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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기환 Apr 23. 2024

콜로라도대학교


콜로라도주립대학교(University of Colorado)는 유수한 전통을 가진 대학으로, 볼더와 덴버, 콜로라도 스프링스 등  3개의 캠퍼스를 가지고 있다. 볼더 캠퍼스는 1876년 설립되어 150년의 전통과 3만여 명의 학생이 다니는 메인 캠퍼스로, 로키마운틴 바로 아래 자리잡고 있어 안온한 분위기에 경관이 수려하다.

내가 다닌 곳은 덴버 시내에 자리하고 있는 덴버 캠퍼스이다. 1921년 설립되어 1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현재 1만5천여명의 학생들이 있다. 나는 이곳에서 공공행정학 석사과정(MPA)을 수료했다.

볼더 캠퍼스 전경과 덴버 캠퍼스 상징 건물


유학 자격을 얻기 위해서는, 먼저 직장에서 자체적으로 실시하는 유학 자격 심사를 통과해야 했다. 당시, 나는 읽고 쓰는(Reading & Writing)데는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지만, 듣고 말하는 데는 많은 한계가 있었다. TOEFL 시험에서 듣기(Listening) 평가는 나를 너무 힘들게 했다. 영어 회화공부를 위해 새벽반 학원에도 다녔지만, 바쁜 업무로 인해 빠지기 일쑤였다. 유일한 보조 수단이 당시 유행했던 일명 '찍찍이'라는 휴대용 카세트였는데, 듣기공부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안들리는 부분이 있으면 후진 버튼을 눌러 그 부분만 반복적으로 들을 수 있었다. 누를 때 마다 찍~ 찍~ 하는 테이프 마찰음이 신경을 거슬리게 했는데, 그래서 별명이 찍찍이였다. 휴일은 물론, 출퇴근 시간을 활용해 귀가 멍멍할 때까지 듣고 또 듣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최선을 다한 결과, TOEFL과 TEPS 테스트에서 일정 점수를 획득하고 직장에서 유학 자격 심사를 통과했다. 그때 유학생으로 선발된 10명의 직원 중에서 내가 최고령이었다. 이듬해 콜로라도주립대학교로 부터 입학 허가를 받았으나, 여전히 듣고 말하는데는 한계를 가지고 유학을 떠났다.


나의 대학원 첫 수업은 교양과목인 경제학이었다. 20여 명의 수강생이 함께 하는 강의실에 한국 학생은 없었고, 중국, 인도인으로 보이는 아시안계 두어 명 외에는 모두 이곳 학생들이었다. 오리엔테이션 정도로 가볍게 시작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나는 첫날부터 엄청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교수님은 긴단한 자기 소개를 마치더니, 곧바로 수업에 들어갔다. 한국 말로 해도 어려운 경제학 강의를 영어로 이해한다는 것은 기대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강의 시간 내내 나는 좌절감과 맨붕에 빠져있다가, 강의실을 나오면서 앞으로 헤쳐나갈 일을 생각하니 아득하기만 했다. 그날부터 나는 엄청난 스트레스와 함께 예습을 하는데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했다. 각 과목별 진도에 맞춰 미리 교재를 읽고, 나름대로 요점을 파악한 후 강의를 들었다. 조금씩 강의가 귀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미국의 대학원은 교수의 강의 만이 전부가 아니었다. 그룹별 토론을 하고, 수시로 질문을 던지며 격의없는 질의응답으로 수업이 진행되기 때문에 수업 내내 긴장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나는 미리 토론할 내용과 예상 질문을 정리해서 암기를 하고, 원고 없이 말이 자유로워질 때까지 반복해서 연습을 한 후 수업에 참여했다. 그래야만 그나마 그들의 토론에 낄 수가 있었다.


