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기환 Jul 12. 2024

이별과 유산

  아버지를 고향 선영에 모시고 돌아왔다. 몇 날을 앓고 난 후, 산 자와 죽은 자의 공적인 이별을 위해 주민센터에 갔다.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이 일을, 아들인 나는 묵묵히 마무리하고 돌아왔다.

며칠 후 다시 주민센터에 들러 제적증명서와 가족관계증명서, 기본증명서를 발급받았다. 아버지 이름 옆에는 ‘사망’이라는 글자가 붉은 눈물로 박혀 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여러 번의 이별식을 했다. 장례식장에서, 화장장에서, 그리고 익산 선영에서. 그것이 마지막이 아니었다. 유품을 정리하면서 눈물의 작별을 했고, 오늘 서류상으로 또 한 번 가슴 저린 결별을 했다. 1932년 9월 26일, 이 세상에 이름 석 자를 올렸던 아버지는 이로써, 구십 성상의 굴곡 많은 삶을 자식들 가슴에 남긴 채 하늘나라에 적을 올렸다.  

   

  주민센터에서 발급받은 서류를 들고 농협에 갔다. 번호표를 뽑고 대기실에 앉아 통장을 펼쳐보았다. 통장은 아버지가 병원에 입원하기 얼마 전까지 이곳에 오셨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늘어가는 잔고를 보며 행복해하셨을 당신의 얼굴이 아프게 다가왔다.   

   

  아버지께서는 생전에 자식들과 술자리를 함께할 때면, 

"나는 자식들에게 물려줄 재산이 없으니 너희 형제끼리 싸울 일이 없어 다행이다"며 자랑스럽게 말씀하시곤 했다. 그럴 때마다 둘째와 막내는, 

“제발 자식들이 싸울 만큼 유산 좀 남겨주세요!”하며 한바탕 웃었다.

그랬던 아버지가 '천 오백만 원'이라는 거금을 남겨두고 가셨다. 자식들한테 매달 받은 용돈과 노령연금을 모으고 모은 돈이라 했다. 아버지는 이 돈을 장남인 나에게 자동차 사는데 보태라고 유언하셨다. 두 동생들에게는, 부모 모시며 고생한 큰 형과 형수에게 남기는 것이니 서운해하지 말라는 당부의 말도 덧붙이셨다. 나는 퇴직한 이후 불필요한 지출을 줄이기 위해 차를 없앴지만, 당신은 그것이 마음 아팠던 모양이었다. 

     

  아버지가 남기신 유산을 찾아 전액을 ‘형제 통장’에 입금했다. 아버지 병원비로 거의 바닥났던 통장이 다시 배가 불러왔다. 통장과 카드를 어머니께 드렸다. 말없이 통장을 보시던 어머니의 어깨가 가볍게 흔들렸다.

 

 20여 년 전쯤, 우리 삼 형제는 부모님의 노후를 위해 통장을 만들고 매달 일정금액을 입금했다. 돈이 모아지면서, 두 분이 쓰시기 편하도록 카드를 만들어드렸다. 우리는 이 통장을 ‘형제통장’이라 했고, 부모님은 ‘효자통장’이라 불렀다. 통장은 병원과 약국에 가실 일이 잦은 두 분의 발걸음을 가볍게 했다. 가끔씩 두 분이 외식을 할 때나 친구 분들과 술 한 잔 할 때도, 손자들에게 과자봉지나 선물꾸러미를 사들고 들어오실 때에도 이 카드로 결제하는 것을 매우 흡족해하셨다. 형제 통장은 그렇게 작으나마 효자노릇을 했다.    

  

이제 아버지의 유산은 오롯이 홀로 남은 어머니의 여생을 위한 통장이 되었다. 아버지는 가셨지만, 형제지간 우애하고 어머니 잘 모시고 살라는 당신의 유훈은 형제 통장과 함께 면면히 이어질 것이다. 





이전 08화 아버지의 병상일기4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