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라도 알아서 다행이다
서기 3세기 후반, 위기에 빠진 로마제국을 다시 일으켜 세운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245~312)가 사랑했던 도시다.
크로아티아 중북부 아드리아해 연안 항구도시로, 규모로는 자그레브에 이어 크로아티아 제2의 도시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이곳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별궁을 지었는데, 나중에는 로마에 돌아갈 생각도 안 하고 그냥 여기 눌러앉아버렸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때부터 중세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도시 곳곳에 역사가 살아 숨 쉰다.
건물, 유적이 굉장히 잘 보존돼 있다는 얘기다.
그리고 그 유적이 현재 스플리트 사람들의 생활 속에 들어와 있다.
사람들은 디오클레티아누스 지하 궁전에 기념품 가게를 냈고, 열주광장 옆 오래된 건물을 카페테리아로 쓰고 있다.
심지어 열주광장은 노천 카페다.
열주광장 옆 성 도미니우스 교회는 지금도 교회로서 기능한다.
꼬불꼬불 미로 같은 골목은 사람을 홀린다.
이 길로 들어가면 어디가 나올까, 이 길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상상력을 자극한다.
두브로브니크 같은 아름다움과 여유는 없지만, 이 도시는 더 활기차고, 더 고풍스럽다.
자다르를 떠나 크로아티아 국토를 종으로 가로지르는 A1 고속도로에 올라탔다.
창 밖 풍경은 분 단위로 변했다.
저 멀리 구름을 머리에 인 설산이 보이더니 한 굽이돌고 나면 어느새 바다가 옆에서 달렸다.
자그레브에서 자다르까지 여정은 즐겁긴 해도 설레진 않았다.
하지만 이 길은 달랐다.
크로아티아 여정 중 길에서 보는 풍경이 가장 좋은 구간이었다.
사진으로 본 크로아티아는 온통 아드리아해 사진뿐이었는데 좀 놀랐다.
도로 끝에 어렴풋이 스플리트가 보이기 시작했다.
뜨거운 햇살을 받은 도로 위에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도로변에 늘어선 상자 같은 건물들과 외벽에 적힌 아기자기한 글씨들을 보는 순간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숙소는 구시가지 중심가인 라바거리에서 도보로 10분 정도 거리에 있는 주택가였다.
에어비앤비를 통해 아파트 한 채를 통으로 빌렸다.
화장실, 주방, 세탁실까지 제대로 갖춘 집에서 잠시 여행을 멈춘 기분을 느꼈다.
매일 저녁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장을 봐 다음날 식사를 준비했다.
밀린 빨래를 세탁기에 돌려 뒷마당 빨랫줄에 널었다.
따가운 햇살 덕분에 빨래는 반나절 만에 말랐다.
바스락 거리는 빨래를 개면서 뿌듯한 행복을 느꼈다.
아내와 무슨 얘기를 해도 재미있었다.
별 것 아닌 일에도 킥킥대며 웃었다.
나른한 바닷바람 때문이었을까?
나는 조급하지 않았다.
더 이상 아내를 끌고 다니지 않았고, 때로는 아내가 나를 이끌었다.
나사가 하나 빠진 듯했지만, 오히려 아내와 리듬이 맞았다.
생각해 보니 아내와 마지막으로 다툰 게 언제인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파트를 나서서 구시가지로 들어섰다.
거대한 가로수 아래 둥글게 녹지가 조성돼 있었다.
녹지 경계는 대리석으로 둘러 경계를 쳤다.
따뜻하게 데워진 돌 위에 고양이들이 늘어져 있었다.
풀밭 위에도 고양이 여남은 마리가 한가로이 낮잠을 즐기고 있었다.
벤치에 앉은 사람, 지나는 사람들 따위 신경 쓰지 않고 나른했다.
지나는 사람 몇몇이 관심을 끌어보려 갖은 애를 썼지만 녀석들은 요지부동이었다.
풀밭 곳곳에 사람들이 놓아준 사료와 깨끗한 물이 놓여 있었다.
스플리트 구 시가지를 돌아다니다가 희한한 고양이를 만났다.
통통한 아메리칸 숏헤어였다.
