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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집사 김과장 Jun 08. 2024

세계에서 가장 깊은 협곡

호도협




호도협 虎跳峡. 


서쪽의 하바설산(哈巴雪山)과 동쪽의 옥룡설산(玉龍雪山) 사이의 절벽이 만들어낸 협곡이다.

폭이 좁아 호랑이가 협곡을 뛰어넘어 다녔다는 전설이 있다. 

16km에 달하는 완만한 산길을 걷는 내내 옥룡설산의 절경이 따라오는 기가 막힌 트레킹 코스다. 

‘세계 3대 트레킹 코스’, ‘세계에서 가장 깊은 협곡’ 등의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물론 사실인지는 알 수 없다. 

호도협 트레킹은 옥룡설산의 주봉을 바라보며 하바설산 중턱의 완만한 산길을 걷는데, 설산 꼭대기가 바로 눈앞에 있어서 다른 어디서도 보기 어려운 장관을 빚어낸다. 

코스 초입의 ‘28밴드’를 제외하면 힘들지 않게 걸을 수 있다. 

... 하지만 28밴드는 '여기가 지옥이다'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게 만든다. 

20년 전부터 중국 여행객들 사이에서 ‘꼭 가봐야 할 여행지’로 회자된 곳이며, EBS <차마고도> 다큐멘터리 방영 이후 한국 여행객이 폭증했었다. 

현지에서 만난 중국인들이 “한국사람은 왜 이렇게 호도협을 좋아하나?”라고 물어본 일도 있었다. 






지금도, 당시에도 리장에 갔으면 호도협까지 다녀오는 게 '국룰'이었다. 

호도협으로 향하는 미니 버스에는 80L급 배낭을 꽉 채운 백인 트레커 커플과 이국적인 외모의 중국인 커플, 그리고 뭔가 기분 나쁜 눈매의 중년 남자 둘이 탔다. 

정시에 출발한 버스는 야트막한 산길을 타고 달렸다. 

창밖으로는 내내 옥룡설산이 함께 달린다. 

건기인 리장의 가을 날씨는 환상적이었다. 

단풍은 이미 사라졌지만 하늘은 청명했고, 달력의 '11'자가 무색하게 포근했다. 

이어폰을 꽂고 멍하니 창밖 풍경을 감상하다가 배터리가 다 돼서 CDP를 정비하려고 이어폰을 뺐더니, 운전기사가 눈매 사나운 중년 남자들에게 일장 연설을 하고 있었다. 



"모택동은 개뿔! 공산당이 하는 게 뭐야? 문화대혁명 때문에 이 나라가 어떻게 됐어? 중국 경제가 왜 이모양이 됐는데? 개혁개방의 효과가 있긴 있나? 남한과 북한의 경제력 차이만 봐도 공산주의가..."



다시 생각해 보니 중국 땅에서 입에 올리기에는 모골이 송연한 내용이었는데, 운전기사는 30분가량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열변을 토했다. 

중국의 라오바이싱(老百姓, 일반인)이 맞는 걸까? 

문화대혁명 때 하방(下放, 일종의 유배)된 지식인이 여전히 그곳에서 운전대를 잡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남자의 논리는 날이 서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검문소에 등기를 하기 위해 기사가 차에서 내리자 내내 허허 웃어가며 연설을 듣던 남자들이 한숨을 쉬었다. 


  

"하여간 못 사는 사람들은 공산당 싫어한다니까"  



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 대사였다. 

모두가 평등하게 잘 사는 사회를 꿈꿨던 공산주의 이념은 20세기의 지난한 실험을 통해 실패를 증명했다. 

하지만 중국식 공산주의는 공산당의 비호 아래 권력과 재물을 가진 자의 편이 되는 기형으로 진화해 버렸다. 

덩샤오핑의 흑묘백묘론(黑貓白貓論,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부자가 되라는 뜻으로 곡해되기 십상이었고, 중국인의 전통적인 꽌시(关系) 관념은 부정부패의 지름길이 됐다. 

그 모순의 현장을 목도하니 목 안쪽이 깔깔해졌다. 

신장 위구르 자치구와 티베트 장족 자치구를 지나, 윈난성과 쓰촨성의 오지를 돌아 나오면서 중국의 기가 막힌 빈부격차에 아연실색했다. 

