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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집사 김과장 Jun 06. 2024

Old Town

리장

  

윈난성은 중국의 56개 민족 중 절반에 해당하는 25개 민족이 모여 사는 지역이며, 고립된 지리적 조건 때문에 다양한 인문환경을 보존하고 있는 지역이다.

히말라야 산맥 끝자락에 매달린 험준한 지형은 인간의 접근을 불허했기에 천혜의 비경이라 할 수 있는 곳이 수도 없이 많으며, 심지어 아직까지도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미답의 지역이 남아있는 곳이기도 하다.

국내에는 약 20년 전부터 여행자들의 입소문을 타고 유명해졌으며, 다큐멘터리 <차마고도> 방영 이후 사람들의 관심이 폭증했다.

성도(省都)인 쿤밍(昆明)으로 접근하면 <천룡팔부>의 고장인 따리고성을 지나 리장, 호도협을 거쳐 샹그릴라까지 이어지는 루트가 공식처럼 존재하기에 1주일 정도의 시간을 낼 수 있다면 어떻게든 다녀오는 게 가능한, 다채로운 경험을 할 수 있는 코스로 예전부터 인기가 높았다.

중국이지만 중국 같지 않은 곳, 이국적인 풍광과 소수민족들의 다채로운 삶의 방식은 여행자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중국 내에서도 다르지 않아서, 윈난성, 특히 리장고성은 '중국인이 가장 가고 싶은 여행지' 순위 상위권을 놓치지 않고 있다.


내 여정의 핵심 역시 리장(丽江)이었다.

리장고성은 1997년에 고성 전체가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될 만큼 역사적 가치가 높은데, 그보다는 <센과 치히로의 행발불명>의 모티프가 된 도시로 유명했다.

애니메이션에 등장한 홍등(紅燈)이 걸린 고풍스러운 목조건물로 된 화려한 온천장은 상상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리는 흥겨운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리장고성의 야경을 처음 봤을 때 애니메이션을 떠올리게 되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는데, 그 흥겨운 분위기가 그대로 느껴지는 듯했기 때문이다.

당시 호사가들은 리장과 타이완의 지우펀(九份)을 두고 '여기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무대가 된 곳이다'라고 갑론을박을 벌였는데, 사실 쓸데없는 짓이었다.

작품의 프로듀서인 스즈키 토시오는 인터뷰를 통해 "미야자키 하야오와 에히메현의 도고 온천에서 묵었던 기억이 반영됐다"라고 밝힌 바 있다.

좌우간, 리장고성은 긴 여행에 지친 내게 활력을 되찾아줄 즐거운 여행지가 될 거라고 기대하고 있었다.







대부분 쿤밍에서 따리를 거쳐 리장으로 들어가지만, 나는 청두에서 가야 했기에 어쩔 수 없이 다시 판즈화 루트를 타야 했다.

구불구불한 산길을 타고 다시 윈난성으로 향하는 길은 온통 시뻘건 적토(赤土)였다.

붉은 흙은 활활 타오르는 생명의 불꽃인 듯했지만, 도로는 말도 못 하게 고역이었다.

포장 상태는 나쁘지 않았지만 터널을 뚫지 않고 산자락을 따라 길을 냈기에 버스가 수시로 큰 폭으로 굽이돌아야 했고, 사람들은 좌석의 손잡이에 매달려 새하얗게 질려갔다.

정오 경 출발한 버스는 해질 무렵 이름도 모를 산골짜기 어딘가에서 결국 퍼져버렸다.

기사는 툴툴거리면서 공구를 들고 버스 밑으로 기어들어가 한참을 낑낑거렸고, 버스는 신기하게도 다시 움직였다.

하지만 이후 30분에 한 번 꼴로 문제가 생겨 차가 멈췄고, 그때마다 기사는 버스 밑으로 다시 기어들어가야 했다.

저녁도 거른 채 산길을 달리기를 몇 시간, 시계는 어느새 밤 11시를 지나고 있었다.

산 꼭대기에 가까운 깜깜한 능선을 달리던 버스 창 밖으로 갑자기 환한 불빛이 들어왔다.

움푹 파인 분지 전체가 주황의 불빛으로 넘실거리고 있었다. 리장이었다.



리장고성. 2003.


터미널에 내렸을 때는 파김치가 된 상태였지만, 고성의 화려함은 피로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인상적이었다.

아무리 여행자가 많은 도시라지만 이렇게 번화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거미줄처럼 복잡한 고성의 골목에는 집집마다 붉은색의 따뜻한 등불이 걸려 있었고, 평일 자정이 가까운 시간이지만 고성의 중심인 쓰팡지에(四方街)에는 사람이 가득했다.