서문 시계탑 아래, 인파로 북적이는 복잡한 교차로 구석에 놈은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사람에 대한 경계심 따위는 없었다.
한번 늘어지게 하품을 한 녀석은 천천히 사람들과 보조를 맞춰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근성안'을 굴리며 느긋하게 걷는 모습은 고양이가 아니라 작은 호랑이었다.
이윽고 시계탑 앞 광장에 도착한 녀석은 광장 한가운데 벌러덩 드러누워 행인들 시선을 독차지했다.
사람들이 턱을 긁어주면 낮게 고르릉거렸다.
늦은 오후 햇살을 즐기던 녀석은 주인과 산책하던 개들이 짖는 소리가 귀찮았던지 능글맞게 자리를 떴다.
길고양이가 행복한 곳은 사람도 행복한 곳이리라.
스플리트 구 시가지를 대책 없이 쏘다녔다.
이제까지 여정은 어쩔 수 없이 정해진 루트를 따라야 했다.
스플리트는 달랐다.
도시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있는 곳이었다.
발길 닿는 대로 돌아다니면서 도시 분위기를 느껴보고 싶었다.
생각은 가상했으나 현실은 달랐다.
여행을 준비하면서 워낙 자료를 많이 본 탓이다.
거리가 너무도 익숙했다.
<꽃보다 누나>를 괜히 봤다는 생각을 했다.
어디를 가도 영상으로 본 화면을 확인하는 절차 같았다.
다행히 스플리트는 내 예상보다 더 다채로운 곳이었다.
골목 깊이 들어갔을 때 비로소 이 도시의 진면목이 보였다.
대로변 번듯한 건물 사이를 고대 벽돌 건축 잔해가 연결하고 있었다.
오래된 건물은 지지력이 약해진 탓인지, 건물 사이에 굵은 목재를 X자 형태로 받쳐 놨다.
얼핏 보면 독일에서 본 중목구조 건축물 뼈대를 보는 듯했다.
사람들은 이 지지대 사이에 화분을 놓거나 빨래를 걸어놓았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곳, 스플리트라는 도시의 정체성이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도시를 세운 건 약 1800년 전이었다.
황제가 죽은 뒤 도시는 버려졌다.
그리고 7세기에 슬라브족이 스플리트 역사에 등장했다.
사람들은 이민족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 궁전 건물 폐허에 숨었다.
나중에는 부서진 궁전 잔해를 이용해 집을 지었다.
그 결과 고대 유적과 사람들 생활 터전이 뒤섞인 묘한 풍경이 만들어졌다.
이런 삶의 방식은 중세를 지나 현대까지 이어졌다.
지금도 사람들은 디오클레티안 궁전에 기대 삶을 살아가고 있다.
디오클레티안 궁전 지하는 기념품 상인들이 점령했다.
디오클레티안 궁전 Dioklecijanova palača과 열주광장 Peristyle은 스플리트에서 가장 유명한 랜드마크다.
궁전은 서기 295년 착공해 305년에 완공했다.
원래는 아파트 7층 높이 외벽이 있었다는데 전란과 세월의 풍파를 못 이기고 허물어졌다.
궁전 안쪽 열주광장은 기둥이 늘어선 광장이라 '열주(列柱)' 광장이라고 부른다.
자다르 포룸도 형태를 보건대 이런 식이 아니었을까 싶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로마 입장에서는 성군이었겠지만 기독교 신자에게는 폭군이었다.
황제는 기독교 신자를 박해했다.
그는 이곳에서 말년을 보냈고 죽은 뒤에는 궁전 지하에 묻혔다.
황제가 죽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니케아 공의회(325)가 열렸다.
로마 제국은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했다.
기독교 신자들은 황제를 잊지 않았다.
그들은 황제의 무덤을 파내고 그 자리에 교회를 세웠다.
열주광장 옆, 종탑 아래 자리한 '성 도미니우스 성당'이 바로 그 교회다.
그리고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유해는 사라졌다.
열주광장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뻗은 골목은 던전이었다.
어른 두 사람이 어깨를 나란히 하기도 버거운 골목이 거미줄처럼 이어져 있었다.
