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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집사 김과장 May 11. 2024

일반인 老百姓

청두




불볕더위가 작렬하는 여름에 시작한 여정은 어느새 100일을 훌쩍 넘겼고, 고원의 기후는 완연한 가을로 접어들고 있었다.

샹그릴라 이후의 여정은 청두로 들어가 구채구로 향하는 길이었다. 

지리적으로 가까운 리장, 따리 등 윈난 성을 돌아볼 계획이긴 했지만, 단풍철이 끝나기 전에 구채구에 먼저 가봐야겠다는 속셈이었다. 

지금이야 중국에 철도가 깔리지 않은 곳이 없고, 설령 철도가 통하지 않더라도 고속도로가 닦여 어디든 편하게 갈 수 있지만, 당시 운남에서 사천으로 넘어가는 산길은 버스를 여러 차례 갈아타고 가야 하는 험악한 길이었다. 

열두 시간 이상, 때로는 24시간을 꼬박 버스로 달려야 하는 구간도 많았는데, 그러다 보니 침대버스가 부지런히 도시와 도시를 오가던 시절이었다. 



베이징 역, 2007. (사진은 본문 내용과 관계없음)



판즈화로 가는 침대 버스에 오르니 자욱한 담배 연기와 지독한 발냄새가 나를 맞았다. 

이제는 우스갯소리가 됐지만, 중국의 재래식 화장실과 위생관념은 사악하다는 표현을 쓰고 싶을 만큼 엉망이었다. 

물론 수도와 샤워시설이 미비한 가정이 많았던 시절이라 매일 씻는 게 쉽지 않았을 터였다. 

학교에서 만난 친구들은 그런 중국의 현실을 부끄러워했지만, 개선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따라서 그 열악한 환경을 비하하거나 조롱하는 건 불합리한 처사였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냄새는 지독했다. 

수시로 두통이 찾아오고, 때로는 구토를 유발할 정도였다.

원흉은 내 옆자리에 길게 드러누워있는 남자였다. 

나부터도 여행하면서 며칠씩 못 씻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던지라 타인의 냄새를 탓할 게재는 아니었는데, 그 남자는 천외천(天外天)이었다. 


"당신 발냄새가 너무 지독하여 정신이 혼미하오. 신발을 신어주면 안 되겠소?"  


내 침대 위칸에 자리한, 억센 쓰촨 억양의 중년 남자가 범인에게 정중하게 한마디했다. 

그러자 놀랍게도 범인은 멋쩍은 표정으로 주섬주섬 구두를 꺼내 신었다. 

냄새는 이내 사라졌고, 버스 안에는 평화가 찾아왔다. 







구불구불한 산길을 달리느라 버스는 쉴 새 없이 흔들렸다.

좁아터진 침대칸에서 선잠이 들었다가, 내리라는 승무원의 고함 소리에 눈을 뜨니 어느새 새벽 6시였다.

버스 창문 밖으로는 어슴푸레 동이 트고 있었고, '판즈화 攀枝花'라는 지명이 적힌 간판이 보였다. 

밤 사이 버스는 호도협과 리장을 거쳐 윈난성과 쓰촨성의 경계인 판즈화시에 들어선 것이다. 

잠시 눈을 감았다 뜬 것 같은데 더 이상 티베트 고원의 정취는 느낄 수 없었고, 또다시 네모 반듯하고 황량한, 무채색의  중국 도시가 날 맞았다. 


밤 사이 발냄새의 원흉을 처단한 남자와 대화를 텄다. 

남자는 충칭(重庆)에 사는 평범한 직장인이었다.



"청두에 들러서 일을 보고 집으로 돌아갈 거야"



외국인이 이 산골짜기까지 들어와 다니는 게 신기했는지 질문이 꽤 길게 이어졌다. 

그간 만난 성질 급한 쓰촨 사람들과 달리 꽤나 점잖았던 이라 기억에 남는다. 

그보다는 발냄새를 잡아낸 그 용맹에 반했던 것 같다. 

청두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도 그는 귀찮을 정도로 쓰촨과 청두의 지리, 역사, 환경 등에 대해 설명해 주고, 나의 편의를 봐줬다. 

