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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기환 Apr 21. 2024

한인 사회와 교회

"아빠! 오늘 점심은 오로라에 있는 시푸드 뷔페 어때요? 그곳에 크랩이 나온대요!" 딸아이가 신이 나서 묻는다. 어제 아빠가 좋아하는 크랩을 못 먹은 것을 안타깝게 생각해서 애써 찾아낸 음식점이라 했다. 어차피 오로라로 가야 하는데 잘됐다 싶었다.


오로라는 덴버시내에서 가까운 외곽에 위치하고 있는 지역으로, 이곳에는 대형 한인 마트가 있고, 한국인이 운영하는 음식점도 여러 개 있어 자주 찾던 곳이다. 덴버에는 우리 교민들이 많이 살고 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약 2만 명 이상이 거주한다고 하니 작은 숫자는 아니다. 특히 이곳 오로라에 한인들이 많다. 

 

시푸드 뷔페에는 꽤 많은 사람들이 북적이고 있다. 입구에 들어서니 익숙한 모국어가 들린다. 나이 지긋한 분들이 입구 쪽에 자리를 하고, 걸쭉한 목소리로 정담을 나누고 있다. 부부 동반 모임인 듯한 그분들의 모습이 한국 어느 식당의 풍경 같아 낯설지 않다. 넉넉하고 여유로워 보이는 그분들을 보며, 낯선 이국 땅에서 성공적으로 정착하신 분들일 거라는 느낌을 받기에 충분했다. 

자리를 잡고 앉으니, 우리 바로 옆자리에도 한국 분들이 앉아서 식사를 하고 있다. 그들은 서로에게 "집사님, 권사님, 전도사님!" 호칭을 쓰며 조용조용 대화를 나누고 있다. 같은 교회에 다니는 분들의 외식 자리인 게 분명했다. 식당 안에는 각양각색의 얼굴과 언어를 가진 사람들로 북적이지만, 그 시끄러운 가운데에서도 우리말은 편하고 자유롭게 들린다. 같은 언어를 쓴다는 것은 자연스럽게 마음을 하나로 묶는 매개체라는 것을 해외에 나올 때마다 절실하게 느낀다. 


음식은 가격 대비 괜찮았지만, 우리가 기대한 크랩은 저녁에만 제공된다고 한다. 어쩐지 크랩이 제공되기에는 가격이 저렴하다 싶었다. 결국 이틀 연속 크랩을 먹는 데는 실패하고 말았지만, 아이들의 기특한 마음을 그룻에 가득 담아 배불리 먹었다.


 식사를 마치고, 바로 옆에 위치한 한아름마트(H Mart)로 갔다. 이곳은 한국인이 운영하는 대형 마켓으로, 우리가 덴버에 가기 전부터 운영되던 곳이다. 이 마켓에는 한국에서 구할 수 있는 것은 거의 다 있다. 김치는 물론, 고추장, 간장을 비롯해서 라면, 국수, 김, 미역, 청국장, 된장, 족발, 소주까지, 그야말로 없는 것 빼고 다 있다. 이 마켓 덕분에 나는 한국에서 먹던 식습관대로 음식 걱정 없이 살았다. 지금은 아시안계 고객을 위한 마켓으로 많이 확장이 되어, 중국, 태국, 베트남 등 상품들도 많이 진열되어 있다. 특별히 살 것은 없었지만, 그때의 추억을 떠올리며 아이들과 함께 두어 바퀴 돌았다. 마켓 안에는 한국인들도 제법 많이 보인다. 혹시 그 옛날 교회에 함께 다니던 교민을 만날 수 있을까, 하는 마음으로 두리번거려 봤지만, 아쉽게도 그런 우연은 없었다.


한국인 식당과 한아름마트

한아름마트를 나와 우리 가족이 2년간 다녔던 교회로 향했다.

덴버 시내 주택가에 자리한 이 교회는 당초 200명이 넘는 신도를 가진 미국인 교회였으나, 백인들이 덴버 외곽으로 더 나은 환경을 찾아 떠나면서 한국인 목사님이 맡아 운영해 온 교회였다. 이 교회에는 유학을 온 우리 가족 이외에는 대부분 인근에 사는 교민들이었다. 50여 명의 신도들이 이 교회를 통하여 서로의 외로움을 나누며 작은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었다. 

주일이면 교인들이 각자 조금씩 음식을 해가지고 와서, 예배가 끝나면 함께 모여 식사를 했다. 매주 함께 식사를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서로를 알게 되고, 예배만 보고 헤어진다면 느끼지 못할 정이 쌓여갔다. 그러면서, 우리 가족은 이민 온 한국인들의 삶을 조금은 알 수 있었다. 주유소, 옷가게, 리커(Liquer), 모델 등을 운영하며 안정적인 삶을 영위하고 있었지만, 초창기 먼 이국 땅에서 겪은 척박했던 삶의 예기를 들을 때는 사뭇 숙연해지기도 했다. 


우리 가족은 가끔씩 그분 들의 집에 초대를 받기도 했다. 넓은 잔디 정원을 가진 전원주택은 나의 마음을 홀딱 빼앗아 버렸다. 지하에 스크린을 갖춘 작은 비디오룸과 오디오룸이 있고, 호수를 바라보며 여유 한 잔 마실 수 있는 '와인 바'를 갖춘 집도 있었다. 좁은 아파트 생활이 대부분인 한국에 비하면, 그런 멋진 주택에서 산다는 것은 부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그날이 오기까지 겪었을 그분들의 절절한 아픔과 사연들이 집 곳곳마다 녹아있었을 것이었다.


타국에서 명절을 맞을 때면 괜스레 마음이 허전하고 쓸쓸해졌다. 나는 추석과 설 명절이 되면, 서울에 계신 부모님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연세가 있으신 몇 분들께 과일 등 작은 선물을 보내드렸다. 그분들은 한국을 떠난 이후 명절을 잊고 산지 오래되었다며, 작은 선물에 그리 고마워할 수 없었다. 그러나 우리 가족이 그분들에게 받은 정에 비하면 너무 작은 것일 뿐이었다. 


우리가 다니던 교회

붉은 벽돌로 지어진 교회 건물은 변한 것 하나 없이 우뚝 서있는데, 출입구에 붙여진 'Highlands Church'라는 하얀 간판을 보는 순간, 처음 보는 건물처럼 낯설게 느껴졌다. 교회는 굳게 닫혀 외부인의 출입을 허락하지 않고 있다. 사람이 없는 건물은 을씨년스럽고 차갑기까지 하다.

햇살 따스한 날이면 함께 음식을 나누며 야외 예배를 보던 뒷마당의 간이시설도 모두 철거되고 없다. 내가 석사학위를 받던 날, 이곳에서 목사님과 교인들이 고기를 굽고 음식을 장만해서 축하연을 열어 주기도 했었다.

이 교회 담임 목사님은 우리가 떠나고 몇 년 후에 시카고로 이주를 하셨다는 얘기를 들었다. 지금까지 그분이 계신다면 함께 예배 보며 정을 나눴던 분들을 만나볼 수 있으련만, 아무도 없다.  

20년이 흐른 지금, 그분들은 어떤 모습으로 살고 계실까? 

덴버에 정착한 후 제대로 한 번 쉬어본 적 없이 열심히 살아왔다던 그분들은 지금도 이곳에 뿌리를 내리고 잘 살고 계시리라......  


아련한 기억 저편에 있는 텅 빈 교회를 바라보며, 푸른 하늘에 흘러가는 구름같이 덧없는 세월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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