨 쓰는 것을 좋아하고, 같은 내용이라도 편지로 쓸 때 할 말이 좀 더 술술 나오는 개인적인 성향을 반영하여 학급 경영 시 사용할 수 있는 아이디어로 발전시킨 것이다. 굳이 이런 형태가 아니더라도 각 학급의 담임 선생님들께서는 언제나 아이들과 소통할 수 있는 다양한 창구를 만들어서 실천하고 계실 것이다. <맑은 샘>은 그중 하나의 예일뿐, 가장 중요한 건 어떤 방식이든 아이들과 마음을 이어가려는 교사의 진심이라고 생각한다.


차곡차곡 채워지는 맑은 샘처럼 아이들도 조금씩 성장해나가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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