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채구
당시 구채구를 수식하는 문장이었다.
황산, 구채구, 장가계와 함께 중국 3대 비경으로 불리는 구채구는 1970년대 초반에야 세상에 그 존재가 알려졌다.
구채구(九寨沟)는 '아홉 개의 마을이 있는 계곡'이란 뜻인데, 일설에 따르면 토번과 당나라가 전쟁을 벌일 때 징집된던 군인들이 고원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남아 정착하면서 만들어진 아홉 마을이라고 한다.
중국의 대표적인 카르스트 지형으로 석회질이 빙하에 녹아 흘러내린 물이 계곡의 곳곳을 지나며 수많은 호수와 연못을 만들었다.
빙하수에 녹은 석회질은 수심과 주변 경관에 따라 다양한 색을 띠게 됐는데, 우차이츠(五彩池)와 우화하이(五花海)로 대표되는 오색찬란한 빛깔이 구채구를 상징한다.
처음 보면 정말로 이 세상 풍경이 아닌 듯한 황홀함을 느끼게 된다.
안타깝게도 2008년 쓰촨대지진 때 일부 호수가 망가졌지만, 그 또한 자연의 순리이기에 원래대로 복구하지 않고 정비를 마쳤다.
구채구는 Y자 형태로 생겼다.
지도상 북쪽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는 동선이지만, 입구인 북쪽이 저지대고 남쪽이 고지대라서 보통 지도를 보게 되면 실제 지형도를 뒤집어 'Y'자 형태로 보게 된다.
구채구 전 지역은 나무 데크로 산책로를 잘 조성해 놨지만, 총장 46km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규모때문에 걸어다니기는 쉽지 않다.
심지어 Y자 코스의 한쪽 루트를 보고 나면 다시 같은 길을 타고 내려와 반대편으로 올라가야 하기에 동선이 늘어난다.
따라서 구채구 내부에는 개별 여행자들을 위한 셔틀버스를 운행하며, 승차권을 끊어놓으면 중간에 정해진 정거장에서 마음대로 버스를 타고 이동할 수 있었다.
패키지로 들어가는 팀은 전세 버스를 대절해서 다니기도 했다. 당시엔 그랬다.
또한 규모가 엄청나기 때문에 구채구 내에 있는 수정구, 측차와구, 일측구 세 개 마을의 민가에서 민박을 겸하기도 했다.
그러나 사스 사태 이후 중국 정부에서 구채구 내부의 숙박 영업을 전면 금지시켰고, 관광객은 하루 일정이 끝나면 무조건 구채구 밖으로 나왔다가 다음날 다시 표를 끊고 들어가야 했다.
다만, 내가 갔을 시기에는 과도기였기에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규칙이었고, 마을 사람들은 정부를 욕하면서 몰래 영업을 이어가고 있었다.
아침 7시에 구채구로 가는 차표를 예매해 놨는데 일어나니 7시였다.
몸을 일으켰더니 머리가 핑 돌고 속이 울렁거렸다.
진 선생과 따지에는 6시 반 차라고 했는데, 시체가 된 진 선생이 과연 일어났을지 궁금했다.
느지막이 일어나 끼니를 해결하고 버스 정류장으로 갔더니 구채구 가는 마지막 버스가 방금 떠났단다.
별 수 없이 다음날 표를 끊으려 하는데 매표창구 옆에서 짐을 한 보따리 지고 있던 군인이 말을 걸었다.
계산해 보니 숙박비, 식비, 표값, 버는 시간까지 고려하면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었다.
군인은 1인당 75위안을 부르는 빵차 기사와 실랑이를 벌였고, 결국 60위안에 합의를 보고 차에 올랐다.
날은 잔뜩 찌푸렸고, 주변의 산은 어느새 설산으로 바뀌었다.
구채구로 향하는 두 시간 동안 앞자리에 앉은 군인은 멀미 때문에 수시로 구토했고, 그걸 보는 난 해장이 덜 된 속 때문에 내내 고생이었다.
구채구 입구에 도착해 보니, 조금 바래긴 했지만 단풍이 색을 유지하고 있었다.
온통 회색빛이던 하늘도 어느새 개어 푸른 하늘이 드러났다.
저녁을 먹으러 허름한 식당에 들어가 앉았는데, 현지인으로 보이는 장족 노파들이 한 떼 몰려 들어왔다.
