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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집사 김과장 Jun 16. 2024

桂林山水甲天下

구이린



"계림의 풍광은 천하제일이다 桂林山水甲天下"


송대의 시인인 왕정공(王正功, 1133~1203)의 시구다.

절경, 비경이 산재한 중국에서도 풍경의 아름다움을 거론할 때 가장 먼저 나오는 곳은 분명 구이린이다. 

느긋하게 흐르는 리강 주변에 난데없이 솟아난 둥근 봉우리들이 끝도 없이 이어지는 풍경은 중국 어디에서도 보기 힘든, 이질적이면서 아름다운 풍경이다. 

눈 돌리는 곳마다 산수화에서 튀어나온 듯한 풍광이 이어지니 예로부터 명승(名勝)으로 이름 높았다.

송(宋)나라 때의 저명한 시인 황정견(黃庭堅, 1045~1105)은 의주(宜州)로 귀양 가는 길에 구이린에 잠시 머물렀는데, 계림의 풍광에 넋이 나가 "이성도, 곽회도 가고 없으니, 이 절경을 어찌 묘사할꼬? 李成不生郭熙死,奈此百嶂干峰何!"라는 시구를 남겼다. 

이성, 곽회는 당시 천하제일로 치던 화백이었니, 이미 그들이 세상을 떠나버려 이제는 사람 솜씨로 이 풍경을 묘사할 수 없다는 극찬을 남긴 셈이었다. 

지금이야 워낙 많은 곳이 개발되고 알려져 상대적으로 가린 감이 있지만, 구이린은 중국 배낭여행 1세대를 책임졌던 대표적인 여행지였다.

중국으로 여행을 떠나는 배낭여행자들은 구이린의 양수오(阳朔)에 모여들어 경치에 취하고, 술에 취했다.

거기서 얻은 정보로 윈난 성을 탐험하고 동남아로 빠져나가는 이들이 많았다. 

그러니, 중국을 여행하기로 했으면 구이린은 무조건 들러야 했다. 






기차가 덜컹이는 느낌,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말소리에 나도 모르게 눈을 떴다.

시계를 보니 어느새 오전 11시다. 

불편한 자세로 긴 잠을 잔 탓인지 온몸이 욱신거렸다. 

쿤밍에서 구이린(계림)을 거쳐 상해까지, 2박 3일간 달리는 열차였다. 

밤 10시에 쿤밍을 출발한 기차는 거의 텅텅 비어 있었고, 여독이 쌓인 몸이라 금세 곯아떨어진 터였다.

눈을 뜨니 밤 사이 지나는 역마다 사람을 태운 기차는 어느새 만석이었다. 


창밖에는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었다. 

겨울의 초입이었지만, 남부는 겨울을 느끼기 어려운 온화한 날씨다.

핸드폰을 켜보니 통신사 기지국에서 보낸 "광시좡족자치구에 들어오셨습니다"라는 내용의 문자가 보였다. 

신나게 자는 동안 구이저우 성을 통으로 가로질렀다. 

머리를 털어 정신을 가다듬고 창밖으로 다시 눈을 돌렸다. 

평탄한 들판 위에 갑자기 불쑥불쑥 솟아난 봉우리들은 사진에서 보던 구이린 풍경과 흡사했다. 

그 위를 아직 시들지 않은 푸릇한 풀이 덮고 있었고, 군데군데 드러난 바위가 검정과 흰색 무늬를 더했다. 

추사(秋史)의 <세한도歲寒圖>를 보는 듯 거친 돌의 질감이 인상적이었다. 

마른 붓에 먹물을 살짝 묻힌 후 순식간에 종이 위를 가로지른 듯 거친 풍경이었다. 





나른한 즐거움을 깨버린 건 여전히 몰상식한 누군가의 담배연기였다. 

맞은편 창가의 쪽좌석(중국의 침대기차는 침대칸 반대편 창가에 두 사람이 겨우 앉을 수 있는 접이식 간이 의자와 테이블이 있다)에 앉아있는 남자가 담배를 꼬나물고 있었다. 

여행 5개월째, 남은 건 악과 깡밖에 없다. 

당장 삿대질을 했다.



"차 안에서 금연인 거 모르오?'  



봉두난발한 머리, 덥수룩한 수염, 결코 유쾌하지 않은 모습의 청년이 대거리를 하니, 흠칫 놀란 눈치다. 

남자는 대답을 피한채 시선을 흘끗거리며 '젊은 놈이 까부는구나'라는 하는 눈초리를 보냈다. 

