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기환 May 10. 2024

달챙이와 아픈 손가락

   어린 시절로 이끄는 소중한 물건이 있다. 싱크대 서랍장에 보관되어 있는 숟가락 하나다. 어른들 입에도 큰 이 숟가락은, 15센티미터 정도 길이에 뭉툭하고 움푹 파인 볼이 반쯤은 닳아 있다. 앞면에는 U.S.라는 글자가 굵게 박혀 있고, 뒷면에는 제작회사와 연도로 보이는 ‘NS Co. 1954’라는 글자가 희미하게 남아 있다. 아마도 미군들이 쓰던 물건이었을 거라는 추측을 해본다. 할머니는 이 숟가락을 ‘달챙이’라 불렀다. 지금은 양식당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지만,  어린 내 눈엔 여느 숟가락과 모양과 크기가 다른 것이 마냥 신기했다. 한 번은 할머니에게 숟가락에 쓰인 글자가 뭐냐고 물었다.

할머니의 달챙이

“우리글도 모르는데, 꼬부랑글씨를 할미가 어떻게 알어...... “   

할머니는 영어를 꼬부랑글씨라 했다. 그래서 나는 이것을 ‘꼬부랑 숟가락’이라 불렀다. 이 물건이 어떻게 우리 집으로 들어오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달챙이는 내 유년과 할머니를 이어주는 아련한 통로로 남아 있다.


  할머니의 기일을 맞아 익산 춘포에 있는 선산에 갔다. 오늘도 할머니가 돌아가신 그날처럼 무덤가에 진달래꽃이 지천으로 널려 있다. 연분홍 속살이 바람에 한들거리는 진달래는 그리운 사람의 손짓인 양 애달프다. 무덤은 고향 마을 창뜰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선산 맨 위쪽에 할아버지와 나란히 자리를 하고 있다. 그 아래로 자식 다섯 형제 중 돌아가신 네 분의 아들 내외가 오순도순 자리를 잡았다. 딸 하나는 살아생전 이곳을 찾을 때마다 어머니 무덤가에 묻히고 싶다고 했지만, 출가외인은 그 집 선산에 묻혀야 한다는 유교적 관념 때문에 그 소원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할머니의 다섯 아들 중 유일하게 살아 계신 막내아들이 여든일곱의 내 아버지이다. 오늘 그 막내아들과 며느리, 그리고 막내아들의 장남인 나와 아내, 이렇게 넷이서 선산에 앉아 있다.  할머니의 봉분은 쪽진 머리에 비녀를 꽂아 가지런히 단장하셨던 생전의 얼굴처럼 동그랗고 아담하다. 무덤 주변에 함초롬히 핀 꽃 잔디는 할머니의 미소처럼 예쁘다. 1896년생인 그녀가 이곳에 묻힌 지도 어언 삼십여 성상이 흘렀다.

선영의 창뜰

  아득한 기억의 끄트머리에서부터 나와 함께 존재하는 그분이 할머니이시다. 두 살, 다섯 살 터울인 동생들과 나는 어린 시절부터 할머니 손길 없이 하루를 온전히 지낸 날이 없었다. 당시 우리 집은 논 두 마지기에 밭뙈기 한 두락 일구는 것이 살림살이의 전부였다. 농사 이외에는 별다른 일이 없던 시절, 아버지는 생활력이 강한 어머니의 보따리 장사를 말리지 못했다. 매일 새벽 보따리를 이고 나가는 어머니를 대신해서 우리 삼 형제는 늘 할머니 손에서 컸다. 구잡스럽기 그지없었던 우리 삼 형제 뒤치다꺼리로 할머니는 온종일 허리를 펴실 시간이 없었다.