기골이 장대한 노파들은 모두 손에 맥주를 한 병씩 들고 있었다.
자리에 앉아 큰 소리로 훈둔(馄饨)을 한 그릇씩 주문한 노파들은 냅다 이로 맥주병을 따서 건배했다.
꾸역꾸역 밀어 넣고 있던 수제비 같은 굵기의 따오샤오미엔(刀削面) 면발이 코로 삐져나올 만큼 놀랐다.
저 이빨이면 야크도 물어 죽일 듯했다.
노파들이 한 모금 마실 때마다 술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시원하게 맥주를 들이켠 노파들은 우렁찬 사자후를 토해냈다.
여기가 구채구인지 아마조네스 양산박(梁山泊)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저녁 먹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매표소에 들르니 마침 구채구 관람을 끝낸 사람들이 쏟아져 나올 시간이었다.
대지진 이전 중국 최고의 관광지였던 구채구 답게 어마어마한 인파였다.
사스 봉쇄령이 풀린 지 어느덧 넉 달이 지난 터라, 슬슬 중국의 관광산업이 제자리를 찾아가던 시기이기도 했다.
하늘을 보니 자동차들이 뿜어놓은 갈색 매연이 높은 산에 가로막혀 길을 잃고 계곡을 맴돌고 있었다.
구채구는 중국 정부가 중점 관리하는 자연보호구역이었지만, 당시 낙후한 중국의 자동차와 정제되지 않은 석유가 만들어낸 공해는 답이 없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 개장 시간에 맞춰 구채구 풍경구에 들어섰다.
버스 승차장으로 내달리는 사람들을 피해 숲에 난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하얗게 서리가 내린 단풍나무 길을 홀로 걸으니 조금 적적했지만, 시원한 물소리와 새소리, 상쾌한 공기를 마음껏 즐길 수 있었다.
옆으로 흐르는 계곡물은 더 이상 맑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깨끗했다.
그러나 아무리 걸어도 첫 번째 경관인 펀징하이가 나오질 않았다.
산길을 걸은 지 두 시간쯤 지났을까? 숲길이 끝나고 제법 넓게 트인 공터가 나왔다.
맞은편에서 현지인으로 보이는 장족 남자 하나가 걸어 내려오다가 나를 보고 흠칫 놀라는 기색이었다.
미래 계획했던 동선과 일치했다.
편법을 권하는 친절함이 머쓱했지만, 들어보니 남자의 말을 따르지 않으면 구채구에서 빠져나가지도 못할 듯했다.
안에서 표를 끊을 방법도 없었던지라, 버스를 타기로 했다.
여차하면 현장에서 돈을 낼 생각이었다.
구채구는 명불허전이었다.
느긋하게 경치를 감상하며 천천히 사진을 찍으며 돌아다니다 보니, 베이스캠프로 찍어놓았던 수정구에 닿았을 땐 이미 정오였다.
매점을 운영하는 듯한 집이 있기에 라면과 주전부리를 사서 점심을 해결했다.
혹시나 싶어서 주인에게 물었다.
주인은 한숨을 쉬었다.
주인의 안내에 따라 2층으로 올라갔더니 분명히 정식으로 영업을 했던 숙박업소인 듯, 복도를 따라 번호표가 붙은 방이 줄지어 있었다.
공산당 독재국가인 중국에서 불가능이란 없었다.
물론, 대책도 없는 듯했다.
구채구를 떠나 청두로 향했다.
청두에서 짐을 정리한 후 윈난성으로 다시 넘어갈 계획이었다.
버스 옆 자리에 앉은 이는 베이징에서 혼자 구채구에 여행 온 중년 여성이었다.
당시 중국인 개별 여행자는 천연기념물보다 희귀한 존재였다.
도저히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혼자 오셨어요?"라고 물어봤더니 건조한 대답이 돌아왔다.
구채구를 빠져나오는 길은 대규모 공사가 벌어져 난장판이었다.
베이징 아지매가 냉소했다.
리장이 그랬고, 구이린이 그랬고, 따리가 그랬듯이 바야흐로 구채구에도 지우빠(酒吧)가 들어설 채비를 하고 있었다.
도로가 닦이기 전 구채구에서 청두까지는 반나절 이상이 걸리는 험한 길이었다.
오전 6시 30분 첫 차를 타고 나왔건만, 청두의 관문인 두장옌에 도착했을 때는 어느새 오후 3시였다.
