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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이음 Feb 18. 2022

세시풍속

정월 대보름 달에 들키다

     정월 대보름, 음력 1월 15일이다. 오곡밥을 해 먹고, 부럼을 깨 먹고, 달집을 태우는 등 ‘정월 대보름’ 하면 떠오르는 일반적인 말들이다. 나는 오곡밥을 하지도 않았고 부럼을 깨 먹지도 않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평상시처럼 똑같이 보냈다. 


     내게 있어 ‘정월 대보름’은 찰밥을 훔쳐 먹고, 불깡통을 돌리는 날이다. 요즘은 어느 누구도 찰밥을 훔쳐 먹지 않고 불깡통을 돌리는 아이들도 찾아볼 수 없다. 정월 대보름을 기다리지 않고, 구정이 지나면 그날이 그날이 된다. 그나마 요행으로 마트 진열대에 늘어선 밤, 호두, 땅콩과 오곡밥을 지을 팥, 수수, 콩 등을 보고 정월 대보름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뿐이다.  


     찰밥을 훔쳐 먹는다고 했다. 어릴 적, 대보름날에는 장독대에 올려진 찰밥을 주인 몰래 가져다 먹었다. 오곡밥도 아닌 찰밥이었다. 모든 집에서는 찰밥을 해서 장독대에 올려 두고 집 안으로 들어가 누구든지 찰밥을 가져가기를 기다렸다. 찰밥을 가져가는 사람은 어린아이들부터 이십 대 청년들인데 어린애들은 새벽에 깨어 있기가 힘들어 대부분 초등학교 고학년에서 청년층이 찰밥을 가져다 먹었다. 


     15일 새벽, 집집마다 찰밥을 한다. 새벽 3~4시 즈음에는 고슬고슬한 찰밥을 김 한 장에 가득 넣어 주먹밥을 만들어 장독 위에 올려 둔다. 소쿠리에 넣어 올려 둔 찰밥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삼삼오오 몰려다니며 장독대에 수줍은 새색시처럼 다소곳이 앉아 있는 찰밥 덩어리를 들고 나온다. 인기척을 들은 어머니 들은 찰밥 몇 덩이를 더 건넨다. 따뜻한 찰밥을 동네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면서, 걸어 다니면서, 뛰어다니면서 우적우적 먹는다. 매서운 바람이 얼굴을 할퀴고 닳고 닳아서 보온이라고는 전혀 될 성싶지 않은, 외투 속으로 들어와 찬 기운을 등허리에 쏟아내도 호기로움과 기쁨을 멈추게 할 수는 없다. 


     찰밥 서리 이전에는 불깡통을 돌린다. 깡통을 돌리려면 먼저 깡통을 준비해야 한다. 깡통 준비는 보름날이 오기 며칠 전부터 준비한다. 흔치 않은 깡통을 찾기 위해 온 동네를 구석구석 휘젓고 다니면서 복숭아 깡통, 분유 깡통 따위를 찾아낸다. 복숭아 깡통보다는 분유 깡통을 찾은 사람이 더 뿌듯한 기분을 갖는다. 분유 깡통의 크기가 넓고 깊어서 한 번에 많은 나무를 넣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린아이들은 분유 깡통을 가질 수 없다. 깡통을 돌릴 힘이 없어서 누나나 형들의 몫이 되는 것이다. 


