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너와 나를
J야, 이렇게 네 이름을 부르니까, 뭐랄까, 꼭 지금은 만나지 않지만, 어린 시절 친했던 친구를 부르는 것 같아 아련한 기분에 젖게 된다. 오늘이 금요일이니 내일과 모레는 휴일이다. 내게는 휴일인데 네게도 휴일인지는 모르겠구나.
오늘은 날씨가 흐리다. 일기예보에서는 내일부터 장맛비가 내릴 거라고 하는 것 같더라만, 오늘부터 벌써 비가 오려는 지 구름이 하늘에 가득하다. 이런 날은 네게는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지 않아서 더 좋은 날인지도 모르겠다. 너는 어떤 날을 좋아하니. 햇빛 쨍쨍한 날, 비 오는 날, 바람 부는 날, 흐린 날, 눈 오는 날. 나는 바람 부는 날을 좋아해. 바람이 옷깃을 날리고 머리카락을 날려 주는 날. 태양이 함께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아. 무조건 바람이 불면 좋더라. 손에 잡히지도 않고 잡을 수도 없지만, 바람은 저 혼자 자유롭잖아. 어디든 갈 수 있잖아. 부드럽게 나를 감싸 주고, 찬바람은 정신이 번쩍 들게 해 주고 상쾌한 기분을 선사하기도 하잖니.
바람 이야기를 하다 보니, 5월 어느 바람 부는 날 쓴 글을 너와 함께 하고 싶구나.
사람이 얼마나 외로운 존재인지, 힘들어서 어디로든 가고 싶은 데 갈 곳이 없고,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이야기를 할 사람이 없다. 답답한 마음에 갈 곳을 찾지만, 막상 문을 나서면 어디로 가야 할지, 갈 곳이 없다. 그저 집 주변을 걷는 것이 고작일 뿐.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어 속상하다고 힘들다고 말하고 싶지만, 누구에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내 얼굴에 침 뱉기 밖에 더 되는가. 할 수 있는 것은 글을 쓰는 것뿐.
바람이 분다. 바람이 머리카락을 날리고 옷자락을 날린다. 그래도 새들은 노래하고 꽃은 피어난다. 윤기 나는 검은 몸을 가진 제비가 참외를 펼쳐놓은 장사꾼의 천막 앞에서 바닥을 쪼아댄다. 깨진 참외의 살과 씨가 있을 것이다. 제비가 날아간다. 바람을 가르며 희디흰, 희어서 눈부신 배를 허공에 띄우며 날개를 파닥이 지도 않고 비행한다. 제비에게 바람은 자유다. 바람이 분다. 바람이 머리카락을 날리고 옷자락을 날린다. 그래도 새들은 노래하고 꽃은 피어난다. 윤기 나는 검은 몸을 가진 제비가 참외를 펼쳐놓은 장사꾼의 천막 앞에서 바닥을 쪼아댄다. 깨진 참외의 살과 씨가 있을 것이다. 제비가 날아간다. 바람을 가르며 희디흰, 희어서 눈부신 배를 허공에 띄우며 날개를 파닥이 지도 않고 비행한다. 제비에게 바람은 자유다.
거리에 서 있으면 바람이 데려가 줬으면, 어디든 상관없이 바람이 데려가 준다면 모든 것이 허망한 마음과 함께 바람의 등에 올라타고 앉아 세상을 구경했으면. 이런 날은 재래시장에 가서 늙고 주름진 손들이 고추 한 바가지, 오이 한 바구니, 참외 한 소쿠리를 팔기 위해, 싸고 싱싱한 고추 사세요, 아삭아삭한 오이 사세요. 한 바구니 삼천 원, 단돈 삼천 원, 달고 맛있는 참외 있어요. 외치는 간절한 기도를 들어야 하는데. 그 기도에 응답하듯 발걸음을 멈추는 파마머리 부스스한 채 아기를 등에 업은 가난한 새댁의 힘찬 목소리 들어야 하는데. 엄마 등에 업힌 아기가 통통한 팔을 내밀고 허공을 휘저으며 옹알거리는 은빛 희망을 들어야 하는데. 아니면 동물원에 가서 갇혀 있어서 불쌍하다고 제 마음대로 생각하는 나를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는, 원숭이, 호랑이, 곰, 사막여우 들을 만나, 세상에 갇혔는데도 울부짖지도 못하는 나를 측은한 눈으로 바라보는 그들의 고마운 마음에 눈물을 흘려야 하는데, 펑펑 울어야 하는데. 그도 안 되면 버스 정류장에서 제일 먼저 오는 버스를 타고 종점까지 가서, 종점에 도착한 줄도 모르는 나를 다 왔어요 하는 기사 아저씨의 말에 당황하여 후다닥 버스에서 내려 여기가 어딘지 가늠하면서 발길 닿는 대로 걷다 지치면 거리에 놓인 다리 한쪽 부러진 의자에 앉아 멍하니 사람들을 바라보다 걷다 걷다 지치면 길거리에 쓰러져 잠이 들면 좋으련만.