시골 사람들은 그렇게 사는 게 당연하다고 여기고 있었고, 도시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더 잘 살 수 있는지 치열하게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과연 중국인들은 변질된 건국이념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나시객잔. 2023.



버스는 오전 10시 반에 호도협 트레킹의 관문인 치아토우에 도착했다. 

코스의 중간지점이자 1박 2일 트레킹의 숙박지로 찍은 중도객잔(中途客栈, 하프웨이 게스트하우스)까지는 28 밴드를 지나 7시간 넘게 걸어야 하는 난코스였기에 자연 발걸음이 바빠졌다.

사람들이 주로 묵는 차마객잔을 건너뛴 이유는 중도객잔에서 묵어야 옥룡설산의 주봉을 바로 눈앞에서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두 시간 정도 끊임없이 이어지는 지루하고 힘든 오르막길을 올라 본격적인 트레킹의 시작점인 나시객잔에 닿았다. 

점심 식사를 주문하고 숨을 고르고 있었더니, 나와 함께 미니 버스를 타고 온 이들이 줄줄이 객잔으로 들어섰다. 


이국적인 외모의 중국 커플은 모소족(摩梭族) 여자와 베이징에서 온 남자였다. 

상당한 미인이었던 모소족 아가씨는 시종일관 남자친구에게 매달려 애교를 부리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그 모습을 보니 어색함을 감출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모소족은 여전히 모계사회의 전통을 이어가는 부족으로 유명했기 때문이다. 

이들의 결혼 풍습은 주혼(走婚)이라고 하는데, 남녀가 서로 마음에 들면 남자가 밤에 여자의 방에 찾아가는 걸로 끝난다. 

사실상 남자의 역할은 '씨내리'에 그친다고 봐도 무방했다. 

가족의 가장은 연장자인 여성(보통 할머니)이며, 집안의 남자 어른은 가장인 여성의 남자 형제가 맡는다. 

아이들의 아버지는 자기의 본가에서 살아간다. 

2004년 겨울에 모소족의 고장인 루구후(泸沽湖)에 다녀온 적이 있었는데, 당시 묵었던 모소족 민박의 가족 형태가 정확이 그랬다.

그러니, 그런 모소족 처녀가 남자친구에게 매달려 있는 모습은 내 상식을 뒤집는 모습이었다. 


백인 트레커들은 벨기에에서 온 커플이었다. 

건장한 체구 덕분에 배낭이 적당한 크기로 보였었는데, 내려놓은 배낭 옆을 지나다가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힘들지 않아?"


걱정되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해서 실례를 무릅쓰고 물었다. 


"글쎄, 28밴드가 힘들다고는 들었는데, 어차피 짊어지고 가야 할 짐이라서"


안타깝게도 벨기에 청년은 트레킹의 종착지인 티나 게스트하우스에서 결국 완전히 퍼진 모습으로 나와 재회하게 된다. 






점심을 다 먹고 길을 나서는데 나시객잔의 주인이 나를 불러 세웠다. 


"이거 전에 왔던 한국사람이 만든 거야. 가져가면 도움이 될 거야"


객잔 주인이 건넨 건 한글이 병기된 호도협 지도였다. 

어차피 외길이긴 하지만, 친절하게 화살표와 각 포인트의 한글 명칭이 표기된 지도를 보니 반가웠다. 

지도를 건네며 싱긋 웃는 객잔 주인의 미소가 참 따뜻했다. 

여행 중 만난 많은 사람 중 인연으로 남은 건 결국 따뜻한 사람이었다. 

아마도 내 심력을 갉아먹는 이기적이고 불쾌한 사람들에게 지쳐갈 때쯤 그런 인연들을 만났기에 여행을 계속할 수 있었던 것도 같다. 

좌우간 그 넉넉한 미소에 힘을 얻어 길을 나섰다. 



28밴드. 2023년. 초행인 아내는 힘든 기색도 없이 산을 탔다.


28밴드는 익히 들은 대로 험악한 코스였다. 

급경사의 가파른 산길을 28번(중간에 만난 현지인 포터 하나가 원래는 32개라며 웃었다)을 지그재그로 꺾어 올라가야 하는데, 짧은 구간에 고도를 급격하게 높이기 때문에 체력적으로 굉장히 힘든 구간이었다. 