지금은 사람이 많아도 너무나 많아서 골목의 풍광이 눈에 들어오지 않지만, 당시만 해도 사람과 풍경이 적당히 어우러진 따뜻한 느낌 물씬 풍기는 곳이었다


당시 론니 플래닛은 리장을 "지도 없이 길을 잃고 헤매는 것으로도 충분한 곳"으로 표현했다.

꽤나 낭만적인 문구였지만 실상은 달랐는데, 초행길이라면 아무리 지도를 들여다봐도 길을 찾을 수 없는 곳이 리장고성이었다.

자정이 가까워 오는 시간에 가이드북에서 점찍어 놨던 호텔을 찾을 방법은 요원했고, 적당히 보이는 객잔으로 기어 들어가 도미토리 침대 한 칸을 차지하고 쓰러져버렸다.




리장은 중국 관광산업에서 대단히 중요한 고장이다.
중국을 찾은 배낭여행자들은 가장 중국다운 정취를 간직한 리장의 ‘올드 타운’에 열광했다.
20년 전의 리장은 중국인보다 외국인이 더 많은 여행지였는데, 중국 여유국(旅游局)은 리장의 성공 사례에 주목한 게 틀림없었다.
2000년대 초반부터 중국 각지의 지자체는 리장 모델을 충실하게 카피했다.
올드 타운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리장처럼 꾸몄다.
샹그릴라와 쑹판을 지나면서 봤던, 고성 중심가를 모조리 헤집어놓은 공사 현장이 바로 그것이었다.
전 중국의 고성은 목조 건물과 붉은 등불, 화려하게 조성한 야경과 지우빠(酒吧)를 채워 넣었고, 이는 중국 각지 '고성(古城)'의 몰개성화를 야기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리장은 1000년 세월을 버텨온 '진짜' 올드 타운 덕분에 여전히 매력적인 도시로 남았다.






리장. 2003.


리장. 2023.



리장에서는 라싸에서 그랬듯, 작정하고 늘어져 쉬어갈 생각이었다.

낮에는 정겨운 골목을 거닐고, 저녁에는 노천카페에서 맥주 한 잔을 걸치며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하지만 어이없게도 11월 초의 리장에는 사람이 없었다.

묵었던 객잔의 8인실 도미토리는 5일간 오롯이 내가 독차지했다.  

이틀 정도는 고성 구경에 시간 가는 줄 몰랐지만, 사흘째가 되자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고성은 붉은색 등불 아래 야한 기운이 넘실거렸고, 그 황홀한 마을에 덩그러니 놓인 내 모습은 당황스러웠다.

리장은 절대로 혼자 있을 곳이 아니었다.


화려한 고성에서 따분한 시간에 지쳐갈 때쯤, 쓰팡지에를 지나다가 '나시고악(納西古樂)'이라 쓰인 공연 팸플릿을 보게 됐다.



'1000년 전 원형 그대로의 전통 음악'



이 문구가 나를 사로잡았다.

팸플릿에서는 '나시고악은 당, 송대 한족의 전통 음률에서 기원한다'라고 나와 있었다.

명 태조 주원장이 운남 지방을 정벌하면서 중원의 음악이 리장에 전해졌고, 지형적인 특성상 험한 산들로 주변과 격리되어 있는 리장에서는 당시의 음악이 외부의 영향을 받지 않아 큰 변화 없이 원래의 모습 그대로 지금까지 전수됐.

그러나 전문적인 교육기관 없이 구전과 사제 전승으로 파편화되어 이어진 음악이었는데, 1990년대에 '쉔커(宣科, 1930~2023)라는 천재가 나타나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현재의 나시고악으로 정립했다.  

문화혁명 당시에는 사람들이 악기들을 땅에 묻어 지켜냈다고 하니, 그네들의 노고 덕에 오늘 이 음악을 듣는 관객의 입장에서는 감사할 따름이었다.







공연시간이 가까워 오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당시 중국 사람들의 문화 수준과 시민의식은 민망한 수준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악단의 막내로 보이는 아가씨가 무대 세팅을 최종 점검하고 있는 사이, 숨이 막힐 정도로 살이 찐 남자 셋이 무대에 올라가더니 징그러운 웃음을 지어가며 악기를 집어 들고 기념 촬영을 했다.


"하지 마세요!"  


뒤늦게 발견한 연주자가 날카롭게 소리 질렀지만, 남자들은 여유만만했다.


"알았어, 한 장만 더 찍고"  


결국 남자 단원들이 이들을 말리려 달려왔고, 남자들은 황급히 사진을 한 장 더 찍더니 악기를 내동댕이 치고 무대에서 내려갔다.