  할머니에게 아픈 손가락 둘이 있었다.  어느 손가락 깨물어 아프지 않은 손가락이 없겠지만, 할머니에게는 막내인 나의 아버지가 첫 번째 아픈 손가락이었다. 해방되기 전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아버지는 고등학교 2학년이었다. 일찍 결혼시켜 그런대로 먹고 살만 했던 다른 아들들과 달리, 아비 없이 눈칫밥 먹는 어린 막내가 애달프고 아팠을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 아픈 손가락은 다른 자식이 아닌 손자였다. 그것도 막내아들의 장남인 나였다. 유난히 병치레를 했던 내가, 하필 함께 사는 아픈 손가락의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할머니에게는 스무 명이 넘는 손자 손녀들이 있지만 나에 대한 사랑은 유별났다. 고기는 명절 때나 구경했던 시절, 할머니는 나를 부엌으로 몰래 불러, 건더기는 전혀 없는 멀건 고기국물을 주시곤 했다. 하루는 큰집에서, 어느 날은 외갓집에서, 어떤 날은 옆집에서 준 닭국물이라며 동생들 보기 전에 어서 마시라는 할머니의 재촉과 함께 국물은 후루룩후루룩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것은 닭 국물이 아니라 개구리를 삶은 국물이었다. 몸이 약한 나를 위해 닭 국물로 속여 먹이던 할머니가, 그때도 이 큼직하고 움푹 파인 달챙이로 국물을 맛보시고 뜨겁지 않을 때까지 후후 불어 주셨다.  또 곡식이 귀해서 숭늉으로 배고픔의 반은 달래던 시절, 우리는 누룽지도 그리 맘 놓고 먹을 수 없었다. 할머니는 내가 밖에서 놀다가 배고파 돌아올 때면 살강에서 누룽지를 몰래 꺼내 주셨다. 쇳소리가 나도록 가마솥을 닥닥 긁어 누룽지를 만들고, 고구마를 먹을 때면 혹시나 체라도 할까 김치 국물을 떠 넣어 주시고, 백지장처럼 얇은 내 배를 쓰다듬으며 들기름 한 숟갈 가득 따라 먹이던 것도 달챙이었다. 달챙이는 어릴 적 내  배고픔을 달래 주는 요술 숟가락이었고, 할머니와 나와의 은밀한 비밀 숟가락이었다.

우리 할머니

  아버지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효자였다. 아픈 손가락 막내아들이 밥 먹고 사는 것을 직접 챙겨주고 싶었던 할머니는, 밥술이나 뜨는 큰집을 마다하고 막내아들이 결혼하면서 함께 살았다. 그러나 없는 집의 효자는 며느리를 힘들게 한다는 옛말이 맞았다. 내가 국민학교 5학년 때 중학교 무시험이 발표되자, 아버지는 시골살림을 청산하고 자식들 공부는 시켜야 한다는 일념으로 서울로 이사했다. 방 한 칸뿐인 전세방이었지만, 효자인 아버지는 형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할머니를 모시고 서울로 왔다. 그것은 할머니의 아픈 손가락 가슴을 더욱 시리게 하는 서곡이었다. 서울에 와서도 여전히 장사를 해야만 했던 어머니를 대신해서 할머니의 달챙이는 늘 바빴다. 가마솥에서 양은솥으로 바뀌었을 뿐, 달챙이는 우리 식구들의 끼니를 위해 솥을 긁고 또 긁었다.

 

  서울에 이사 온 지 2년 여가 지난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오니 할머니가 안 계셨다. 아버지한테 미리 얘기하면 타협이 될 리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큰아버지가 편지 한 통 남겨두고 할머니를 불쑥 고향으로 모시고 내려간 것이었다. 저녁때  돌아와 상황을 파악한 아버지는 소주잔을 기울이며 흐느껴 우셨다. 우리 삼 형제는 아버지의 설움보다는 할머니의 부재가 서러워 따라서 울었다. 어머니는 말없이 고개만 떨구고 계셨다. 그 이후 조금 살림살이가 나아져 방 두 칸 있는 집으로 이사를 했을 때, 아버지는 할머니를 또 서울로 모셨다. 그러기를 여러 차례 반복하다가, 막내아들이 보란 듯이 밥 먹고 살고, 내가 취직해서 결혼하는 것까지는 보고 싶다던 할머니의 소원은 아픈 손가락들의 가슴에 묻은 채 질곡 많은 구십 평생 삶을 마쳤다.


할머니의 서른세 번째 기일을 맞아 산소에 다녀온 두 아픈 손가락이 마주 앉아 말없이 소주잔을 기울이고 있다. 오늘은 달챙이도 식탁에 함께 했다. 어릴 적 그때는 몰랐다. 이 달챙이로 가마솥과 양은솥을 긁을 때마다 할머니의 가슴이 얼마나 아프게 긁혀 내려갔을지를.....  

달챙이로 떠먹이던 개구리 국물과 김치 국물, 그리고 들기름 한 숟갈이 할머니의 깊고 절절한 사랑이었다는 것을.....


달챙이로 김치 국물 한 숟가락 크게 떠서 안주 대신 마셨다. 내게는 할머니이고 추억인 달챙이가 아직도 나에게 사랑과 그리움을 떠먹이고 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