사진을 찍겠다는 일념으로 카메라에 삼각대까지 챙겨갔던 터였다.

28밴드 중간에서는 삼각대를 절벽 아래로 던져버리고 싶은 충동을 애써 억눌러야 했다. 

게다가 11월의 산 공기는 차가울 거라 예상하고 내복을 입고 간 탓에 온몸에 땀이 차 움직임이 불편했다. 

짜증이 머리끝까지 차올라 호도협의 아름다움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던 차에, 벨기에 커플이 나를 앞질렀다. 

내 비루한 체력에 절망하며 억지로 걸음을 뗐다. 

1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 평생 욕한 숫자보다 더 많이 육두문자를 뱉은 듯했다. 

어느 순간 시야를 가로막던 오르막이 보이질 않아 고개를 쳐드니 눈앞에는 옥룡설산이 웅장한 자태를 뽐내며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좌)28밴드 정상, (우)옥룡설산 주봉


그리고 그곳에서 고용인을 기다리던 포터 하나가 '축하한다'는 말과 함께 싱긋 웃었다. 

넓게 트인 시야에 쏟아지는 옥룡설산은 풍경은 과연 장관이었다. 

'세계에서 가장 깊은 협곡'이라는 말은 빈말이 아닌 듯, 내 눈 바로 앞에 옥룡설산의 주봉이 따라왔다. 

남자의 거친 근육 같은 웅장한 산봉우리가 시시각각 모습을 바꾸는 풍광은 장관이라는 표현이 아깝지 않았다. 

28밴드를 지난 이후 중도객잔까지 가는 길은 능선을 따라 걷는 평지라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걸었다. 


그러나 중도객잔에 닿기 직전 난관에 부딪혔다. 

마을로 들어서는 좁은 길목에 들어서자 마을 쪽에서 고삐 풀린 황소 한 마리가 하얀 콧김을 내뿜으며 달려들었다. 

나 혼자 있었으면 사달이 났을 듯한데, 거구의 벨기에 트레커를 본 황소는 당황한 눈빛으로 멈춰 섰다.  

숨소리는 거칠었고, 침을 질질 흘리고 있는 모습이 몹시 흥분한 것 같았다. 

우회할 수 있는 길은 없었던지라 바짝 긴장한 채 놈과 대치했다.  

놈은 돌연 길 옆에 쌓여있던 풀더미를 들이받더니 뿔을 비벼댔다. 

보아하니 머리에 씐 고삐가 불편한 모양인데, 가서 긁어 줄 수도 없는 난감한 상황이었다. 

다행히 잠시 대치하고 있자니 뒤에 오던 사람들이 속속 도착했고, 인원이 10명 정도로 불어나자 황소는 움찔하더니 이내 얌전해졌다. 


"다구리 앞에 장사 없다"


는 말은 사실이었다. 

얌전해진 놈의 옆을 조심스럽게 지나고 나니 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황소 같았던 벨기에 트레커



중도객잔에 도착하니 과연 옥룡설산의 산봉우리가 손에 닿을 듯 가까이 보였다. 

길에서 만났던 트레커들은 대부분 차마객잔을 건너뛰고 중도객잔으로 기어들었다. 

한나절 길에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얼굴을 익힌 이들은 자연스레 맥주 한 병씩 손에 들고 객잔의 식당으로 모여들었다. 

영어와 중국어가 번갈아 튀어나오는 혼란한 와중에도 신기하게도 대화가 이어졌고, 옥룡설산의 풍광을 안주 삼아 밤이 깊어 갔다. 




중도객잔. 2023.






신사와 중국인



호도협에서 돌아온 다음날 아침 눈을 뜨니 온몸이 비명을 질러댔다.

몸을 추슬러야 다음 행선지로 넘어갈 수 있을 듯해 하루는 푹 쉬기로 했다.

마침 내가 묵던 숙소는 리장고성 내에서도 고지대에 있었던지라, 옥상의 선베드에 누우면 옥룡설산을 바라볼 수 있는 기막힌 곳이었다.

조금 늦은 점심을 먹은 후 라싸에서 다른 여행자와 교환한 책 <Seven years in Tibet 티베트에서의 7년>을 들고 옥상에 올랐다.  