잠시 무언의 대화가 오갔고, 나는 '넌 나이 든 놈이 나잇값도 못하고 자빠졌구나'하는 사인을 보냈다. 

남자는 잠시 울그락불그락하더니 결국은 툴툴거리면서 일어나 기차 연결칸으로 나갔다. 


구이린 역에 닿은 시간은 오후 8시였다. 

고속철도가 전국에 깔린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만만디'의 상징 같은 열차 여행이었다. 






구이린. 2003


동생을 만나기로 한 날보다 이틀 먼저 도착했다. 

외로움이 사무쳤었던 건지, 쓸데없이 흥분해서 중간 일정을 꽤 많이 건너뛰었다.

구이린에서 멍하니 하루를 보내고 난 후에야 실수했다는 걸 깨달았다. 

컨디션을 조절하고 구이린의 지리도 익힐 생각으로 자전거를 한 대 빌려 월량산(月亮山)으로 향했다. 

비포장도로는 차선 구분 없이 차와 자전거, 사람이 뒤엉키는 시골길이었다.

다행히 도로 위에는 사람도, 자전거도, 차도 별로 없었기에 느긋하게 구이린의 풍경을 감상하며 달렸다. 

중간에 잠시 멈춰 사진을 찍고 있는데, 옆을 지나치던 아가씨 하나가 카메라를 들고 와서 말을 걸었다.



"저... 사진 좀 찍어 주실래요?"  



한국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신기한 것은 이역만리 중국땅에서, 누구보다 더 이국적인(괴상한) 외모로 돌아다니던 나에게 한국어로 말을 걸었다는 사실이었다. 

중국어도, 영어도, 일본어도 아닌 한국어.

그간 중국인들의 모진 학대와 대륙의 거친 풍토에 시달려 인간의 몰골을 상실했다고 생각했었는데, 아직 한국사람 특유의 무언가는 남아있었다는 사실에 흐뭇했다. 



"한국사람인지 어떻게 아셨어요?"  



하고 상냥하게 되물었더니 아가씨가 자전거에서 굴러 떨어졌다. 



"한국분이셨어요?"  



빌어먹을. 

용감하게 구이린까지 배낭여행 온 아가씨는 중국어는 한 자도 모르거니와, 중국땅에서 영어가 무용지물이라는 사실을 처절하게 경험한 후였다. 

어차피 무슨 말을 하든 못 알아들을 건 당연지사, 카메라를 들이대면 대충 의도를 알 테니 별생각 없이 던진 말이었다. 


정말로 지쳐버린 몸과 마음을 추슬러 숙소에 들어오니 옆 침대에 묵고 있던 일본 여행객의 배낭에 한국산 치약이 삐져나와 있는 게 보였다.
일본인이 아니었다. 

남 탓 할 계제가 아니었다. 








동생을 맞이하러 구이린 공항으로 향했다. 

비행기가 지연되는 건 일상이라, 입국장에서 한 시간을 기다린 후 마침내 1년 만의 상봉이 이뤄졌다. 

동생은 의기양양하게 '맨 마지막'에 나왔다. 

형제 상봉의 현장은 충격과 공포의 도가니였다.

동생은 불과 거지꼴로 변해버린 내 모습에 경악을 금치 못했고, 난 돼지가 되어버린 놈의 모습에 어이가 없었다. 

입시가 힘들었던 탓일 거라고 생각하며 속으로 '놀리면 안 돼'라고 수도 없이 되뇌었다. 

동생 역시 '이런 괴상한 몰골을 한 놈과 같이 다녀야 하는 건가?'라는 눈치가 다분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동생에겐 선택지가 없었다. 


이제 막 성인이 되어, 처음으로 해외에 나온 동생은 모든 게 신기했다. 

구이린의 풍광에 넋을 잃고 돌아다녔고, 만나는 사람에게는 예의 바르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그리고 그런 인사를 받는 중국인들은 어리둥절해했다. 

한국에서처럼 깍듯하게 인사할 필요 없다고 알려줬지만 하루이틀에 고쳐질 버릇은 아니었다. 

동생의 하루는 좌충우돌의 연속이었고, 보고, 듣고, 맛보고, 느끼는 모든 것에 흥분했다. 

그런 동생에게서 여행 초기의 내가 보였다. 

여행 초의 설렘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고, 계획한 루트를 완주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떠돌고 있는 듯했다. 