     깡통이 준비되면 깡통에 칼집이나 구멍을 뚫어야 한다. 쉽지 않은 일이다. 위험하기도 하다. 작은 깡통은 구멍을 내고, 큰 깡통은 칼집을 낸다. 구멍은 못을 사용하는데, 못을 대고 큰 돌로 탕탕 두드린다. 망치는 귀한 연장이어서 아이들이 쓸 수 없다. 큰 깡통에는 깡통 둘레에 빙 둘러 칼집을 낸다. 못 쓰는 칼 끝을 깡통 면에 대고 돌로 치면서 칼날이 내려가면서 길게 찢어지게 만드는 것이다. 사이가 너무 벌어지면 나무토막들이 빠져나가기 때문에 적당한 크기로 찢는 것이 중요하다. 깡통의 몸통이 완성되면 철사로 긴 줄을 단다. 깡통의 한쪽과 다른 쪽 위에 구멍을 내어 철사를 둥글게 연결하는데, 여기서도 길이가 적당해야 한다. 너무 길면 힘이 많이 들고 그렇다고 너무 짧으면 깡통을 돌리는 사람에게 불똥이 튈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깡통이 완성되면 깡통에 넣을 나무토막을 주워 모은다. 나무토막은 쉽게 구할 수 있다. 깡통에 넣을 수 있는 크기로 나무를 토막 내주는데, 땔감으로 쓰는 마른 소나무가 거의 대부분이다.  두툼하지 않고 날씬해서 불이 잘 붙는 소나무를 사용하는 것이 좋다. 


    자, 이제 깡통을 돌려보자. 동네 가운데에 있는 꽁꽁 얼어붙은 논에서 깡통 속에 작은 나무토막을 집어넣고 솔잎에 불을 붙여 열심히, 젖 먹던 힘을 보태 깡통을 돌리면, 바람에 힘입은 나무토막에 불이 붙는다. 깡통 속은 금세 벌겋게 타는 나무토막으로 가득해진다. 쉭쉭 소리를 내면서 돌아가는 깡통. 세차게 쉬지 않고 깡통을 돌리지 않으면 쉽게 불이 붙지 않는다. 힘에 부치는 어린애들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다. 애를 먹는 어린 동생들을 대신해 깡통을 돌려 불을 붙여준다.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이미 불이 붙어 벌겋게 달아오른 깡통 속 나무토막을 함께 넣어 온 힘을 다해 깡통을 돌린다. 결코 불붙지 않을 것 같던, 불이 일어나지 않을 것 같던 깡통에도 어느덧 불이 붙어 공중에서 원을 그리며 쉭쉭 돌아간다. 둥근 보름달 아래에서 둥글게 돌아가는 불깡통은 달 주위를 감싸는 달무리가 되고, 달과 사람과 달무리가 혼연일체가 된다. 


     숯불이 남은 깡통 속에는 설날 먹고 남은 가래떡이나 쑥떡을 넣는다. 야들야들하게 구워진 가래떡과 쑥떡을 입 안에 넣으면 고소하게 번지는 떡 맛이 일품이다. 추위를 잊은 지는 이미 오래이다. 콧물을 훌쩍이면서 손과 입 주위가 새까매지는 것도 아랑곳없다. 애당초 신경 쓸 필요조차 없다. 초저녁부터 시작하여 새벽까지 이어지는 깡통 돌리기는 한 명 두 명 집으로 돌아가지만, 큰 아이들은 출출한 배 속을 찰밥 서리를 통해 채운 후 다시 깡통에 나무토막을 넣고 돌리면서 마지막을 향해 나아간다. 깡통 속의 불씨들이 하나 둘 꺼지고, 살아 있는 불씨는 논 속에서 푸시시 꺼져 들어가고 정월 대보름날이 보름달과 함께 이울어간다.


     그때가 언제였을까. 내가 중학교 1학년쯤이었을까. 정월 대보름을 며칠 앞두고, 며칠 전부터 밤이 되면 동네에 불이 났다. 다행히 집에 불이 나는 것은 아니었다. 그 시절에는 볏짚이 땔감이었는데, 벼를 베어서 탈곡한 후 볏짚을 일일이 한 아름씩 가지런히 묶어 볏짚을 쌓았다. 쌓아 논 볏짚은 마당으로 옮겨져 비닐로 잘 덮어두고, 두고두고 우리의 방을 따뜻하게 해주는 땔감이 되었다. 그 볏짚에 누군가 불을 내고 달아났지만, 동네 사람들은 금세 불길을 잡아 큰 불로 번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오늘 밤에도 불이 나려나 하면 여지없이 비슷한 시간에 ‘불이여!’하는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사나흘 내리 불이 났지만, 누가 불을 내는지는 오리무중이었다. 