느긋하게 오후 햇살을 받으며 커피 한 잔 끓여 마시며 책을 읽고 있으니 웬 금발의 중년 남자가 옥상으로 올라왔다.

내 옆자리의 선베드에 늘어진 그는 잠시 눈을 감고 햇빛을 음미하더니 한숨을 한번 내쉰 후 눈을 뜨곤 나를 바라봤다.



"티베트에 갔었나요?"



내가 읽고 있던 책을 보더니 묻는다.

그의 이름은 '크리스'였고, 영국인이었다.

큰 키에 조금 마른 체형, 구부정한 어깨를 한 남자였다.

금테 안경 너머로 보이는 눈빛은 부드러웠으며, 영국 악센트가 느껴지지 않는 희한한 영국인이었다.

부드러운 저음의 목소리로 느릿느릿 말하는 그를 보고 있으면 왠지 나른해졌다.  



"일하다가 지쳐서 때려치우고 4년째 태국 카오산로드에 박혀서 쉬고 있지요. 태국이 물가가 싸고 사람들이 유순해서 좋긴 한데, 11월은 한참 우기라 비에 질려 비를 피하려고 중국에 왔어요"



여행 중에 다시 여행을 떠나 온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면서 사람들이 추천해서 찾아온 리장은 자기에게는 너무 춥다며, 따뜻한 시솽반나로 갈 예정이라고 했다.

영국 사람이 추위에 진저리치는 모습이 조금 우스웠다.







크리스는 호기심이 많았다.

내가 중국문학을 전공했다고 하니 뜬금없이 나에게 중국에 관한 질문을 폭포수처럼 쏟아냈다.



"'중국 中國'의 의미가 뭔가요?"


"고대 중국인들은 중국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생각했죠. 영토는 거대했고, 주변 국가들은 중국보다 약했으니까요"


"중국인들이 중화사상을 갖게 된 이유는 뭐라고 생각해요?"


"나라 이름이 중국이잖아요. 게다가 문화적으로도 세계 어느 나라도 비교하기 어려운 수준 높은 문화를 발전시켰죠. 그들이 보기에 중국보다 위대한 나라는 없었을 거예요"


"이전에 한국과 일본을 여행했어요. 내가 보기엔 이 두 국가는 이미 '충분히 발전한(fully developed)' 나라였어요. 중국도 그렇게 될까요?"


"이번에 중국을 여행하면서 많은 지역을 지나왔어요. 쓰촨에서 만난 중국인이 '중국은 빈부 격차를 해결하기 전에는 선진국이 될 수 없다'고 말했죠. 글쎄요, 하지만 외국인인 제가 보기에 중국의 성장 가능성은 충분해요. 사람, 자원, 시장 모두 거대하죠. 그리고 중국인의 교육열도 무시무시하고요"


"문화대혁명은 왜 일어났나요?"


"모택동과 측근들이 권력을 잃었죠. 이유는 1950년대 대약진운동의 실패였어요. 하지만 권력을 되찾고 싶었던 그들은 무지하고 어린 학생들을 부추겨 '낡은 것은 모두 부수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야 한다'며 문화대혁명이라는 희대의 미친 짓을 벌였죠. 결국은 권력 다툼이었어요"


"중국인의 반미감정은 어떤가요?"


"나는 중국인이 아니라서 잘 몰라요. 중국 친구들은 미국을 좋아하지는 않더군요. 하지만 그 친구들도 '우리에게 도움이 된다면 친구가 되지 못할 이유가 없다'라고 말해요"



비루한 영어를 구사하다 보니 대화가 이어진 30분 동안 혀가 꼬이고 머리에 쥐가 나는 듯했다.

다행히 크리스는 말을 천천히 했고, 내가 알아듣기 어려울까 봐 쉬운 어휘만 구사했다.

내 말이 끝나기 전까지는 조용히 경청했고, 심하게 버벅이면 "이 뜻인가요?"라며 말을 이어줬다.

호도협 중도객잔에서 다국적군과 상대할 때, 시도 때도 없이 'pardon'이라는 소리를 들어 주눅 들었던 기억이 새삼스레 떠올랐다.

상대에 대한 배려가 몸에 익은 그는 분명히 신사였다.







크리스와 대화한 후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그에게 중국에 대해 설명하다 보니 마치 내가 중국인이 된 양, 나는 중국인의 입장에서 중국인을 변호하고 있었다.