문득 '이렇게 다니는 게 의미가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목표는 중국의 국경선을 따라 대륙을 일주하는 것이었다. 

구이린 이후에도 푸젠성을 지나 상하이를 거쳐 베이징까지 가야 했지만, 더 이상 여정을 계속하는 게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동생을 통해 가족의 소식을 듣고 나니 갑자기 맥이 풀렸다.

향수병이 찾아왔고, 여행을 마무리해야 할 때라는 것을 깨달았다. 

사흘간 동생의 충실한 가이드로 지낸 후, 미련 없이 배낭을 쌌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상해. 2003. 집으로 워프!







Epilogue, 약속된 귀환




#1


구이린에서 짐을 싼 후, 상하이를 거쳐 하얼빈으로 돌아갔다.

1년 6개월을 지냈던 하얼빈사범대학 유학센터에 들러 친구들을 만나 근황을 전했고, 편의를 봐준 학교 측에 감사를 표했다. 

학교 측은 기꺼이 유학생 기숙사의 남아있는 방을 숙소로 쓸 수 있도록 배려해 줬다. 

짧은 휴식을 마치고 귀국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인천공항 입국장에는 동생이 아버지를 모시고 나와있었다.

아버지는 거대한 카트를 밀고 다가서는 나를 알아보지 못하셨다.

동생은 이후 일어날 일을 상상하며 빙글빙글 웃고 있었다.


"다녀왔습니다"


앞에 멈춰 서서 인사를 드리니 아버지께서 소스라치게 놀라셨다.

뽀얗던 아들이 영화에 나올 법한 연변 개장수 같은 몰골로 나타나니 말문이 막히신 듯했다.


"... 고생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잠시 고민하신 아버지는 짧게 소감을 표현하셨다. 

집에 돌아오니 지난 시간들이 꿈만 같았다. 





#2


돌이켜보면 여행을 결심했던 계기는 일상을 벗어나고픈 욕망이었다. 

사스 봉쇄령으로 학교에 갇혀 있는 동안 차곡차곡 쌓아 비축한 에너지로 여행을 떠났다.

그렇게 소진한 자리는 경험과 추억을 채워 돌아왔다. 

탈진하기 전에 돌아와서 다행이었다. 

여행이라는 행위가 일상이 되고, 미지에 대한 동경과 경이가 퇴색하면서 사람이 변해갔다.

활력 넘치던 청년은 우중충한 눈빛의 한량이 됐다. 

한때 길 위의 삶을 꿈꿨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삶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집으로 돌아갈 결정을 내린 후 온몸에 차오르던 설렘과 에너지를 잊지 못한다. 

여행은 돌아갈 곳이 있을 때 의미가 있다.

약속된 귀환이 없으면 여행이 아닌 유랑이 된다. 





#3


'중국'이라는 거대한 나라를 여행한 것은 행운이었다. 

우리나라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곳이다 보니, 매 순간이 유의미했다.

중국 자체도 역사적, 정치적, 민족적 이유로 갈등이 있는 곳이고, 우리가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다 보니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멈출 수가 없었다. 

제 3자의 입장에서 당사자간의 입장 차이라는 변수를 고민해야 했고, 나에게는 정의인 것이 타인에게는 아닐 수 있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특히 소수민족과 한족의 갈등을 목도하면서 이 고민은 점점 심해졌다. 


압도적인 규모의 땅덩이를 돌아다니며 내가 알던 세계를 확장한 것도 행운이었다.

오히려 지금처럼 정보가 풍부하지 않았기에 맨몸으로 부딪치고 깨져야 했다. 

이 경험을 통해 세상을 보는 눈이 넓어졌고, 가치 판단의 기준이 명확해졌다. 

비어있는 도화지를 들고 떠났고, 그 위에 다양한 삶의 모습과 인간상을 그려왔다.

그 그림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내 삶에 대입 가능한 유의미한 자료로 변해 내 안에 녹아들었다. 

그 사이 나라는 인격체가 조금씩 성장하는 모습을 발견했다. 

그래서일까? 

어느새 훌륭한 꼰대가 되어버린 중년 아저씨는 만나는 청년들에게 항상 여행을 떠나라고 바람을 넣는다. 

대신, 길게 다녀오고, 많이 보고 오라는 말을 잊지 않는다.

SNS에 인증숏을 찍기 위해 가는 여행도 분명 의미가 있겠지만, 감각의 충족을 위한 여행보다는 사유하는 여행을 하고 오길 바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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