놀랍게도 그 골목 구석구석에 작은 가게들이 문을 열고 있었다.
후미진 뒷골목 오래된 문 옆에는 숙박을 표시하는 'Apartman' 팻말이 붙어 있었다.
간혹 길을 지날 때 그 문을 열고 사람이 튀어나와 깜짝 놀라곤 했다.
때로는 하염없이 걷다가 좁은 골목을 비집고 들어온 햇살에 걸음을 멈추곤 했다.
반들거리는 돌길에 부딪친 햇살은 부드럽게 확산하며 골목을 비췄다.
스플리트 골목은 미로였고 지도는 무용지물이었지만 구글맵은 훌륭하게 길을 찾아냈다.
하지만 스마트폰을 끄고 이 길에 들어섰을 때, 스플리트의 진짜 매력이 느껴졌다.
다음 골목 끝에는 뭐가 있을까 기대가 됐다.
골목을 헤매고 다니는 동안, 길이 눈에 익는 게 아쉬웠다.
이 기대감, 신비로움이 점점 퇴색되는 게 싫었다.
열주광장 옆에 지붕에 천장이 뚫린 돔을 얹은 건물이 있었다.
과거에는 황제를 알현하려는 사람들이 대기하던 장소였다.
구조상 천연 리버브가 기가 막히게 걸렸다.
메아리를 시험하듯 사람들은 벽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소음이 사방으로 흩어져 정신 사납던 와중에 정장을 차려입은 남자 넷이 들어와 건물 가운데 섰다.
굵은 베이스가 목청을 가다듬자 사람들 이목이 집중됐다.
남자들은 잠시 음정을 맞추더니 합창을 시작했다.
음울하면서도 장중한 가락이 박력 있는 중창단 목소리와 잘 어울렸다.
건물 벽에 부딪친 소리에 자연스럽게 리버브가 걸렸다.
기름을 끼얹은 듯 매끈한 소리가 골목으로 퍼져나갔다.
그 소리에 홀린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노래가 끝나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박수를 쳤다.
테너가 씩 웃더니 CD를 꺼내 돌렸다.
샀어야 했다.
아직도 못내 아쉽다.
열주광장 뒤편으로 돌아 나오니 왕궁 유적이 한눈에 들어왔다.
폐허가 된 건물 외벽에 10대 소녀들이 올라가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느낌이 묘해 사진 한 장 찍어도 되겠냐고 양해를 구했다.
소녀들은 '모델'이라는 말에 박장대소했다.
흔쾌히 허락한 소녀들은 내 기대와 전혀 다른 포즈를 취해줬다.
어쩐지 너무 잘 풀린다 싶었다.
해가 저무는 리바 거리 노천카페에 앉아 아내와 긴 대화를 나눴다.
독일을 지나면서 극에 달했던 갈등을 서로 어떻게 해결했는지 허심탄회하게 털어놨다.
난 나도 모르게 아내에게 내 기준을 들이대고 있었다.
아내는 내 감정 기복 폭과 변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힘들어했다.
우리 두 사람은 생각과 행동의 속도가 심하게 달랐다.
외부 자극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나와 달리 아내는 철저하게 자기 페이스를 지키고 주변의 변화를 필터링했다.
이 때문에 사고의 전환, 생각의 전개 속도가 차이를 보였다.
그 간극은 생각보다 컸다.
서로 "저 인간은 왜 저러는 걸까?"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한 달 동안 하루에도 몇 번씩 날카로운 긴장감을 맛보고 난 끝에 겨우 깨달았다.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충고를 참 많이도 들었는데, 그게 무슨 소린지 그제야 알 것 같았다.
해가 넘어가고 리바 거리의 본모습이 드러났다.
아이들을 놀리는 어릿광대가 돌아다니고, 맥주를 든 엄마, 아빠는 그 모습을 보며 박장대소했다.
흥겨운 공기가 거리를 타고 넘실거렸다.
사람들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했고, 여기저기 와인잔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깔깔대는 아내 얼굴이 10년은 어려진 듯했다.
술 한 잔의 기운을 빌리지 않았어도, 도시의 여유로움이 마음을 누그려뜨렸다.
여행의 묘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