점잖게 수다스러웠던 그 덕분에 샹그릴라를 떠나면서 부서질 뻔했던 멘털이 치유되는 걸 느꼈다. 

도무지 적응할 수 없을 듯했던 쓰촨식 억양도 조금씩 귀에 익었다. 



"쓰촨 성은 강이 많은 지역이라 같은 위도의 다른 지역보다 더워. 사시사철 습한 건 기본이지. 게다가 연중 강수량이 많아 맑은 날 보기가 힘들어. 그래서 관절염을 앓는 사람도 많고, 그 꿉꿉한 기분을 해소하기 위해 매운 음식이 발달했다는 얘기도 있어. 아, 습기 때문에 사람들, 특히 여자들 피부가 좋아서 미인이 많은 건 장점이려나?"




판즈화에서 탄 기차는 청두를 경유해 베이징까지 달리는 장거리 기차였다. 

수도까지 가는 기차다 보니 객차는 매우 깨끗하고 쾌적했다. 

기차가 달리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창 밖 풍경은 구름이 짙게 낀, 습하고 축축한 쓰촨의 농촌 풍경을  바뀌었다. 

삼모작이 가능한 무더운 지방답게 10월에도 논에 물을 대놨고, 논두렁에서는 거대한 물소가 아치형의 웅장한 뿔을 뽐내며 풀을 뜯고 있었다. 

꾀죄죄한 인민복을 입은 목동 아이가 물소의 등 위에 늘어져서는 입에 문 강아지풀을 빙빙 돌리며 기차를 쳐다보며 손을 흔들었다.  

기찻길 옆으로는 이름 모를 소수민족 아낙들이 파란 블라우스와 치마에 감색의 앞치마를 두르고 희한한 모양의 모자를 쓴 채 뭔가를 잔뜩 이고 지고 지나다녔다. 






충칭맨은 중국의 낙후한 사회 인프라와 문화 수준을 부끄러워했다. 

그러면서 한국의 발전상을 부러워했다.

이 패턴은 20년 전 중국 어디를 가더라도 동일했다.

내가 만난 중국인들은 "중국은 이래서 안 돼", "중국은 지저분해"라고 자조했다.

20년이 지난 지금, 중국인은 더 이상 열등감에 시달리지 않는다. 

그들은 미국과 세계의 패권을 다투는 국가임을 자랑스러워하며, 공산당 통치하의 발전상을 찬양한다. 

진실은 알 수 없다. 


좌우간, 당시 나는 충칭맨의 의견에 완전히 동의할 수는 없었다. 



"글쎄요, 내가 갔던 중국의 대도시들은 이미 상당히 발전했던 걸요? 도시의 인프라는 한국의 대도시와 차이를 잘 못 느낄 정도였어요"



"그건 네가 모르는 말이지. 비록 중국 도시들이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있지만, 중국 전체 인구 14억 중 8억이 농촌사람, 방금 네가 본 수준의 찢어지게 가난한 촌부들이야. 중국이 땅이 워낙 크고 사람이 워낙 많으니까 네가 도시에서 느낀 그 모습이 중국의 현재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사실상 중국인들이 말하는 '일반인(老百姓, 라오바이싱)'은 저런 사람들이야. 실상 네가 본 도시의 모습은 중국의 아주 일부분에 불과해"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거대한 대륙은 '세계'라고 표현하기에 부족하지 않을 정도로 다양한 지리적, 인문적 경관을 보여준다. 

그 차이는 단지 '다르다'는 단어로는 포괄하기 어려운 규모였다. 

충칭맨이 지적한 대로 중국의 빈부격차는 특히 심각했다.

당시 우스갯소리로 "중국에는 우리나라 인구수만큼의 갑부가 있다"는 말이 돌았었다. 

그런가 하면 베이징, 상해 등 대도시에서는 이른바 '농민공(农民工)'이라 부르는, 일자리를 찾아 무작정 상경한 촌부들이 빈민보다도 지독한 상황에서 돈을 벌기 위해 악전고투를 벌이고 있었다. 

누군가의 커피 한 잔이 그들에게는 하루 일당인, 말도 안 되는 빈부격차였다. 

