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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기환 Apr 19. 2024

블랙호크(Black Hawk)와 겜블링

덴버를 떠난 지 5일 만에 덴버 인근 도시인 블랙호크(Black Hawk)에 다시 돌아왔다.

이곳은 우리 부부에겐 이름만 들어도 아련한 설렘이 있다. 블랙호크는 우리가 살던 집에서 차로 40분 정도 걸리는 곳에 있다. 로키마운틴 계곡, Clear Creek을 따라 구불구불한 도로를 달리다 보면 산속 깊이 자리한 작은 도시, 센트럴시티(Central City)와 블랙호크가 나온다. 이곳은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오지였으나, 1859년 우연히 금맥이 발견되면서 골드러시로 도시(센트럴시티)가 형성되었고, 인접한 블랙호크에는 카지노와 술집들이 자연스럽게 들어서게 되었다. 한 시대의 흥망성쇠를 간직한 도시엔 그 옛날 북적이던 사람들은 가고 없지만, 여전히 카지노 타운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라스베이거스에 비하면 도시의 규모나 카지노 수 등 모든 면에서 비교도 안되지만, 그 옛날 사람 사는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센트럴 시티의 고즈넉한 모습은 소박해서 오히려 정이 간다.  


나와 아내가 이곳에 처음 오게  된 것은, 1년 먼저 이곳에 유학을 온 같은 직장의 동료에 의해서다. 덴버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저녁, 그 친구 부부가 차를 몰고 우리 집으로 왔다. 밖에 나가서 차나 한잔하자고 해서 따라온 곳이 이곳 블랙호크였다. 생전 처음 카지노라는 걸 마주한 우리 부부는 경험 삼아 두어 시간 슬롯머신 게임을 하고 돌아왔다. 재미있고 신선한 경험이긴 했으나, 본디 허황된 욕심이 적은 성격인 나와 아내는 겜블링에 빠져들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곳에는 나를 유혹하는 것이 하나 있었다. 다름 아닌 카지노의 뷔페였는데, 이곳에서는 내가 엄청 좋아하는 크랩이 무제한 제공되는 곳이었다. 한국에서 크랩은 엄청 비싸서 제대로 맛보려면 출혈에 가까운 금액을 지불해야만 했다. 그런 크랩을 이곳에선 1인당 15불 정도면 실컷 먹을 수 있으니, 내게는 거의 파라다이스와 같았다. 자연스럽게 크랩을 핑계 삼아 가족과, 동료들과 함께 이곳에 들르면서 카지노를 그냥 지나칠 수 없게 되었다. 물론, 처음에는 재미 삼아 10~20불을 가지고 즐겼지만, 횟수가 거듭되면서 차츰 금액도 많아지고, 가랑비에 옷 젖듯이 손실이 조금씩 누적되었다. 그러면서,  따지는 못해도 본전을 찾고 싶은 심리가 자꾸 발길을 끌었다. 특히, 내 옆자리에서 거금의 잭팟이 터질 때면, 언젠가 우리에게도 저런 행운이 올 수 있겠지, 하는 막연한 기대심리까지 커지게 되었다. 그러나 거의 매번 기대는 실망으로 돌아서고, 늦은 밤 어두운 산길을 돌아 나올 때면, 아내는 "그 돈이면 한 주일 동안 우리 가족이 푸짐하게 먹을 수 있는 식재료로 냉장고를 가득 채울 수 있을 텐데......" 하며 자조 섞인 한숨을 쉬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굳은 다짐과 함께 우리 부부는 각 100달러 씩을 가지고 비교적 간 큰 배팅을 했다. 그러나 결과는 완패였다. 별 기대 없이 마지막 남은 2달러 배팅을 누르고 일어서려 하는데, 뜻하지 않는 1,500달러 잭팟이 터졌다. 번쩍이는 불빛과 함께 둥둥둥둥 울리는 잭팟소리가 가슴을 울렁거리게 했다. 물론, 이 정도는 카지노에서 그리 큰 잭팟은 아니지만, 그리 적은 금액도 아니었다. 특히, 우리 부부에겐 그동안 투자한 금액을 한방에 보상받을 정도의 멋진 잭팟이었다.

"아!!  이 맛에 사람들이 카지노에 열광하며 이 구석진 산골로 모이고 있구나!" 싶었다.

신나게 노래를 부르며 어두운 밤길을 돌아오던 그날의 희열은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 이후 우리 부부는 약속한 대로 한동안 발길을 끊었다. 그러나 서울로 돌아올 날이 가까워질수록 둘 곳 없는 마음을 위로한다는 핑계를 명분 삼아 다시 이곳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러나 더 이상의 잭팟은 없었다. 그럭저럭 조금씩 따기도 하고, 잃기도 하면서 그리 큰 위로를 받지 못하고 아쉬움과 함께 이곳의 추억은 끝을 맺었다.