자리에 낮은 남자들은 거만하게 다리를 꼬고 앉아서는 담배를 꼬나물고 가가대소했다.

주변 사람들은 아무 말도 없었으며, 시선을 마주치려고도 하지 않았다.

연주자들은 표정이 엉망이 된 채로 다시 무대를 세팅했다.


소란스러운 와중에 연주자들이 입장했고, 사회자가 나와 연주회의 시작을 알렸다.

나시고악의 기원과 현재에 대한 설명이 이어지는 가운데, 아까 그 남자들이 다시 무대 앞에 서서는 연주자들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무개념과 뻔뻔함도 이 정도면 박수를 쳐 줄만 했다.

기가 막혀서 말도 안 나올 지경이었는데, 다른 관객들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긴 했어도 잠자코 보고만 있었다.

당황한 표정이 역력한 해설자는 서둘러 해설을 마쳤고 참으로 힘겹게 연주가 시작됐다.

남자들의 무례함이 시발점이었는지, 연주가 시작되자 다른 관객들도 앞다퉈 무대 앞으로 몰려들어 사진을 찍어댔다.

그리고 객석에 앉은 관객들은 그들에게 시야가 가린다며 소리를 질러댔다.

무례함과 무례함이 싸우는 소리에 음악은 소음으로 변했다.

자연 머리끝까지 뿔이 돋았고, '중국은 아직 멀었다'는 생각이 다시 한번 머리에 각인됐다.

장장 10분에 이르는 긴 첫 곡이 아수라장 속에서 간신히 마무리됐다.

사진 찍을 걸 다 찍었는지 중국인들도 자리에 앉기 시작했다.

이후에 이어지는 곡들은 마음을 편하게 만드는 잔잔하고 아름다운 선율을 이어갔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저절로 눈이 감기고 마음이 편안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이 음악들은 도교의 음악에서 유래한 지라 내포하고 있는 의미가 있습니다. 하여 귀가 아닌 마음으로 들었을 때, 그 진수를 느낄 수 있습니다. 현재 후학 양성에 힘쓰고는 있지만 이런 이유 때문에 어느 정도의 연륜이 쌓이기 전에는 같은 음 하나에도 그 느낌을 담아낼 수가 없어 쉽사리 전수가 안됩니다."   



아닌 게 아니라 악단의 몇 명을 제외하면 대부분 70~80대로 보이는 노인들이었다.



"사람들이 흔히 우리 악단을 '3古악단'이라 부릅니다. 오래된 음악, 오래된 악기, 그리고 오래된 연주자들이 있기 때문이지요. 앞서 설명드린 나시고악의 특성이기도 하지만, 이분들을 보시면 굉장히 진지하고 엄숙하게 음악을 대한다는 걸 아실 수 있을 겁니다. 우리들은 음악을 "신과의 대화"로 여겨 편곡이나 개사를 금기시합니다. 그리고 그 음악에 내포된 의미를 이해하고 그것들을 음을 통해 표현해 내기 위해선 오랜 기간의 연습과 연륜이 필요하고요. 무대의 윗쪽을 보시면 사진이 여러 장 걸려 있습니다. 이 분들은 이미 세상을 떠나신 악단의 원로들이십니다. 우리는 매년 한 두 분의 연주자들을 잃고 있습니다. 하여 리장에 '나시고악연구회'를 세워 후학 양성에 힘쓰고는 있지만, 말씀드린 특성상 쉽지가 않은 형편이지요"



전통의 소중함을 잘 알고 그걸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이네들의 모습이 아름다웠다.

덜떨어진 무뢰배들만 아니었으면 정말 좋은 시간이었을 테다.



당시만 해도 중국인의 시민의식은 개선 불가능할 듯했다.
그러나 20년이 흐른 후, 다시 찾은 중국은 분명히 바뀌어 있었다.
특히 20~30대 젊은 층의 시민의식은 놀라울 정도였다.
여행지에서 만난 젊은이들은 타인을 배려할 줄 알았고, 자신감이 넘쳤으며, 당당했다.
과거 '중국은 이래서 안돼'라고 자조하던 홍콩 아가씨 샤오장의 모습이 스쳐 지나가면서, 20년의 시간은 중국인에게도 충분한 시간이었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반면 화산(华山)에서 만난 단체 관광객들과 장년의 여행자들은 무례함과 몰상식으로 일관했는데, 차라리 그들이 반가울 정도로 중국인의 시민의식은 분명히 개선되고 있었다.
이 변화가 반가우면서도 아쉬운 건, 아마도 내 어린 시절의 기억이 이젠 퇴색되어 간다는 아쉬움 때문이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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