그러면 안 되는 일이어서 택시를 잡아타고 집으로 돌아가야겠지. 오직 집만이 온전한 내 휴식처가 아니겠는가. 오막살이 내 집이라도 내가 마음 놓고 쉴 수 있는 곳은 집뿐이지 않는가. 그것을 너무도 잘 알아서 서러운 바람 부는 날.
J야, 우리 가족이 완주에서 사는 것은 알고 있지. 이곳 완주로 내려온 지 벌써 6~7년 되는구나. 이곳에 아는 사람도 없고 직장 때문도 아닌, 그저 시골에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으로 내려왔어. 참 우습지. 수원에서 지내다 특별한 이유 없이 이렇게 시골로 내려오기가 그리 쉬운 일이 아니거든. 그렇지만 우리한테는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었어. 대도시에 사는 것은 나나 이모부에게는 고역이었거든. 공기도 탁하고 사람도 많고 뭐든 돈이 있어야 해결할 수 있는 일상들이 싫었단다. 그래서 뭐 크게 고민하지 않았지. 아이들도 아직 어려서 더더욱 결정하기 쉬웠어. 이곳에 내려온 것은 잘한 일이었어. 먹을거리도 신선하고 임대아파트에서 가난한 소비를 하면서 살 수 있었단다. 그런데 희가 중학교에 가고부터는 돈이 좀 들어가더라. 그전까지는 옷도 다른 아이가 입었던 옷을 받아 입었는데 그때부터는 옷도 제가 사고. 그러다 보니 둘째 호도 옷을 사 주게 되면서 돈이 필요했지.
나는 은행에 다녔던 경력을 살려 전북은행에 8일만 다니면서 나머지 날들은 도서관에 다니면서 공부하고 야간 대학원을 다니고 했는데, 너도 알다시피 교회를 서울로 계속 다녀야 했지. 이모부가 목회자였으니 뭐 할 말이 필요 없이 한 주도 거르지 않고 다녔어. 그렇지만 아이들은 자신들 의사에 맡겼어. 교회에 가고 싶으면 가고 안 가고 싶으면 집에 있고.
돈이란 것이 참으로 묘해서 많이 있으면 많이 쓰고 적으면 적은 대로 쓰게 되더라. 수원에서는 수입이 정말 적어서 아주 아주 적게 소비했는데, 이곳에서는 그래도 직장을 다니고 조금 더 수입이 늘어나니까 더 쓰더라고. 치킨, 피자도 시켜먹게 되고 외식도 가끔 하고. 옷도 한두 벌 사 입게 되고. 그전보다 훨씬 풍요를 누리며 살고 있다고, 그래서 나는 여전히 내 삶에 만족한단다.
이모부는 지금 정읍 이평면에서 농사를 짓고 있어. 약 200평 정도. 아주 넓지 않고 좋은데, 여기에서 거기까지 차를 타고 이동을 해야 해서 기름 값, 톨게이트 비용이 들어서 걱정은 하면서도 날마다 출퇴근을 하고 있단다. 이 무더위에도 이모부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어서 너무 행복하다고 하더라. 팔다리 얼굴 할 것 없이 새까맣게 타고, 점심도 내가 싸준 도시락을 먹어. 밥과 국과 김치가 전부인 도시락을 아침 겸 점심으로 먹으면서도, 땀을 비 오듯 흘리면서도 너무 좋아한단다.
사람마다 각자 좋아하는 일이 있어서 나 같으면 땡볕에서 그렇게 일하고 싶지는 않는데 말이야. 나는 자꾸 말하다시피, 여건만 된다면 도서관 사서를 하면서 책을 읽고 글을 쓰면서 살고 싶어. 내가 원하니 지난번 네게 말했듯이 언젠가는 이루어질 것이라 믿는다. 너도 네가 원하는 삶을 살기를 바라. 바람이 한 번쯤 너를 어딘가로 데려가 주기를 바랄게. 잘 지내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