차가 심하게 밀려 기사에게 물어보니 도로 공사 때문에 차량을 통제 중이라고 했다.
다 좋은데 한 시간째 반대편 차선의 차들만 통과시키는 건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뿐만 아니라 버스에 탄 중국사람들도 분노가 폭발하기 직전이었다.
사람들이 웅성거릴 때쯤 길이 뚫렸고 여기저기서 툴툴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버스 기사는 길에서 허비한 시간을 메우기 위해 연신 가속 페달을 밟아댔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무렵 청두 외곽에 들어서니, 이번엔 시내 교통이 마비 상태다.
절묘하게 퇴근 시간과 겹쳤다.
그 와중에 젊은 청년 하나가 내려야 할 정류장을 놓쳤는지 갑자기 헐레벌떡 기사 옆으로 달려가 문을 열어달라고 억지를 썼다.
기사는 성이 잔뜩 난 얼굴로 대답했다.
청년은 기사석 난간에 걸려있던 수건을 창문에 집어던지고 문을 걷어차며 '난 죽어도 여기서 내려야겠다'며 난동을 부렸다.
이걸 가만두고 볼 정도로 성질 좋은 쓰촨 사람들이 아니었다.
남녀노소 모두 들고일어나서는 청년에게 욕을 퍼부었다.
하지만 청년 또한 보통은 아니었는데, '남의 일에 상관하지 말라'며 버스 승객들 전체와 대거리를 할 기세였다.
결국 열받은 기사가 청두 외곽 순환도로 한가운데 차를 세워버렸고, 청년은 패기 넘치게 차에서 내려 8차선 도로를 가로질러 사라졌다.
베이징 아지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2007년 여름, 석사 논문 자료 수집과 현장 답사를 핑계 삼아 청두에서 어메이산(峨眉山)에 간 적이 있다.
불과 4년 만에 털털 거리던 시외버스는 우등 고속버스로 바뀌어 있었다.
안락한 승차감에 나른해져 가고 있을 때쯤, 사고가 났다.
화물을 잔뜩 실은 트럭이 갑자기 속력을 올리더니 내가 탄 버스 앞으로 난입하더니 그대로 버스 우측 백미러를 들이받았다.
운전자의 부주의였던 것 같다.
앞에 가던 트럭을 추월할 생각이었던 듯한데, 옆에서 달리고 있던 우리 버스를 못 본 모양이었다.
버스와 트럭이 충돌하려는 순간 기사가 급정거를 했고, 버스 안은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짐과 사람들의 비명소리에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순간 나도 모르게 손잡이를 움켜쥐고 고개를 파묻었다.
잠시 좌우로 요동치던 버스는 다행히도 균형을 되찾았는데, 황당하게도 트럭은 그대로 뺑소니를 치려 했다.
흥분한 버스 기사는 알아들을 수 없는 쓰촨 사투리로 마구 욕을 퍼부으며 추격을 개시했다.
트럭 기사는 당황한 것인지, 정신이 나간 것인지 계속 내뺐지만 과적 차량이 속도를 낼 수 있을 리가 없다.
결국 버스 기사는 트럭을 갓길에 세우는 데 성공했다.
폭풍 같은 순간이 지나고 정신이 드니 그제야 혈압이 올랐다.
육두문자를 내뱉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더니, 화끈한 쓰촨 사람들은 이미 나만 빼고 모두 트럭 앞으로 몰려가 있었다.
기사와 승객들은 트럭 기사를 고속도로 갓길로 끌어내려 에워싼 채 인민재판을 벌였다.
버스에서 내려 트럭과 부딪친 앞유리를 살펴보니 총알을 맞은 듯 사방으로 금이 가 있다.
버스 기사의 기민한 대처 덕분에 심하게 부서지지는 않은 듯했다.
버스기사는 대략 30분 정도 핏대를 올려가며 트럭 기사와 싸우더니, 전화번호를 교환하고 인적사항을 메모한 후 자동차 수리비 명목으로 제법 두툼한 돈뭉치를 챙기고 다시 차를 몰기 시작했다.
이 과정을 지켜본 승객들은 "우리가 이겼다"는 듯한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버스에 올랐다.
웨이칸(围看, 17편 참조)을 생각했던 나는 당황했다.
쓰촨 사람들의 기질은 쓰촨 음식의 매운맛만큼이나 화끈하다고 들었는데, 진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