당시 중국 정부는 빈부격차를 해결하지 못하면 중국의 미래는 없다는 인식을 갖고 어떻게든 빈민을 구제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쉽지 않은 일이었다. 


2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빈부격차는 존재하지만, 그때만큼 심각하지는 않아 보인다. 

생산력이 증가하고, 경제 규모가 말도 안 되게 커지면서 낙수 효과로 인한 빈민 구제 정책이 어느 정도 실효를 거뒀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때 도시 미관을 해친다는 이유로 도시의 빈민들을 대책도 없이 길거리로 내몰고, 도시를 재개발했던 때를 생각하면 과연 중국이 어느 정도까지 답을 찾은 것인지 의아하기도 하다. 



베이징 역. 2007.







청두에 가까워지니 하늘이 뿌옇게 변했다. 

기차가 역에 들어설 때쯤엔 급기야 추적추적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이게 바로 사천의 찌푸린 날씨지"


충칭맨이 웃었다. 


충칭맨과 헤어지고 택시를 잡았다. 

버스는 이미 끊긴 시간, 택시 기사들은 호객도 안 하고 느긋하게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소마호텔'로 갑시다"


라싸에서 만난 이에게 추천받은 숙소였다. 


"방은 예약했수?"


순간 무슨 소린가 싶었다. 

택시 기사가 왜 내 숙소 예약을 체크하지? 

당시는 외국인 주숙등기 시스템 없이 허가받은 호텔만 외국인을 받는 시절이긴 했지만, 택시기사가 물어볼 사안은 아니었다. 


"도미토리에 묵을 건데, 무슨 예약이 필요해요?"


"뉴스도 안 보고 사나? 내일부터 사흘간 청두에서 '전국 의약 협회 회의'가 열린다고. 요 며칠간 청두에 있는 모든 호텔은 방이 없을 거요"


부랴부랴 호텔에 전화를 넣어봤더니, 아니나 다를까 정말로 방이 없다. 


중국을 오가다 보면 '규모'의 개념이 우리와 전혀 달라 당황스러울 때가 많았다. 

"조금만 더 가면 돼"라는 말은 "네 다리 튼튼하지?"라는 말과 동의어였다. 

올림픽이나 월드컵도 아니고, 일개 협회의 '전국' 회의에 도시의 숙소가 동이 났다는 소리를 듣고 나니 헛웃음이 났다.


하지만 현실은 긴박했다. 

자칫 기차역에서 노숙을 하게 될 판이었다. 

길 한가운데 택시를 세워놓고 론니플래닛을 꺼내 급하게 숙소를 찾아본 후, 도미토리가 가장 크다는 'Sam's Guesthouse'로 향했다. 

그러나 황당하게도 게스트하우스 도미토리까지 만석이다. 

사스로 인한 지역 봉쇄가 풀린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고, 중국의 관광산업은 여전히 빙하기였다.

어느 도시를 가도 숙소에 빈방이 넘쳐났기에 예약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았는데 난감한 상황이었다. 


"어... 얼마 전에 우리 직원 하나가 무후사(武侯祠) 근처에 게스트하우스를 열었는데, 그쪽으로 가보려오? 아마 아직 홍보가 덜 돼서 방이 있을 듯한데..."


천행이었다. 

소개받은 'Holly's Hostel'에 들어서니 배낭여행자들 천지다. 

역시나 론니 플래닛 보고 샘스 게스트하우스 갔다가 이쪽으로 방향을 튼 사람들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침대 한 칸을 차지하고 나니 긴장이 풀렸고, 이내 곯아떨어졌다. 



2003년 가을, 청두






Oh Money, Go My Home



천혜의 지형


청두(成都)라는 도시는 누군가에게는 쓰촨요리로, 누군가에게는 삼국지로 기억된다.

유비가 제갈량을 얻고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의 거점으로 삼은 촉한(蜀汉)의 도읍이 청두였다. 

쓰촨성은 지리적으로는 습하고 무더운 기후 덕분에 삼모작이 가능한 축복받은 농토이며, 고대 중국의 중원에서는 한중을 거치지 않고서는 진입할 수 없는 천혜의 요새였다. 

'촉의 잔도(栈道)'는 저 험악한 지역으로 들어서는 유일한 통로로 악명 높았다. 