지난 1년 간 중국에 머물면서 '중국인은 이해할 수 없다', '중국인은 상종 못 할 사람들이다'라고 거의 결론을 내려가고 있었다.

당시의 중국은 나에게 모순 덩어리로 보였다.

사적으로 만난 이들은 대부분 유쾌하고 친절했으며, 염치와 부끄러움을 알고 감사와 존경을 표할 줄 아는 이들이었다.

상대에 대한 배려를 기반으로 쌓아 올린 관계는 건강했다.

하지만 공적인 관계, 계약이나 조건에 따른 관계로 만난 중국인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이들이었다.

그들은 무례하고 뻔뻔했으며, 작은 이익을 위해서라면 욕을 먹는 것도, 타인을 힘들게 하는 것도 아무렇지 않게 생각했다.

나와 개인적인 관계로 엮어진 이들도 누군가와 이해관계가 얽히면 그런 모습을 보일 것이라고는 상상할 수가 없을 정도로 간극이 컸다.

하루에도 열두 번씩 만나게 되는 부조리와 불합리한 상황에 지쳐가고 있었다.

혐오적인 표현, 사고방식은 배척하려 노력했지만, 나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육두문자를 막을 방법은 없었다.


하지만 크리스에게 중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설명하면서, '어쩌면 사람들이 말하는 중국인의 추한 모습은 일방적인 혐오가 아닐까?'라고 의심해 봤다.

'냄새나는 되놈', '시끄러운 중국인', '돈만 밝히는 짱깨'라는 스테레오 타입은, 어쩌면 깨끗한 물이 부족한 지역적 특색, 당장 생존을 위협받았던 20세기 '중공'을 살아온 이들의 자기 방어 기제가 아니었을까?

물론 이미 20세기 초 루쉰(鲁迅)이 <아Q정전>에서 비판했던 미개한 중국인의 모습은 중화인민공화국 이전에도 있었지만, 이 또한 시대의 한계가 아니었을까?

비근한 예로 우리나라 또한 1980년대까지는 중국 못지않은 '어글리 코리안'의 모습을 자조하는 분위기가 팽배하지 않았던가?


나의 의심은 20년이 지나서 풀렸다.

스마트폰과 디지털화가 이끌어낸 강제적인 신용사회로 진입하게 된 중국에서, 누군가를 등쳐먹기 위해 눈을 굴리는 역겨운 중국인은 사라진 듯했다.

불과 20년 전까지만 해도 샤워 시설이 없어서 자주 씻지 못했던 환경은 사라졌고, 도시의 중국인들은 몰라보게 세련된 모습으로 바뀌었다.

소련이 사라지고, 러시아가 늙은 곰이 된 국제 사회에서, 미국과 더불어 세계의 패권을 다퉈볼 만한 대국이 된 중국인들은 더이상 비굴하지도, 주눅 들지도 않아 보였다.

중화주의가 다시 고개를 쳐들었고, 오히려 이로 인해 오만하고 무례해진 사람들이 등장했다.

결국 사람의 기질과 행동 양식은 주어진 환경과 교육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것이다.

불과 80년 전까지만 해도 대만인과 중국인은 '중국인'으로 묶였지만, 지금의 중국인과 대만인의 태도와 행동 양식이 다른 것도 같은 맥락이리라.

지난겨울, 대만 가오슝에서 택시 기사에게 대만 사람들의 친절함의 근원에 대해 물었었다.

그가 한 대답이 어쩌면 이 의문에 마침표를 찍어준 것 같다.


"대만 사회의 특징이라고 봐요. 우선 악의를 품은 사람이 적다는 것. '측은지심'이라고 하죠. 어찌 보면 대만에 온 외국인은 낯선 환경에 던져진 약자죠. 대만 사람들은 ‘우리가 외지인을 보호해 줘야지’라는 생각이 있는 듯해요. 그리고 대만의 국제관계도 연관이 있죠. 대만은 줄곧 중국에게 핍박받고 있잖아요? 우리는 더 많은 국가들이 우리를 지지해 주길 바라죠. 만약 우리가 이웃 국가인 한국에 대한 악담을 하거나 안 좋게 대하면, 어떻게 그들의 지지를 얻겠어요?"




리장고성.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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