     나는 보았다. 뒷 부엌문을 열고 나무 울타리 너머 건조장에서 어떤 아이가 체조를 하듯 몸을 풀었다. 팔을 올렸다 내리고 제자리에서 달리기를 한참 동안 열심히 했다. 나도 모르게 그 아이의 행동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가만히 오래도록, 추위도 잊고 그냥. 한참 운동을 하던 아이가 움직임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는 몸을 돌려 달려갔다. 아이가 갔던 곳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곧이어 “불이여!”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날 밤 아이는 동네 사람들에게 잡혔다. 


    동네 어른들에게 꾸중을 듣고 다시는 그런 일을 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고 일은 마무리되었다. 아이에게는 엄마가 없었다. 없는 게 아니라 엄마와 살지 못했다. 아빠가 노름을 하고 노름돈을 내놓으라고 엄마를 때리는 일이 반복되자 엄마가 아들 형제만 두고 집을 나가 버렸던 것이다. 우리 집과는 인척 간이었다. 형은 공부도 잘하고 수줍음이 많고 내성적인 성격을 가졌고, 동생은 개구쟁이에다 호전적이었다. 불은 낸 아이는 동생이었다. 어린 나이에 엄마의 보살핌 없이 늙은 할머니와 형의 보살핌만으로는 마음의 구멍을 메울 수 없었던 싶다. 지금 형은 내 친구와 결혼하여 어머니를 모시고 세 아이들의 아빠가 되어 잘 살고 있고, 동생은 직업군인이라고 한다. 


     설날이 지나고 정월 대보름이 다가오면, 깡통을 준비해서 불깡통을 돌리던 기억과 장독대에 올려 두었던 찰밥과 며칠을 불을 냈던 아이와 운동을 하던 그 아이를 보고 ‘불을 낸 사람은 저 아이다’하고 직감했던 그때의 내가 생각난다. 


     지금은 아무도 불깡통을 돌리지 않고, 찰밥을 장독대에 놓아두지 않고 불이 붙을 볏짚도 없다. 지금 아이들은 불깡통을 준비하기 위해 깡통을 찾고 구멍을 내는 설렘과 기쁨을 알지 못한다. 오로지 공부를 위해 학원을 다니거나 방 안에서 컴퓨터 게임이나 손 안의 기계에 푹 빠져 가상의 세계에서 가짜 경험을 할 뿐이다. 몸을 써서 움직이고 불을 피워보고 달빛 아래서 자연과 하나가 되는, 진짜 살아 있다는 경험을 하지 않는다. 불행하고 슬픈 일이다. 


     나도 점점 잃어간다. 정월 대보름날을 잊은 채, 무엇이 그리 바쁜지 앞만 보고 달려간다. 삶의 여유는 찾아볼 길 없이 무엇을 쫓아가는 줄도 모르고 쫓아가고, 쫓겨 다닌다. 나를 끌고 가는 것은 무엇일까. 내 곁에서 사라져 가고 잊혀 가는 것들이 나를 끌고 가는 것은 아닐까. 그 옛날 살아 있음을 경험했던 힘으로 나는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정월 대보름, 달이 나를 압도한다. 달이 타오르고 달 속이 뜨겁다. 맹렬히 타오르던 불씨가 달을 삼키고 빛으로 흘러내린다. 달빛이 환하다. 정월 대보름 달이 세상을 고루 비춘다. 판잣집에도 고층 빌딩에도 가난한 이의 잠든 얼굴에도 주름지고 야윈 어깨에도 번들번들 윤기 나는 이마에도 병든 할머니와 손녀의 단칸방에도 넓디넓은 침대 위 비단 이불 위에서, 대보름 달이 세상을 어루만진다. 너와 나와 우리의 가슴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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