서쪽으로 윈난성과 접한 험악한 산악지역은 '구채구(九寨沟)'가 대표하는 비경이 산재했다. 

고립된 지역에서 계승, 발전한 인문 경관은 쓰촨을 매력적인 여행지로 만들었다.  

또한 쓰촨성은 시선(诗仙) 이백을 비롯해, 소식(蘇軾, 소동파 蘇東坡) 등 기라성 같은 문인들을 배출한 곳이며, 이로 인해 쓰촨 사람들의 자부심은 하늘을 찌를 듯한 걸로 유명하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당시 나와는 크게 상관없었는데, 난 그저 마파두부나 한 그릇 먹고 서둘러 구채구로 향할 심산이었다. 

따라서 청두에 묵는 짧은 기간 동안 '필수 요소'라고 할 만한 사적들을 잽싸게 돌아볼 계획을 세웠다.  

하루 만에 당나라 때 사찰인 문수원(文殊院), 유서 깊은 도관(道觀)이라는 청양궁(青羊宫) 등을 돌아봤다. 

사실 도교에 대한 이해가 있기 전에는 두 곳의 차이를 알 수 없다. 

도관 내에는 불상 대신 노자와 천신들의 상이 자리하고 있고, 도관 내를 거니는 이들이 민머리의 승려가 아니라 상투를 튼 도사라는 정도만 차이점으로 느껴질 뿐이다. 


다만 도관을 돌아다니다가 독특한 사실을 하나 발견했는데, 중국 사람들은 도관에서나 사찰에서나 행동 양식이 똑같다는 점이었다. 

중국인들은 도관에서건, 사찰에서건 입구에 놓인 향로에 거대한 향을 분향한 후 손에 향을 세 대 들고 사방을 향해 연거푸 절을 했다. 

이어 대웅전으로 가 전당 안에 놓인 불상을 향해 또 향을 사르고 절을 올렸다. 

이들이 기원을 담아 시주한 종이 혹은 무언가에는 하나같이 현세의 흥복을 기원하는 사연이 절절하게 적혀있었다. 


불교 교리의 핵심은 선행을 통해 업을 해소하고 해탈하는 것이다.

가톨릭은 이웃을 사랑하고, 그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천국에 가는 것을 삶의 목적으로 여긴다. 

하지만 도교는 조금 다른데, 수행을 통해 불로장생하는 게 궁극적인 목표다. 

그 경지를 이룬 이를 신선(神仙)이라 부른다. 

다른 종교의 교리가 내세를 지향하는 반면, 도교는 현세의 안녕을 바란다. 

그리고 도교는 고대부터 중국인들의 정신세계를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삼국지에 나오는 황건적은 도교의 방계인 오두미교에서 시작한 중교 집단이었다. 

이런 현세지향적인 중국인들의 성향은 중국인의 정신세계를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키워드다. 

아침엔 절에서 불공드리고, 낮엔 도관에서 복을 비는 중국인들을 보니 그들에게 종교란 '기복'의 의미를 가질 뿐, 신앙의 대상이 누구인가는 중요하지 않은 듯 보였다. 






인자한 표정의 재신(財神). 관우(關雨)다.



2023년에 중국에 몇 번 다시 갈 기회가 있었는데, 당시 중국인의 현세지향적이고 기복적인 성향을 엿볼 수 있는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었다. 

평요고성(平遥古城)의 '전장(钱庄) 박물관'에 갔을 때였다. 

중국 중세 사회의 은행이었던 '전장'과 사설 경비업체였던 '표국(鏢局)'의 역사에 대한 설명이 흥미진진하게 이어지는 가운데, 한쪽 벽에 이상한 장식이 있었다. 


중국 어디를 가도 흔하게 볼 수 있는 재신(財神) 문양이었는데, 그 밑에 적힌 문구가 독특했다. 


‘OH MONEY GO MY HOME’


분명히 ‘옴 마니 파드메 훔’의 음차였다. 

'나무아미타불'의 티벳어 발음을 영어로 한번 더 음차 해서 '오, 재물아, 우리 집으로 가렴'이라고 표현했다.

이 문구를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이마를 찰싹 때리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중국인은 기복에 진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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