과목 별 주제 발표(PT)는 더욱 나를 곤혹스럽게 했다. 특히, 프리젠테이션 과정에서 예고없이 던지는 교수와 학생들의 질문을 즉석에서 답한다는 건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며칠간 준비과정을 거쳐 PT를 마치고 나면, 나는 거의 기진맥진 상태가 되곤 했다. 게다가 수시로 닥치는 시험, 리포트 제출에서도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런 과정을 겪으면서 한학기가 지나니 수업에 대한 두려움이 조금씩 없어지기 시작했다. 교수와 학생간 대화 도중, 툭 던진 농담에도 함께 웃을 수 있을 정도로 대화가 들리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게 조금씩 적응을 하고 있었다.

졸업 논문 주제는 '서울시와 덴버시의 홈리스(Homeless) 정책 비교 연구'였다. 당시 서울시의 1,000만 인구와 덴버시의 200만여 인구와는 비교가 될 수 없는 규모였지만, 홈리스의 수는 12,000여명으로 비슷했다. 그때는 IMF의 여파로 서울시도 노숙자 문제로 골치를 앓고 있었던 때였다.

졸업논문을 쓰는 과정에서 덴버시청의 홈리스 관련 워크샵에 참여하기도 하고, 자료를 구하기 위해 담당자도 만나야 했다. 또, 홈리스 관련 기관에 가서 센터장과 인터뷰도 했다. 이곳 대학원에서는 이런 참여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논문 심사에 통과할 수 있었다. 그렇게 졸업논문까지 무사히 통과하고 학위를 받은 날은 참으로 행복했다. 나는 한국에서도 도시사회복지학을 전공해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때는 직장생활과 병행하며 학업을 해야 했기 때문에 힘들었다면, 이곳에서는 언어의 한계를 극복하는 과정이 너무 힘들었다. 유학생이면 누구나 겪는 과정이겠지만, 캠퍼스를 돌다보니 그 시절의 힘들었던 날들이 이제는 추억으로 다가온다.

덴버 캠퍼스 전경


캠퍼스는 예전과 달리 넉넉했던 공간들이 많이 사라졌다. 못 보던 건물들이 보이고, 주차빌딩도 생겼다. 넓은 잔디 밭으로 여유롭고 포근했던 공간이 많이 줄어들었다는 아쉬움을 감출 수 없었다.

덴버 캠퍼스의 상징 건물인 티볼리(Tivoli) 건물은 여전히 붉은 고색의 미를 띠고 우뚝 서있다. 이 건물은 학생들의 편의를 지원하는 공간과 기프트 샵 등이 들어서 있다. 일부는 양조장이었던 당시의 유물이 간직되어 있고, 직접 양조한 수제 맥주를 파는 카페도 있다. 한낮 오후, 수업을 마친 학생들로 씨끌벅적 소란하다. 젊은 청춘들이 부럽다.

아이들이 이곳에서 파는 수제 맥주 24캔 짜리 한박스를 사들고 나오며, 오늘 밤에 맥주파티를 하자고 한다.

"그래, 오늘 밤은 우리 가족 맥주파티 날이다!!"

맥주  파티

한바퀴를 돌아나와 티볼리 건물 앞 잔디광장에 섰다. 졸업식 날, 이곳은 졸업생들과 축하객의 인파로 가득했었다. 나를 축하해 주기 위해 함께 공부한 인근 대학의 한국 학생들, 그리고 아이들의 튜터였던 단(Don)과 조시(Josie) 선생님도 왔었다. 내일은 단과 조시 선생님을 만날 것이다. 어떻게 변하셨을까? 벌써부터 내일이 기다려진다.


몇 몇 학생들이 한가로이 잔디밭에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다. 전혀 모르는 이국 사람들이지만, 길거리에서 만난 사람과는 달리 왠지 정이 간다. 보이지 않는 끈이라는 것일까?, 생각하며 혼자 웃었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 처럼, 앞으로 수십, 수백년이 흘러도 이 캠퍼스는 늘 젊은이들로 북적대겠지......


또다가끔씩 그리움으로 떠올릴 캠퍼스를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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