돌이켜보면, 인간의 심리를 교묘하게 파고드는 겜블링의 유혹은 그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는 것 같다. 절대로 카지노의 유혹에 빠질 것 같지 않은 차분한 성격의 아내조차도 그 유혹을 쉽게 뿌리치지 못했다. 나 또한 그중 하나였다. 

한국에 돌아온 후, 가끔씩 그때의 추억을 들출 때면,  우리 부부는 언젠가 한 번 그곳에 가서 멋진 복수(?)를 하자며 의미 있는 미소를 짓곤 했다.  


오늘, 그 블랙호크 거리를 아내와 내가 아이들과 함께 걷고 있다.

거리는 세월의 흐름만큼 높은 건물들이 새로 들어서 있다. 내가 크랩의 유혹으로 자주 찾던 Isle Casino Hotel은 외형은 그대로였지만, Horseshoe Casino Hotel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 호텔은 라스베이거스에도 자리를 잡고 있는 유명 호텔 체인점이다. 이곳도 자본가의 잠식이 여기저기 보이고 있다. 호텔 라운지에 들어서니 기대했던 뷔페조차 레스토랑으로 바뀌어 있었다. 지배인에게 물어보니, 코로나로 인해 뷔페를 폐쇄하였다가 레스토랑으로 업종 변경을 했다 한다. 크랩을 실컷 먹을 것이라는 기대가 허망하게 무너져 버렸다. 아이들이 아빠의 기대가 무너진 것을 더 안타까워했다.

블랙호크 거리의 낮과 밤

블랙호크와 연결되는 센트럴시티로 갔다. 센트럴시티는 해발 8,496 피트(약 2,787미터)에 자리 잡은 작은 도시로, 지금은 거주 인구가 1,000명도 채 안 되는 작은 도시이다. 산악지역에 자리 잡은 도시답게 오르막과 내리막이 걷기에 만만치 않다. 메인 스트리트와 유레카 스트리트에는 1800년대 중반 붉은 벽돌로 지어진 아치한 건물들이 줄지어 있다. 이곳에는 센트럴시티 오페라 하우스와 교회, 앤티크샵(Antique Shop) 등이 소박한 옛 도시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고, 블랙호크보다는 작은 몇 개의 카지노와 Pub들도 들어서 있다.


센트럴시티 거리

저녁은 크랩을 못 먹는 대신 고풍스러운 옛 건물, Teller House의 JKQ BBQ를 택했다. 각자 입맛대로 스테이크, 소시지 등 몇 가지 음식으로 함께한 저녁은 어제 오늘의 어설픈 패스트푸드 식사를 보상받기에 충분했다. 특히, 로키마운틴 만년설의 청정수로 만든다는 콜로라도의 자랑, COORS 맥주는 그 신선한 맛이 그만이다. 성인이 되어 처음으로 맛을 본 아이들이 여태까지 마셔 본 맥주 중 최고라며 즐거운 탄성을 지른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카지노에 갔다. 아내는 멋진 복수를 하겠다는 의지를 다진다. 아이들도 라스베이거스에서의 첫 경험을 살려 잭팟 한번 터졌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얘기한다. 그 마음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그냥 좋은 경험으로 생각하고 게임을 즐기라고 말해 주었다. 결국, 아내의 간절한 복수의 의지도, 아이들의 잭팟 기대도 허망하게 끝이 났다. 나는 아내와 아이들의 게임을 지켜보는 것으로 만족을 했다. 사실, 밤을 새워도 끝이 없는 것이 겜블링이다. 그 속성을 알고 있는 나는 두 시간이 지날 즈음, 이쯤 해서 멈추자고 아내와 아이들에게 제안을 했다. 아이들도 카지노 슬롯머신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는 듯, 아빠의 제안을 아쉬움으로 받아들였다. 아쉬운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쯤 해서 멈추는 것이 '오히려 돈을 따는 것이라는 역설'을 아이들이 느끼기를 바라면서, 우리 가족의 카지노 게임은 끝을 맺었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 블랙호크의 밤이 깊어가고 있다.  

자정이 다가오고 있는데도, 이곳 외진 산골 마을의 카지노는 여전히 불야성을 이루고 있다. 누군가는 재미 삼아 오기도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단 한 번의 잭팟을 기대하며 오늘도 이곳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라스베이거스에서 카지노 사업으로 큰돈을 벌었던 유명 카지노 대부가 남긴 말이 있다.

"카지노에서 돈을 벌려면 카지노를 차려라!".

결국, 카지노에서 돈을 딴다는 것은 희망사항에 불과하다는 것을 강력히 시사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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